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스크린속에서 일련의 반전사태를 매우 수쳑해진 표정으로 지켜보던 황박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를 찾기위해서 헛수고하지마라! 난 이 빌어먹을 곳을 떠날 것이다.”
“떠난다고?”
“너희들은 모든 인간의 두뇌를 완전히 개발해주고 행복하게 살게해주려는 성스러운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태어난 소유천마저 잡아들였다!새로운 인류로 진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발로 차버리다니……내 꿈을 비참하게 짓밟힌 이곳을 떠나겠다.”
“그건 처음부터 헛된 꿈이었어!”
공노인이 질책을 하자 황박사는 새삼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너희들처럼 진화를 거부하는 멍청한 작자들하고 더 이상 엮여서 살고싶지 않다.난 다른 곳에서 내 꿈을 펼칠테다.”
황박사의 넋두리를 들고있던 지수가 목소리를 높이며 눈을 부릅떴다.
“누구 맘대로!난 반드시 당신을 잡고말겠어.”
”나를 잡는다고? 한가지 비밀을 알려주지.’
“비밀?”
“이 정보탑의 제2통제실에는 우주비행선이 숨겨져 있다.”
“우주비행선?”
“그래.”
“교활한 놈!”
“어쨌든 정확하게 10분후에 우주비행선은 발사된다. 그러니 빨리 이 중앙통제실에서 꺼져주는게 좋을 거다.”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은 여기서 절대로 못 도망칠 수 없어!”
“웃기는 소리!”
황박사의 웃음이 끝나자 마자 스크린에는 우주비행선 발사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는 ‘600’이라는 붉은 숫자가 나타났다.그와 동시에 코브라에서 금속성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0분 후에 본 우주비행선은 발사됩니다. 카운트다운, 600, 599,598,”
“누구 맘대로!”
이미 모습을 감추어 버린 황박사를 향해 고함을 치던 지수는 얼른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소유천, 당장 카운터를 멈춰!”
지수가 고함을 치자마자 그의 뇌속에 갇혀있는 소유천이 명령을 수행했는지 무섭게 빠르게 진행되던 카운터다운이 갑자기 570에서 멈추어버렸다.그리고 곧바로 스크린에 몹시 당황한 황박사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그는 코브라를 움직여 카운터다운을 되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이미 지수가 장악한 카운터다운은 끝내 작동하지 않았다.이윽고 분노가 폭발한 황박사는 지수를 노려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놈! 빨리 우주비행선을 작동시켜!”
“흥, 어림없는 소리!”
“이노옴!”
“그렇게 숨어서 소리만 지르지말고 순순히 자수하시죠.”
“아, 네 놈이 끝내……”
스크린속에서 황박사는 마침내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그러자 그때 한동인이 지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황박사를 그만 보내주는 것이 어때?”
“네?”
“우리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구나.”
“그런가요?”
“소유천이 없으면 그도 한동안 힘을 못쓸거야.”
“알았습니다.”
마지못해 지수가 고개를 끄떡이자 멈추어있던 카운터 다운이 571부터 다시 시작되었다.그러자유동인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지수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고맙군. 자, 우리도 우리의 제국으로 떠나야겠다.”
한동인의 말에 정화는 새삼 화들짝 놀란다.
“아빠!”
눈물을 글썽이는 딸의 모습에 한동인은 잠시 착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타화자재천국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야.”
“아빠, 제발 가지마요!”
또다시 자신을 떠나려는 아빠가 매우 야속한지 정화는 한동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딱한 모습에 지수도 한동인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가상의 세계로 돌아가지 마세요.여기서 우리랑 살아요.”
“안돼, 슬픔과 고통만이 있는 현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안그렇소? 여러분!”
유동인은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그러자 그를 따르는 나머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환호했다. 정화는 아빠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빠,그곳은 환영의 세계에요.”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이다.그 소중한 인생을 괴로와하면 서 허비하고 싶지가 않구나.”
“아빠, 제발!”
“타화자재천국에서는 네 엄마가 살아 있어.난 그곳에서는 행복해.”
“그럼 나는요?”
“너는 여기서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잖니?”
“그래도 난 아빠하고 함께 살고 싶어요.”
“그럼 너도 가자.”
“아빠,그건,”
“가기싫은 거지?그럼 나도 만리지 말거라. 그만 난 간다.”
한동인은 마침내 마음을 굳힌 듯 정화에게 한 마디 남기고 뒤돌아섰다.그런데 그가 문득 공노인을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우리가 제국으로 돌아간 후 행여나 엉뚱한 짓 하지마시죠. 그때에는 핵원자로 카운트다운이 다시 시작될 테니까.”
