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정보탑을 은밀하게 기어오르는 두 사람.
“……!”
정보탑의 용두(龍頭)에 화살을 쏘아박고 긴 밧줄을 걸어맨 지수는 황박사가 장악한 수원시를 일초라도 빨리 구해내기위해서 젖먹던힘을 다해 오르고 있었다. 그나마 용의 비늘이 황금색 철갑으로 일정하게 돌출되어 있어서 올라가는 것은 수월했다.
그의 옆에서 채연 역시 스파이더맨처럼 밧줄에 의지한 채 힘겹게 오르고 있다.정보탑 전체가 황금빛 조명으로 비추어지고 있어서 경비병이 그들을 발견하고 언제 총질을 해댈지 몰라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하며 정보탑의 중앙통제실을 향해 오른다.
황박사를 긴급체포하려던 장시장이 마달수에 의해서 어이없이 살해되고 또한 의사당은 갑자기 밀림으로 변해버리는 기괴한 상황을 목격한 지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극심한 공포를 느꼈었다. 또한 연모의 정을 갖고 있던 정화마저 자신을 배신자로 여기고 이를 갈고 있는 것을 알고는 맥이 풀려 모든 것을 그냥 접고 아무도 모르는 깊은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정화를 그대로 포기하고 싶지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마음을 독하게 먹고 소유천과 맞서 싸워 정화를 조작된 나쁜 기억에서 구해내기로 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외부에 황박사의 만행을 폭로를 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은 자칫 수백 만 명의 시민을 일시에 죽게 만들 수도 있어 부득이 포기했다.
대신 호랑이굴로 들어가면 뭔가 소유천의 약점을 찾아낼 지도 모른다는 아주 실날 같은 희망을 품고 소유천이 주로 머무르고 있을 정보탑의 중앙통제실로 숨어든 것이었다.
“……!”
이윽고 용두까지 다 올라간 지수는 조심스럽게 창문의 유리창을 다이야몬드 칼로 잘라냈다.높은 고층이라고 안심을 해서 그런지 의외로 창문에는 보안시스템이 설치되어있지 않았다. 천운(天運)이라고 여기며 지수는 잘라진 유리창 사이로 손을 넣어 문고리를 땄다.
창고로 쓰이는 듯한 방에 들어선 두 사람은 곧바로 중앙통제실을 향해 도둑고양이처럼 움직였다.그들이 거의 중앙통제실로 접근했을 무렵 갑자기 주변이 어둠침침해졌다.마치 거대한 검은 커튼이 날아와 그들을 덮어버린 듯 했다.
“갑자기 왜 그러지?”
갑작스런 변화에 지수는 화들짝 놀라며 유심히 주변을 살폈다.그때 20여 미터 떨어진 전방에 오렌지 색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그곳에 시선을 집중하니 불빛 너머로 회색 봉고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지수는 후방을 조심스럽게 살피고있는 채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저 차를 살펴보고 올 테니 넌 여기에 꼼짝말고 있어.”
“위험해. 그냥 지나치자!”
“아냐, 뭔가 수상해.”
지수는 채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색 차량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가 차량에 거의 다 접근했을 무렵 어디선가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오면서 그의 앞길을 막았던 어둠이 차츰 걷히기 시작했다.어둠이 완전히 사라지자 이름모를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 피어있고 새소리들이 가득찬 화사한 정원이 드러났다.지수는 예상치못한 조화에 놀라음보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몸을 떨었다.
되돌아갈 생각으로 뒤돌아섰지만 이상하게도 채연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여기저기 찾아헤매다가 지수는 결국 채연이 찾는 것을 포기하고 서둘러 정원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
주위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극도로 신경을 써가며 정원을 빠져나가는 그의 눈앞에 한폭의 그림처럼 아담한 초가집이 홀연히 나타났다.
초가집 뒷곁에 우거져 있는 대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하아프를 연주하는 듯한 소리가 아련하게 흘러 나왔다. 그리고 황톳빛 마당 한 구석에는 돌로 동그랗게 쌓아 만든 우물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 소녀가 물을 긷고 있었다. 곱게 땋은 머리에 붉은 댕기를 메고 연분홍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녀는 우물속에서 두레박을 올리다가는 문득 하늘을 바라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
그런데 소녀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녀는 아련하게 무척 보고싶었던 정화였다.
“정, 정화?”
지수가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을 때 그를 알아본 정화도 깜짝 놀란다. 그리고는 곧 반가운 미소를 짓고는 황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아니, 여기서 만나다니!”
반색을 하는 정화의 갸름한 얼굴이 빛났다.정화의 도툼하고 붉은 입술에서 달디 단 과일을 한 입 깨물은 듯 향기가 가볍게 풍겨나왔다.
“난 너를 구해야 하는데……”
지수는 너무나 뜻밖의 장소에서 정화를 만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말을 맺지 못했다.그런그의 모습이 고맙다는 듯 지수를 응시하며 배시시 웃는다.그녀의 웃음을 따라 온 정원의 모든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
지수의 마음에서도 세상의 모든 걱정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는 소유천에 대한 분노마저도 엷어지고 나중에는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급기야는 지수의 마음속에서 번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사랑스런 정화와 정원에서 앉아 담소나 나누며 살고싶다는 이상한 열망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그런 그의 마음이 통했는지 정화는 홍조를 띠우며 지수에게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한 하얀 작은 손을 내밀었다.대리석같이 매끈한 정화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촉촉했다.정화는 지수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런 필요없어.난 그곳을 탈출했거든.”
