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들 꼼짝마!”
검귀는 번쩍이는 검을 거머쥔 채 눈알을 부라리며 지수와 영재에게 다가왔다.
“이런,”
깜짝 놀란 지수와 영재는 도망갈 길을 찾았지만 검귀의 군사들이 신속하게 그들을 에워싸버렸다. 아이들 코앞까지 다가온 검귀는 주저없이 지수의 목에 번쩍거리는 검을 갖다댔다.
“네놈이 감히 여기까지 들어오다니……누가 아마라궁으로 들어오는 비밀번호를 가르쳐주었느냐?”
“푸른 빛이 가르쳐 주었소.”
지수가 당당히 되받아치자 검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더니 곧 지수의 멱살을 쥐고는 지수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네 놈이 혼자 살겠다고 아라마궁을 함부로 노출시켜!”
검귀의 아리송한 질책은 계속 되었다.
“지금 소유천이 아마라궁을 찾아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는 마당에 암호를 함부로흘리다니! 내 너를 이적죄로 엄히 다스리겠다.”
호통을 치고난 검귀는 지수를 사정없이 내팽개쳤다. 지수가 땅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자 검귀는 주저없이 지수의 목을 베겠다는 듯 검을 치켜들었다.그때였다.
“멈춰라!”
전방 20미터에서 누군가 급하게 말을 타고 오면서 소리쳤다. 붉은 갑옷으로 무장한 종주와 채연이 검을 뽑아들고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종주는 곧바로 검귀에게 달려들어 자신의 검으로 검귀의 칼질을 막아냈다. 그틈을 놓칠세라 지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리나케 줄행랑을 쳤다.영재 또한 꽁지빠지게 그뒤를 따랐다.
그들이 어느 정도 안전지대로 도피한 것을 확인한 종주와 채연은 곧바로 싸움을 멈추고 기수를 돌렸다.
“저놈들을 절대 놓치지마라!”
검귀는 길길이 날뛰며 종주와 채연을 추격했다.검귀에게 쫓기던 그들이 정신없이 달리다보니 파란 물이 사납게 흐르는 어느 개천앞에 다다랐다.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도주했던 지수와 영재가 다리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검귀의 부하들에게 막혀 주춤거리고 서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개천의 폭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진한 독기를 잔뜩 내뿜고 있었다. 개천에는 나무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삭아보였다. 하지만 뒤에는 검귀와 그의 부하들이 따라오고 있어 휘청거리는 다리가 중간에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정면돌파해야 했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종주와 채연은 다리쪽을 지키고 있는 검귀의 부하들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창칼이 충돌할 때마다 시퍼런 불꽃이 난무하는 가운데 차츰 검귀의 부하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틈을 타 지수와 영재는 무작정 나무다리로 달려나갔다.그런데 검귀의 부하 한 명도 검을 꼬나들고 지수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지수의 등뒤까지 바짝 쫓아간 검귀부하는 그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그러나 그 순간 뒤통수에서 강한 살기를 느낀 지수가 살짝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화를 면했다.그런데 잔뜩 힘을 주고 지수의 목을 노렸던 검귀부하는 헛손질을 하는 바람에 그만 중심을 잃고 몸을 비틀거렸다. 그 기회를 놓칠세라 지수는 탄알처럼 그자에게 몸을 내던졌다.기습을 당한 검귀부하는 어!어!하면서 허우적거리더니 그만 다리의 낡은 동앗줄을 끊어트리고는 곧장 그대로 개천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풍덩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푸른 물거품이 높이 솟았다.
“으악! 살려줘!”
푸른 물속에 떨어진 운나쁜 검귀부하는 가라앉았다 솟구치기를 반복하면서 고통스럽은 비명을 내질렀다.하지만 그 광경을 발견한 다른 검귀부하들은 일제히 얼어붙고 말았다.이상하게도 검귀의 부하들은 마치 저승사자와 맞부딪친 것처럼 벌벌 떨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던 검귀부하는 얼마 안되어서 뜨거운 물속에서 얼음 녹듯이 녹아버렸다.한 가닥 푸른 연기만이 허공에 남아 있었다.
그런 섬뜩하고 이상한 광경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지수 일행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나무다리를 통과했다.지수와 영재는 정신없이 달리다가 으슥한 숲속을 만나자 서둘러 몸을 숨겼다.가쁜 숨을 몰아쉬던 영재는 개천쪽을 살피며 종주에게 물었다.
“저놈들은 왜 다리앞에서 쩔쩔매는 거죠?”
그러자 종주는 새삼 몸서리를 치며 대답했다.
“아까 그 개천은 그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지.”
“지옥이요?”
“그래. 개천의 물이 한 방울만 닿기만 해도 그들은 형체도 없이 녹아버리지.”
