“제가요?”
“허, 이런!”
“도대체
결혼식을 언제 했다는 거예요?”
“지난
달 10일 토요일! 생각 안나?”
정호 모친은 이제 대놓고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거실로 들어가더니 마침 TV를
받치고 있는 유리받침대위에 굴러다니던 청첩장 한 장을 집더니 뒤따라온 그녀에게 내밀었다.
“잘
봐!”
혜영이 받아쥔 청첩장에는 신랑 김정호와 11월10일라는 글씨가 유독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거실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연신 철지난 청첩장을 들여다보던 혜영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11월 10일 이라면 그녀가 태권도 도장 아이들을
데리고 경기도 지사배 태권도 대회에 나갔던 날이었다. 워낙 큰 경기라 지금도 대회 날짜를 뚜렷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날은 아무런 아무런 결혼식이 없었다.그런데도 청첩장은 그날 결혼식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고
정호모친은 혜영 자신도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주장하니 혜영은 뭐가 뭔지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가 없었다. .
“이건
말도 안돼!”
혜영이 여전히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자 못마땅한 정호 모친은 이번에는 리모컨을 집어들어 TV받침대 밑에 있던 비디오를 향해 겨누고는 스위치를 세게 눌렀다.비디오가
곧바로 돌아가면서 TV의 화면에 웬 결혼식 장면이 나타났다.그
결혼식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정호였다.하얀 연미복을 입고 미소를 짓고있는 모습을 보여주던 비디오는 하객들의
모습을 천천히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 하객들틈에서 혜영은 초라한 모습으로 남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아니, 내가 왜 저기에 있지?”
혜영은 비디오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머리속이 핑 도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되지않았나 하는 두려움이 와락 들었다.그리고 가만히 있다가는 정호 모친으로부터
정말 미친 년 소리를 들을 판이었다.
“그럼
살림은 어디에 차린 거예요?”
“그건
왜?”
잠시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 금방 현실을 인정한 혜영을 보고 정호모친은 혹시나 혜영의 질투가 단란한 신혼분위기를 깨트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섞인 날카로운
눈빛을 혜영에게 던진다.
“그냥
궁금해서요.”
하지만 혜영이 안 가르쳐주도 상관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내뱉고는 TV드라마에
빠진 듯 입을 다물고 있자 비로소 정호 모친은 의심을 풀고는 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자동 어디라고 했는데…….가만
잠깐만 있어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낡은 수첩 하나를 들고나왔다. 그리고는
혜영앞에서 수첩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이내 그것을 그녀의 눈앞에 펼쳐보였다.
‘아들집-정자동 139-10번지 –
235-4936’
혜영은 이미 그 사이에 흥미를 잃었다는 듯 건성으로 수첩을 보는 척 했다. 그러나
그녀는 눈에 들어온 주소와 전화번호를 잃어먹지 않기위해서 필사적으로 머리속에 밀어넣었지만 완벽하게 외우지 못했다.
그 바람에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는데 때마침 정호모친은 극적으로 빈틈을 보여주었다.
“커피
한 잔 할래?”
“네.”
혜영이 주저없이 대답을 하자 정호모친은 거실 주방으로 가더니 수도꼭지를 틀어 커피포트에 물을 담기 시작했다. 혜영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라는 듯 그 틈을 이용하여 쥐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수첩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번개처럼 촬영하여 저장시켰다.
정호모친의 집을 나선 혜영은 곧바로 자신의 승용차에 올라타고는 스마트폰을 열어 몰래 촬영했던 정호의 전화번호를 확인했다.그리고는 곧바로 전화번호를 꽉꽉 눌렀다.
“……!”
그런데 전화는 컬러링이 몇 번이나 울리는데도 금방 연결되지 않았다. 혹시
전화번호가 틀렸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할 무렵 다행스럽게도 전화 저 너머에서 익숙한 정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혜영이냐?”
“아니
도대체 도둑장가를 들고 어디로 숨은 거야?”
혜영은 반가움과 서운함이 뒤섞인 묘한 감정에 다짜고짜 정호를 마구 몰아세웠다.
“아니
내가 언제 도둑 장가를 갔다고 그래?너도 왔었잖아!”
정호는 정말 억울하다는 소리로 대꾸했다.너무나도 자연스런 정호의 말투에
혜영의 머리속은 순간 또 한번 빙그르 돌았다.그건 그녀의 마음을 꽉 채웠던 질투를 꽉 밀어낸 기묘함때문이었다.
“도둑장가를
갔으면 누가 뭐래? 왜 나를 거기다
끌어들이는 거야?”
“허, 이런 억지보았나?”
“아무리
내가 신경쓰였다고 해서 정말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거
야?”
마침내 여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혜영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혜영아, 현실을 인정해. 설사 아직도 내게 감정이 남아있어도 말이야……”
“지금
내가 너에게 치근덕거리는 것으로 보이니? 전혀 아니거든! 도둑장가를
가놓고도 마치 나도 참석한 것으로 행동하니까 그게
문제라는 거야.”
혜영은 격해지려는 목소리를 최대한 냉정하게 가라앉히려고 이를 악물며 반박했다.
“혜영아, 난 네게 분명히 결혼을 통보했고 너는 틀림없이 그날 결혼식에 참석했어,”
“미안하지만
난 그런 기억이 없어. 지금이라도 네가 몰래 장가를 갔다고 인정해. 그럼 나도 화끈하게 네 결혼식을
축하해줄테니까.
“……”
“어째서
아무 말 안하는 거야?”
혜영이 쏘아부치자 침묵에 잠겼던 정호는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
했다.
“휴, 좋아, 우리집으로 와라. 네가
우리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네
기억을 확실하게 상기시켜즐께. 북문 터미날앞 정류소에 기다려.
퇴근후 나갈테니까.”
“알았어.”
혜영은 막상 정호가 단호하게 나오자 정말 자신의 기억에 이상이
생기지않았나 싶어 은근히 불안해졌다.
자신은 정말 정호의 결혼식에 참석해놓고는 애인을 빼앗긴 슬픈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지워버리고는 지금 엉뚱한 소동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지
슬며시 두려워기 시작했다.
“……”
정호는 약속장소에 정확하게 승용차를 몰고 나타났다.
“내
차로 갈아타.”
핼쓱한 모습의 정호는 혜영과의 만남이 불편한지 무뚝뚝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거북한 침묵을 지켰다.
“다왔다.”
처음으로 정호가 입을 열어 생각에 잠겼던 혜영이 얼른 창 밖을 보니 차는 성영아파트 103동옆의 소방도로에 들어서고 있었다. 양옆으로 단독주택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정호는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에 차를 주차시켰다.그리고는 역시나 말없이 앞장서서 뚜벅 뚜벅 걷더니 어떤 3층 단독주택의
마당안으로 거침없이 쏙 들어갔다.
그리고는 3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 밤색 현관문에 우뚝 섰다.그리고는 뒤따라오는 혜영을 개선장군처럼 잠깐 바라보더니 현관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곧바로 현관문이 열리며 상큼하고 단아하게 생긴 젊은 여자의 얼굴이 수줍게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