“정말이야?”
“응. 그리고 난 이곳에 살아.”
“이곳에?”
“그래. 골치아픈 세상 다 접어버리고 이제나 저제나 난 자기가 오기를 기다렸어.”
정화는 지수에게 살짝 예사롭지않은 눈빛을 흘리고는 수줍게 웃는다.자기라는정화의 호칭이 지수의 심장을 쿵꽝 쿵꽝 뛰놀게 만들었다.순식간에 격정적으로 되어버린 지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나를 미워하는 줄로 알았는데.”
“아니야.”
“정말 고마워.”
“그만 저기 우리집으로 들어가서 그동안의 이야기 좀 들려줘.”
재촉하듯 말을 마친 정화는 그 말을 남기고는 얼른 물동이를 머리에 이었다.머리에 얹은 물동이를 양손으로 잡기위해 정화가 두 손을 올리는 바람에 정화의 깊게 파인 허리선이 더욱 뇌쇄적으로 좌우로 흔들렸다.지수는 정화가 금방 어디론가 사라져버릴까봐 서둘러 따라갔다.
부엌으로 들어간 정화는 정갈하게 꾸며진 부엌에서 머리에 이었던 물동이의 물을 커다란 항아리에 붓기 시작했다.
지수가 부엌문 앞에 엉거주춤 서서 안을 살피자 물을 다 채운 정화는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지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한 척 어둠침침한 부엌으로 들어섰다.
“배고프지?”
정화는 정겹게 묻고는 먹을 것을 찾아 찬장속을 이리저리 분주하게 더듬었다.
왠지 설레이는 마음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지수의 눈이 부엌에 익숙해지면서 안에 있던 사물들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왔다.
“……!”
그중에서도 그의 시선을 강하게 끄는 것이 있었다.어둠침침한 부엌을 그나마 밝혀주던 낮은 창가밑의 나무판자위에 나란히 진열되어있는 투명한 호리병들이었다.
대부분 텅 비여 있었는데 첫번째 호리병에는 뭔가 잔뜩 우글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지수는 얼른 호리병으로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개미만큼 작아진 그들은 얼마전 대원품전에서 호리병으로 빨려들어간 지월과 그의 아마라들이었다.
“아니 이 자들은……”
지수가 매우 놀라며 묻자 정화는 흘끔 뒤를 돌아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 툭 내뱉는다.
“그건 오빠가 사냥한 아마라들이야.”
“오빠가?”
“응.”
“……!”
몇 마디의 대화끝에 지수의 눈빛이 서서히 예리해졌지만 정화는 더 이상 지수에게 신경을 안쓰고 밥상을 들고는 조용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지수는 문득 솟구치는 의구심 때문에 방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망서리는데 열린 방문사이로 정화가 빼꼼히 내다본다. 그녀의 눈빛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지수는 그만 모든 의심을 털어버리고는 강력한 자석앞의 쇠붙이처럼 힘없이 끌려갔다.
“......!”
은은한 석양빛으로 야릇한 분위기를 달구고 있는 방의 아랫목에는 하얀 이불이 새침하게 놓여 있었다.세상의 모든 풍파에서 완전히 비켜나 있는 듯 조그만 고요한 방안에는 서로 마주보고있는 젊은 청춘 남녀의 설레이는 숨소리만이 점점 크게 차 올라왔다.
지구상에 정화와 단 둘이만 남겨진 듯한 기분 때문에 지수의 심장은 정화의 자그만한 옷깃소리에도 다시 쿵꽝 쿵꽝 뛰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정화의 손이 지수의 손을 슬그머니 당겨잡았다.그를 치켜보는 정화의 눈이 심상치않게 빛났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잊고 자신과영원히 같이 있자는 애절함이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지수는 모든 것을 잊고 정화와 영원히 살기로 결심했다.그런 지수의 뜨거운 눈빛이 전해졌는지 정화는 서서히 자신의 상의를 벗고는 하얀 이불위에 살포시 누웠다. 지수가 나이답지않게 성숙한 정화의 몸위로 타고 올라가 봉긋하게 솟은 붉은 유두에 키스를 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앙칼진 소리가 벽력같이 들려왔다.
“정신차려!”
지수가 깜짝놀라 뒤돌아보니 언제 달려왔는지 채연이 성난 표정으로 나타나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채연은 지수에게 번개같이 달려와 다짜고짜 따귀를 사정없이 올려붙였다.그 바람에 정신을 되찾은 듯 지수는 채연을 알아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채연이?”
“하여간 남자들이란……”
채연은 지수를 향해 눈을 흘기다가 정화를 향해 돌아서 쏘아부쳤다.
“이제 정체를 드러내시지?”
채연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얼굴을 할켜버릴 듯 노려보자 당혹해하던 정화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지고 미모의 낯선 여인이 그곳에 나타났다.