덩치에 어울리지않게 종주가 매우 두려워하자 영재도 따라서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그 정도예요?”
“죽음이나 다름없으니까.”
종주가 확실한 대답을 안하자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던 지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상해.”
“
그러자 채연이살짝 웃으며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뭐가 그렇게 이상해요?”
“왠지 아까 그 개천을 전에도 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전에 본 것 같다고요?”
화들짝 놀라며 되묻는 채연의 눈빛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까 검귀의 부하가 개천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보니까 어렴풋이 나도 같은 일을 겪은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요?”
“그렇소.”
“그런데 이렇게 말짱한 것을 보면 그때 누가 구해주기라도 했나보지요?”
채연은 짐짓 모른 채 지수에게 유도성 질문을 던지고는 그의 대답을 진지하게 기다렸다.
“모르겠어요. 그 기억은 전혀 안나요.”
“아무 것도요?”
“그래요. 어찌보면 그냥 데자뷰 같은 것인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겠죠.”
힘없이 대꾸하는 채연의 눈동자에서 기대감이 사라지고 대신 실망하는 빛이 가득 찼다.하지만 그런 것을 지수에게 들키기 싫은 듯 곧 정색을 하고는 지수를 바라본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자꾸 이 동굴에 들어와 검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거지?”
“우리는 무예24기시범단을 찾아야하는데 사부님이 아마라궁으로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아마라궁?”
종주와 채연은 놀란 듯 동시에 되묻자 지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당신들도 차림새를 보니까 아마라궁하고 관계가 있죠? 맞죠?”
“그렇다.”
“그래요? 그럼 아마라궁은 어디로 가면 되죠?”
지수의 물음에 종주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더니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너흐들은 이미 아마라궁에 들어왔어.”
“정말이예요?”
지수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까 네가 외친 ‘구식심왕진여의 도’는 아마라궁을 여는 암호였어.”
“암호요?”
“그래. 그 암호가 아뢰야라를 아마라궁으로 바뀌게 한 거야.”
“그럴 수가?”
유심히 듣고있던 영재의 눈도 동그랗게 변했다.그의 반응에 종주는 으슥하며 대꾸했다.
“그래.우리는 이 팔달산에 인간의 뇌를 본따서 아마라궁이라는 우리만의 세계를 만들어냈지. 그리고는 소유천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평소에는 아뢰야로 보이게 했어.”
“헐, 최고의 위장이군요.”
지수가 감탄사를 내뱉자 종주는 문득 정색을 하며 묻는다.
“그런데 너는 왜 아라마궁에는 가려는 거지?”
“아마라궁에 있다는 지월이라는 분을 만나야 하거든요.”
지수의 대답에 종주의 눈빛이 심상치않게 변했다.
“폐하를?”
“네.”
“만나서 뭘 어쩌려고?”
“꼭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목숨을 걸 정도로,”
종주의 반문에 지수는 비장하게 말했다.
“그분의 도움을 받아 황박사의 여의주를 저지하고 친구들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도와주지.”
“감사합니다.”
지수가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종주는 채연을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채연아, 지금 검귀는 이 아이들을 잡기위해서 사방에 병력을 쫙 깔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같이 움직이면 곧바로 놈에게 잡혀버릴 것이다. 내가 검귀의 시선을 딴곳으로 돌릴 테니 너는 이 아이들을 데리고 폐하가 계신 곳으로 가거라.”
“싫어요.”
채연은 무슨 까닭인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녀의 뜻하지 않은 반응에 종주는 조금 당황한 듯이 보였다.
“왜?”
“오빠가 위험해지니 뒤는 내가 맡을께요. 오빠가 저 사람을 데리고 가요.”
“무슨 소리야? 검귀 그놈은 네 상대가 아니야.”
“나를 너무 얄보지 말아요.”
“어허, 명령이다.어서 가!”
마침내 안되겠다 싶은지 종주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그제서야 채연은 고집을 꺽고 일어서더니 마지못해 앞장선다.그 뒤를 지수와 영재는 조심스럽게 뒤따라간다.
그들이 아마라궁이 있는 쪽으로 사라지자 종주는 검귀의 부하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뛰어갔다.곧 그를 발견한 검귀가 달려와 이를 갈았다.
“야, 이 멍청한 놈아, 소유천이 저 아이들속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데 녀석들을 궁으로 함부로 보내?”
“그들은 안전하오.”
“그것을 네가 어찌 장담해?”
“모두 폐하가 원하신 일입니다.”
“뭐라고?어리석인 분 같으니라고!”
“감히 폐하를 능멸하다니!”
상관이었지만 자신의 왕을 조롱하는 말을 내뱉는 검귀의 언사에 종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검귀는 종주의 분노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피식 웃는다.