“알, 알았소.”
공노인의 얼굴이 핼쑥해졌다.그의 말에 어느 정도 안심을 했는지 유동인은 눈물을 쏟고있는 딸에게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아까 왔던 통제실의 엘리베이터로 향해 걸음을 옮기자 같이 따라왔던 시민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아빠,”
정화는 다시 한번 유동인을 애타게 불러본다.하지만 그는 다시는 뒤도 안돌아보고 엘리베이터속으로 담담히 들어섰다. 그리고 다른 시민들도 모두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르 닫혔다.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정화의 볼에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빠는 바보야!”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닫혀진 엘리베이터로 쫒아갔다.
“아빠!”
냉정하게 자신의 세계로 떠나가 버린 아빠를 부르며 눈물짓는 정화를 지수는 자기 품에 꼬옥 안아준다. 마침내 슬픔이 봇물처럼 폭발한 듯 그녀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그때 영재가 공노인에게 다가와 대뜸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저는 황박사를 따라가겠습니다.
“아니, 네가 왜?”
“저는 지수와 친구들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고백을 하듯 힘들게 말을 마친 영재는 지수를 슬쩍 바라본다.공노인은 얼른 영재의 손을 움켜잡았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안그러냐?”
영재를 만류하던 공노인은 지수를 향해 도움을 청하듯 물었다.
“맞습니다.”
지수는 착잡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떡이었지만 영재는 조용히 공노인의 손을 빼냈다.그리고는 더 말릴 틈도 주지않고 후다닥 2층 통제실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그리고는 문앞까지 올라간 영재는 잠시 멈추어서서 손을 힘없이 흔들더니 곧 통제실안으로 사라졌다
“200, 199, ”
영재가 사라진 후 얼마 안 있다가 제2통제실에서비행선 엔진이 작동하는 기계소음이 새어나왔다.
“59, 58, 57”
“2,1,0, 쾅, ”
마침내 뭔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고 하얀 연기가 중앙통제실로 안개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잠시 후 통제실 창문 너머로 흰 연기를 내뿜으며 딴 세상을 향해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우주비행선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높이까지 올라간 우주비행선은 공중에서 시민들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하는 듯 잠깐 멈칫거리더니 곧 엄청난 속도로 하늘 높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우주비행선은 푸른 여름 하늘에 한줄기 연기만을 외롭게 남긴 채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공노인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지월이 그의 수하들을 데리고 그앞으로 다가왔다.지월은 공노인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소유천도 잡았으니 나도 그만 물러갈까 하네”
“물러가다니?”
공노인은 마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들은 사람처럼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건 또한 채연도 마찬가지인 듯 지월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폐하, 왜 그렇게 빨리 가려고 하시나요?”
“채연군관, 우리도 이제 우리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이렇게 빨리……”
채연은 빨리 돌아가려는 지월이 매우 원망스러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그리고 불현듯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감추려고 시선을 팔달산 기슭으로 슬그머니 돌렸다. 종주는 아직 이별할 준비가 안되어있는 누이동생이 안스러운지 가만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채연아, 나중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잖아?”
“그렇지만 그때는 이 모습을 잃어버릴텐데…… 지수가 알아볼까요?”
채연은 자신이 그동안 빌려와 쓰고있던 아름다운 마네킹 몸을 새삼 버리기가 아까운 듯 한참을 바라본다.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지수는 채연에게 다가와 가만히 손을 쥐었다.
“걱정마, 난 너의 감촉을 잃지 않을테니까.”
그리고 지수의 약속에 채연은 눈물을 글썽이었다. 그리고는 지수를 와락 껴안고는 한동안 놓아주지 않는다.
“자, 그만 가자.”
장용사의 눈짓에 종주가 조용히 다가와 채연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토닥거렸다. 그제서야 그녀는 겨우 지수에게서 떨어졌다.지월은 미소를 머금고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지수에게 말했다.
“소유천을 잘 관리하게나. 놈도 언제가는 쓸모가 있을 걸세. 살다보면 악은 악으로 퇴치해야 할 때도 있으니까.”
“잘 알겠습니다.”
지수가 지월의 말을 명심하겠다는 뜻으로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지월, 장용사, 종주 그리고 채연도 동시에 고개를 숙인다. 다시 고개를 들고 지수를 바라보는 채연의 눈빛이 눈물에 아롱져 보이는 순간 지월을 선두로 네 사람은 순식간에 푸른 색의 빛줄기로 변했다.그리고는 천지가 뒤흔들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어디론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