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네가 비소에 중독되었는데도 죽지않고 살아났다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말을 마친 지월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지수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씀은 폐하가 제 머리속으로 흘러나온 비소를 처리하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까?”
“그래.”
“아, 이런,저는 폐하가 비책(秘策)으로 비소를 없앤 것으로 알았는데요.”
“너무 실망마라. 너의 아마라가 혹시 기억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니까.”
“제 아마라가요?”
“자, 네 아마라를 불러내어 물어보자.”
말을 마친 지월이 손을 뻗어 지수의 머리위로 올리자 곧바로 지수의 모습을 닮은 푸른 빛이 나타났다.지월은 단도직입적으로 푸른 빛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누가 지수를 구해주었는지 아느냐?”
푸른 빛속에서 익숙하면서도 야릇한 지수의 목소리가 맑게 흘러나왔다.
“폐하, 전 당시 비소의 독이 워낙 강해서 의식을 완전히 잊어버린 탓에 아무 것도 기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런,”
지월은 크게 실망을 한 듯 탄식을 했다. 그리고는 푸른 빛에게 손짓을 하자 푸른 빛은 얼른 지수의 머리속으로 다시 스며들어갔다.지월은 지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네 아마라마저 기억을 못하니 참 큰일이구나.”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이 있습니다.”
지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떼자 지월의 얼굴빛이 금방 환해졌다.
“그게 뭐더냐?”
“제가 비소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때 분명히 누군가 저를 발견하고 뭔가 조치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자에게 저를 어디에서 발견했고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물어보면 뭔가 단서를 찾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것 일리있는 생각이다.”
지월은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편전에 늘어선 신하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여봐라! 너희들중에 누가 비소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던 지수를 발견하고 구해주었느냐?”
그러나 편전에 들어선 신하들은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본다. 그러자 지월은 승상을 노려보며 다시 크게 물었다.
“이제 승상의 눈치는 안봐도 된다. 누가 이 아이를 구해주었더냐?”
“……”
“이런, 너희들중에는 아무도 지수를 구해준 사람이 없다는 말이지? 그럼 당장 방을 내려 예전에 지수를 발견했거나 구조해주었던 사람을 빨리 알아보거라.”
“네.”
신하중에서 이조판서의 관복을 걸친 자가 고개를 숙여 대답을 하자 지금껏 잠자코 있던 영재가 뒷짐을 진 채 불쑥 나섰다.
“뭐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뭐라고?”
지월은 영재가 지껄인 말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러거나 말거나 영재는 지수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이렇게 하면 생각날까? 이 멍청한 놈아!”
느닷없이 고함을 지른 영재는 재빨리 뒷짐에서 손을 빼냈는데 그의 손에 날카로운 비수가 번쩍거렸다. 비수는 지수의 오른쪽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방심하고 있다가 칼에 찔린 지수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만 바닥으로 넘어졌다. 본능적으로 옆구리를 감싼 지수의 가락사이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이놈! 이게 무슨 짓이야!”
뜻밖의 사태에 신하들은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하지만 장용사는 무인답게 본능적으로 장검을 재빠르게 빼들고는 영재를 향해 겨누었다.하지만 피묻은 단도를 쥔 영재는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고 키득거릴 뿐이었다.
“……!”
그런데 그때 영재의 정수리위에서 갑자기 거대한 붉은 빛살이 쏟아져나왔다.순식간에 대원품전의 천정까지 솟구쳤던 빛살은 서서히 인간의 형상으로 바뀌어 갔다. 하얀 투피스를 차려입고 붉은 양산을 거머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여인의 모습이 완전히 형성되자 영재는 줄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이리 저리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픽 쓰러졌다. 대원품전의 한 가운데 정체불명의 여인이 나타나자 장용사는 재빨리 지월을 호위하고는 여인에게 소리쳤다.
“넌 누구냐?”
“난 대환희국의 지배자 소유천이다.”
“뭐라고? 소유천!”
소유천이라는 소리에 장용사는 깜짝 놀랐다.하지만 붉은 우산을 이리 저리 흔들던 소유천은 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지수를 향해 돌아섰다.
“이놈아, 너는 지금 비소에 중독되었다.후후,”
“뭐, 비소!”
“자, 죽기전에 빨리 기억을 짜내어 비소를 맹물로 만들어야지,예전에 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서!”
“비열한 놈!”
“욕할 시간 없을텐데……너만의 비법을 쓰란 말이야!빨리!”
소유천이 비웃으며 재촉했지만 지수는 고통스럽게 신음만 내뱉을 뿐이었다.그러자 소유천은 이번에는 지월을 향해 매섭게 소리쳤다.
“이놈을 그냥 죽게 놔둘 거야!빨리 비책을 써야지!”
소유천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지월은 극심한 고통으로 몸을 비틀기 시작하는지수에게 달려가 와락 끌어앉았다.
“지수야,어떡하냐?”
“빨리 저를 구해준 자를 찾으세요.으헉,”
“누가 이 아이를 살릴 수 없느냐!”
지월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하들을 둘러보았으나 모두 곤혹스런 표정을 지을 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그 광경을 바라보던 마침내 소유천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지수앞으로 다가왔다.
“특별한 비책은 없었군. 넌 단지 우연히 운좋게 살아난 것뿐이야.호호,”
소유천은 비로소 큰 걱정거리를 해결했다는 듯 유쾌하게 웃어제켰다.그의 웃음소리가 못마땅한 장용사 김경호는 울그락 불그락 한 얼굴을 하고는 소유천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런, 방자한 것, 감히 폐하의 손님을 해치다니!내 너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