“아무리 폐하라고 해도 우리 아마라궁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돼!”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종주는 호통을 쳤다.
“이놈, 검귀야,네가 아무리 내 상관이라 하더라도 감히 폐하를 욕되게하는 자는 용서치않겠다! 살고 싶으면 당장 무릎을 끓고 사죄하거라!”
그러나 종주가 혼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검귀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라! 난 오로지 승상의 명만 받들 뿐이다!”
“네놈이 군세만 믿고 감히 폐하를 얕보다니! 오늘은 너의 불충을 반드시 처단하리라!”
종주는 검을 고쳐잡고 요절을 내겠다는 듯 검귀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편 채연은 지수와 영재를 데리고 아마라궁 성문앞으로 다가갔다. 궁궐의 성문을 향해 다가서던 지수는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궁궐의 모습이 왠지 팔달산 기슭에 있던 화성행궁과 똑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
“화성행궁?”
아마라궁을 기대하고 왔던 지수는 매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데.”
지난번에 친구들하고 수색하면서 보았던 화성행궁은 매우 퇴색했고 잡초만 무성했었다.그런데 지금 그가 마주보고 있는 화성행궁의 성벽에는 수많은 완전무장한 군사들이 출동해 있었다. 성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겉모습은 화성행궁이었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에 휩싸여 낯설게 보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놀라운 변화에 지수는 의아해하면서 화성행궁의 처마밑에 있는 현판을 다시 유심히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얀 현판에는 검은 먹으로 ‘阿摩羅宮(아마라궁)’이라고 큼직막하게 쓰여 있었다
“아마라궁? 우리가 제대로 찾아왔군.”
잠시 실망했던 지수와 영재는 비로소 안도를 하면서 채연을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이윽고 채연은 성벽위에 있는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성문을 열라! 난 채연군관이다.”
그녀의 고함소리를 듣고 현장 지휘관이 성곽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응수했다.
“안돼!”
“뭐라고!”
“외부인은 절대 함부로 성안으로 들이지말라는 승상의 명이 있었다.”
“이놈아, 난 폐하의 명을 받잡고 이들을 데려온 것이다.당장 성문을 열어!”
“난 오로지 승상의 명만 따를 뿐이요.”
“저런 역적놈이!”
“썩 물러나지 않으면 네놈의 모가지를 날려보낼 것이다!”
“이놈이! 빨리 성문을 열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채연이 아무리 호통을 쳐도 성곽에 버티고 있는 무관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심지어는 계속되는 채연의 호통에 발끈한 군관은 군사들에게 활을 들어 쏘려고하기 까지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무관이 비명을 지르며 성벽으로 떨어졌다.그자가 서있던 곳에 긴 수염이 서릿발처럼 하얗게 센 노장이 서 있었다. 장용영의 수장(首將) 장용사 김경호였다.그는 뜻밖의 사태에 눈을 동그랍게 뜨고있는 다른 금위영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오늘 그동안 폐하를 능멸한 자들을 모두 처단하리라!”
그의 호통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용사의 뒤에서 붉은 갑옷을 입은 장용사 군사들이 소리없이 나타나 금위영 군사들을 향해 날새게 달려가더니 그들을 무자비하게 처치하기 시작했다. 방심을 하고 있던 군사들은 순식간에 전멸하고 말았다.잠시 후 장용사는 성문을 열고 채연의 앞으로 직접 마중을 나왔다.
“수고했다. “
“어르신, 이게 어떻게 된일이신지?”
“난 그동안 이날을 기다려왔다. 드디어 때가 되어 폐하를 위해 일어난 것이다.”
“마침내 결단을 내리셨군요.어르신,”
“폐하의 올바른 뜻을 따르기 위함이다.그런데 종주는?”
“오라버니는 검귀를 붙잡아두기 위해 뒤에 혼자 남으셨습니다.”
“저런,”
장용사는 크게 놀라더니 옆에 서있는 부관들중에서 무예가 제일 출중한 자를 불러 급히 지시를 내렸다.
“너는 급히 달려가 종주군관을 지원해주거라!”
“넷!”
부관은 즉시 수 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종주가 있는 곳으로 부리나케 출동했다.그래도 채연은 걱정스러운지 장용사에게 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저도 오라버니를 돕고싶습니다만,”
“걱정이 되는 모양이구나. 알겠다. “
장용사는 지체없이 채연의 출동을 승락했다. 그녀가 서둘러 자리를 뜨자 장용사는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기다리신다. 어서 가자.”
“저를요?”
“그래.”
“……!”
지수는 드디어 공노인이 말하던 아마라궁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저절로 온몸이 긴장되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급히 장용사를 따라 성문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