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영아, 이제 나도 인간이 되었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어느 소도시에 사는 30세의 혜영이 한밤중에 미친 듯이 울리는 스마트폰을 집어들자마자 뜬금없이 터져나온 절규였다. 3년동안 백수생활을 해온 피곤한 남친 정호였다.
“도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혜영은 지가 언제는 요괴였었나 하고 예쁜 눈을 살짝 찡그리며 되물었지만 휴대폰속에서는 동갑내기 정호가 꺼이 꺼이 우는 소리만 한동안 들려왔다.
“나 취직했다구!”
잠시 후 간신히 서러운 울음을 밀어낸 정호는 세상이 떠나가라고 고함을 질러댔다.그 바람에 혜영은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뭐. 정말이야!”
“그래!”
또다시 이어지는 정호의 환호에 이번에는 혜영의 마음이 격렬하게 반응을 했다.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혜영은 축하한다는 말부터 해야 했지만 그녀 역시 정호만큼이나 격한 격정에 휘씁리는 바람에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수 백 만명의 젊은 청춘들이 직장을 못구하고 거리에서 떠도는 대한민국의 힘든 시대에서 특별한 빽없이 직업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로 여겨지는 때였다.그리고 횡금만능의 시대에 취업을 못해 돈을 못 번다는 것은 거의 인간구실을 못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 마당에 당당히 직장을 구했으니 ‘인간이 되었다’는 정호의 절규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오죽 한이 맺혔으면 그랬을까. 그런데 하필 그런 절규를 왜 자기에게 제일 먼저 내뱉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자 혜영은 슬그머니 기분이 나빠졌다.
남친이 처음 백수생활을 시작했을 때에는 개인적인 잘못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에 그럭 저럭 봐줄만 했었다.하지만 사시사철 파란색 츄리닝만 입고 다니며 차츰 백수생활에 적응해가는 남친을 곱게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자극을 주기위해서 일부러 모질게 대했는데 안타깝게도 정호는 그것을 진짜로 받아들이고 매우 섭섭해 하는 눈치였다.그때문에 차츰 정호와의 사이가 어색해지는 것같아 방법을 잘못 썼나 싶어 조바심하고 있을 무렵 정호가 취업이 되었다는 소식에 혜영은 비로소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그동안 정호를 기다리며 허송세월한 세월에 대한 보상받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축하해!한턱 쏴!”
“좋아, 당장 나와!”
“알……알았어!”
혜영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취업합격통지를 받은 후 제일 먼저 자신을 불러준 것이 너무 고마워 단숨에 동네 어귀에 있는 허름한 호프집으로 달려나갔다. 역시 정호는 훌륭한 인간이 되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꾀죄죄한 미남이었던 그는 더 이상 루저가 아니라 젊은 능력자였다.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했던 마법의 저주에서 그를 풀어준 것은 스마트폰으로 날아온 20자도 채 안되는 취업합격 문자였다며 정호는 승리의 증거를 혜영에게 내보이며 자랑한다.
“하여간 백수탈출 축하해.”
“응.”
“그런데 거기 뭐하는 회사야?”
혜영은 정호가 생맥주를 시원스럽게 들이키자 얼른 땅콩을 오징어다리로 감싸서 정호의 입에 밀어넣어주며 자못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으응.상상(想像)프로젝트개발공사라고 소프트웨어 개발하는 곳이야.”
“우와! 벤처기업이네! 어디 있어?”
“응, 팔달산 북쪽 기슭에 있어.”
“그런데 그런 빵빵한 회사에 어떻게 들어갔어?”
“비밀이다.흐흐,”
“말해봐, 나도 좀 들어가게.”
“그게,”
정호는 혜영의 마음이 진심인지 헤아리는 듯 잠시 대답하기를 주저했다.꼬맹이 아이들을 데리고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데 조금 싫증이 난 혜영은 정호에게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나 모르는 무슨 빽 썼어?”
“빽?굳이 빽이라면 방의원 빽일까?”
정호의 뜬금없는 소리에 혜영은 오징어 다리를 질겅 질겅 씹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의원?”
“우리 지역구 방대한 국회의원 말이야.”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지난 번 선거에서 자기가 당선되면 모두 취업시켜준다고 했잖아?”
“에이.말하기 싫으니까 지금 일부러 딴소리하는 거지”
혜영은 정호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정호가 워낙 진지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6개월 전 매우 격렬했던 4월 국회의원 총선을 잠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엄청난 재력과 폭넓은 인맥을 보유한 방대한 의원은 3년 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도 점쳐지는 유력한 잠룡(潛龍)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4선 의원에 당선되면 즉시 청년실업을 100% 해결하겠다고 다소 무모한 공약을 내세우고 표심잡기에 나섰다. 이미 정치인의 얄팍한 혓바닥에 수많이 희롱당해왔지만 청년백수들은 그의 공약에 또다시 마음이 흔들렸다.그만큼 그들의 절망적이고 비참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권력에 환장했길래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거침없이 쏟아낼까.
지금 청년들의 실업대란은 전세계적인 경기불황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한데 제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어떻게 한국에서만 그런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실업문제를 완전히 해결한다는 것은 필시 교활한 방의원이 가엾은 실업자들을 낚기 위한 달콤한 미끼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점점 인간에서 짐승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대부분의 청년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표를 던졌던 모양이었다.
“내 말이 우습지?”
“아니. 오죽했으면 그런 허황된 공약을 믿었겠어?”
“그런데 정말 기적처럼 직장을 구하게 된거야. 나같이 튼튼한 빽도 없고 지지리 운도 없는 놈이 쟁쟁한 개발공사에 덜컥 취업이 되었으니 아무리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방의원이 생각나지 않겠어? 안그래?”
“그보다는 이제 네 운발이 열리기 시작한 거겠지.”
“어쨌든 결과가 좋으니 됐어.”
“그래. 너무 방의원을 구세주로 여기지 말고 오늘은 술이나 맘껏 마셔라. 내가 살께!”
“탱큐!”
그날 새벽 2시까지 정호와 함께 맥주파티를 열고 집으로 돌아온 혜영은 여러가지 생각으로 잠을 쉽게 이를 수 없었다.
(그 회사 혹시 싸구려 아니겠지?)
정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는 영원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취직이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지자, 오히려 불안한 생각이 불쑥 불쑥 들면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호와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서 혹시 회사가 부도라도 나서 지수가 다시 기약없는 백수가 되어버리면 정말 큰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