“당신 누구야?”
지수가 놀라움으로 두 눈이 휘둥그래지자 채연은 그의 손을 나꿔어챘다.
“저것은 소유천이야! 빨리 튀어!”
따발총처럼 쏘아부친 채연은 지수의 손을 나꾸어채고는 방문밖으로 뛰쳐나갔다.채연의 손에 이끌려 황토빛 마당에 엎어지듯이 끌려나오던 지수는 싸릿문 대문앞에서 우뚝 멈춰섰다.
“왜그래?”
“네 오빠를 구해야지!”
그 말을 내뱉고는 지수는 말릴 틈도 없이 다시 쏜살같이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다. 부엌으로 뛰어든 지수는 아마라들이 잡혀있는 호리병을 나꿔채려고 했다.그러나 이미 지수의 속셈을 알아채고는 부엌으로 달려온 소유천은 붉은 양산으로 사정없이 그의 손목을 내리쳤다. 비록 붉은 양산은 빗나갔지만 그의 손목에 큰 생채기를 남기고 말았다.지수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손목을 부여잡고 있는 사이 소유천은 호리병을 곧바로 챙겨 자신의 허리에 달았다.그리고는 지수에게 다가가 예리한 창끝으로 돌변한 붉은 양산의 끝을 지수의 턱에 들이대며 소리쳤다.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대다니!”
그리고 소유천이 날카로운 칼끝으로 지수의 목줄기를 사정없이 찌르려는 순간 난데없는 화살이 날아와 소유천의 왼쪽 어깨에 꽃혔다.마당에서 채연이 급하게 날린 화살이었다.소유천은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어깨죽지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그틈을 타 지수는 다시 호리병을 나꾸어채려고 했으나 그 와중에도 소유천은 잽싸게 몸을 틀어 피해버렸다.
“그만 도망쳐!”
보다못한 채연이 마당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고함을 쳤다. 그러나 지수는 아마라를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소유천의 호리병을 나꿔채려 했다. 그러나 소유천은 이번에도 재빨리 지수의 손길을 피해버렸다.그런데 헛손질을 한 지수의 손은 소유천의 허리에 매달려있던 또다른 호리병을 움켜쥐었다.그리고는 그것을 재빨리 뜯어내 후다닥 마당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 사이 채연은 또다른 화살을 소유천에게 날리며 지수를 엄호해주었다. 소유천은 자신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잠깐 주춤했다. 그 사이에 두 사람은 죽기 살기로 뛰기 시작했다.
“거기 서라!”
지수에게 호리병 하나를 빼앗긴 소유천은 집요하게 쫓아와 금방 지수와 채연의 등뒤에까지 따라 붙었다.
“호호, 이 타화자재천국에서는 아무도 도망 못간다.”
소유천의 호언대로 죽기살기로 도망쳐나온 정원에는 정말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두 사람이 우왕좌왕하자 소유천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붉은 양산을 긴 창으로 바꾸어 성큼 성큼 다가왔다.하지만 채연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별로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채연은 의미있는 웃음을 짓더니 정원의 화단에 심어져있던2미터 크기의 해바라기를 잡고는 부러질 정도로 세게 당겨버렸다.그 순간 정원의 하늘에서 마른 벼락이 쳤다.그리고 동시에 기세좋게 두 사람의 목을 찌르기 위해서 붉은 창을 치켜들던 소유천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대신 채연은 그들이 처음에 보았던 회색 봉고차에 어느 새 앉아있었다. 또한 지수는 차창밖에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그때 허공에서 소유천의 섬뜩한 절규가 메아리처럼 터져나왔다.
“이놈들! 뛰어봤자 벼룩이다. 어차피 너희들의 세상은 다 내것이니까!”
“흥, 그 벼룩의 무서움을 톡톡히 보여주마!”
채연이 형체가 보이지않는 소유천을 향해 사납게 외치자 그때까지도 상황을 완전히 파악못한 지수가 풀린 눈빛으로 채연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리는 중앙통제실에 들어가기 전에 여우궁의 덫에 걸렸던거야.”
“그래? 넌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
“소유천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아마라의 눈을 속일수는 없거든.”
“그랬었군.”
“자, 빨리 여기를 벗어나자!”
채연은 봉고차에 뛰어내리더니 아직도 긴가민가하고 있는 지수를 재촉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자신들이 처음 침투했던 창고방을 찾아 긴 복도를 부리나케 뛰어갔다. 비상벨이 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두 사람이 창고방을 겨우 찾아 들어서는 순간 문주변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에 튀었다.
“이크, 이건 또 뭐야?”
두 사람이 놀란 시선으로 주위를 뒤돌아보니 복도에 한떼의 무장 보안군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개미떼처럼 밀려오는 보안군들의 모습을 보고는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지수는 채연에게 창문밖으로 내려진 밧줄을 먼저 타고내려가라고 소리쳤다.채연이 서둘러 창밖으로 사라지자 그도 곧바로 밧줄을 잡고는 창문밖으로 몸을 날렸다.
곧바로 두 사람이 사라진 유리창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쏟아지는 레이저 빔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