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 사각!”
그때가 몇시인지는 지수는 정확히 몰랐다. 비몽사몽간에 그저 본능적으로 새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수상한 옷깃 스치는 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려왔다.그리고 동시에 뭔가 알싸한 여자의 화장품 냄새가 지수의 코를 살짝 자극했다. 그 바람에 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뜨려다가 얼른 눈을 다시 감았다.
요즘 며칠 사이에 마치 우렁각시처럼 새벽마다 그의 침실을 몰래 드나드는 정체불명의 방문객을 오늘은 반드시
잡아낼 생각이었다.어제도 그런 각오를 단단히 했었지만 어느 틈엔가 깜박 다시 잠드는 바람에 끝내 얼굴도 못보고 말았다.
"스르르르!"
수상한 인기척은 그의 머리맡에까지 다가 오더니 우뚝
멈추었다.물씬 풍겨오는 젊은 여자의 체취때문에 지수는 하마트면 재채기를 할 뻔 했다.호기심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눈을 굳게 감은 채 잠든 척하고 있던 지수는 이마에 홀연히 웬 낯선 여자의 따뜻하고 탄력있는 손길을 느끼면서 심장이 별안간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이불밑에 숨겨져 있던 그의 아랫도리가 불끈 치솟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낯선 여자에 대해서 뜨거운 욕정을 느끼는
지수의 아랫도리와는 달리 머리속은 말할 수 없이 맑고 상쾌해졌다.
굳게 감고있던 탓에 붉은
비단처럼 넓게 펼쳐진 지수의 시신경의 모세혈관망속에 갑자기 삼라정보탑의 모습이 화려하게 나타났다. 탑위로 2029년 7월5일이라는 숫자가 눈앞에 어항속의 금봉어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러는 중에도 여자의 손길은 계속 지수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의식적으로는 여자의
손길을 뿌리쳐야 한다고 절규했지만 지수의 본능은 그것을 노골적으로 즐기고 있었다.
“……”
잠시 후 어제 팔달산 계단에서 시작된 후 간혈적으로 그를 괴롭히던 어지러움증이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새로운 것들이 그의 여의주 시스템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듯 지수는 주체할 수 없는 새로운 힘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여자는 나의 여의주를 업그레이드 시켜주는것인 가? 누가 보냈지?)
그런 생각이 들자 지수는 정체불명의 여자의 얼굴이 보고싶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내 화산이
폭발하듯 눈을 번쩍 떴는데 아뿔싸 그만 바로 눈위에서 앳띤 여자아이의 시선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상큼한
소녀의 아름다운 두 눈은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일 만큼 아주 매혹적이고 깊었다. 지수가 숨이 콱 막히는
듯한 아찔함을 느끼는 사이 소녀도 매우 놀랐는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와 같은 나이또래로 보이는 소녀는 지수의 상상대로 기술국 요원들의 제복과 비슷한 것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갸름하고 하얀 얼굴에서 빛나는
흑진주같은 두 눈동자는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범상치않았다.
소녀는 마치 도둑질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매우 당황하면서 서둘러 조그만 손가방을 급히 챙기고는 황급히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지수가 그보다 더빨리 침대에서 뛰어나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당신, 누구야?”
“......”
그러나 퇴로가 막힌 소녀는 당혹스러움에 얼굴을 붉힌 채 아무런 대꾸도 안했다.
“도대체 누군데 새벽마다 남의 침실을 들낙거리는 거야?”
“......”
“황박사님이 보냈어요?”
지수가 슬쩍 떠보자 소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매우 섹시하고도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고객님의 여의주를 고치러온 수리공일 뿐입니다."
하지만 소녀는 단순한 수리공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모가 아주 뛰어났다. 지수를 살짝 쳐다보는
그녀의 유달리 고운 시선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묘한 힘이 숨겨져 있었다. 지수는 소녀앞으로
쓰윽 다가갔다.
"그러면 낮에 오지 왜 새벽에 몰래 오는 거지?"
"원래 여의주 AS는
고객이 잠든 사이에 하는 것이라서......"
소녀는 지수가 화를 낸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채 못맺고 별안간 울상을 지었다. 물론 그것마저도 지수에게는 치명적인 매력으로 다가왔다.
"아, 내가
지금 화를 내는 것 아니고 당신이 그동안 나의 여의주를 보살펴준 것 같은데 난 당신에게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할 뻔 해서 그런 거야."
"그럴 필요 전혀 없습니다. 전 그저 지시대로 했을 뿐이예요."
소녀는 다소곳하게 대답했다.그래도 뭔가 신세를 갚아야한다는 생각에 지수는 이리 저리 궁리했다.그때
소녀가 문득 겸연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작업이 다 끝났으니 가겠습니다. 그럼,"
그리고는 방문을 향해 조용히 몸을 돌려 조용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향기에 가득 찼던 방안의 공기마저 그녀와 함께 모조리 딸려나가는 듯 했다.
“이봐,”
“......”
소녀는 아무런 대꾸없이 그냥 걷기만 한다. 뒷태가 더욱
아름다운 것이 그를 더욱 용감하게 만들었다.
"이름이라도 알려주라니까!"
한번 가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지수는 체면이 구겨지는 것도 불사하고 매달리자 마악 방문을 나서려던 소녀는 잠깐 멈춰섰다. 그리고는 지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름은 집착만 낳을 뿐이예요."
소녀는 선문답 같은 말을 남기고는 밝게 웃음을 지었다.그것이 또다시 불화살이 되어 지수의
가슴에 깊게 꽂혔다.지수가 이상한 통증에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겨우 추스리고 있는 사이에 어린 미인은
방문밖으로 사라졌다.
"잠깐!"
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지수가 거실로 미친 듯이 뛰쳐나갔지만 이미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자기기 하나 없는 매우 단촐한 거실은 휑하니 넓기만 했다. 거실의 창가밑에 놓여진 큰 행운목의 이파리를 타고 새벽의 신선한
기운으로 가득 찼지만 소녀가 없는 거실은 더욱 썰렁하기만 했다.
“내가 꿈을 꾸었나?”
지수는 제발 꿈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마음은 한바탕 꿈을 꾸고난 처럼 자꾸 공허해졌다.이윽고 지수는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
지수가 머리의 양쪽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집중을 하자 또다른 영상이 눈앞에 나타났다.이웃 자치시 수지동에서 홀로 살고있는 그의 어머니가 화상통화를 한 것이었다. 나이
지굿했지만 상긋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파마머리 지수엄마는 대뜸 지수걱정부터 한다.
(그래 요즘 별일 없니?)
(아주 특별한 일이 있죠!)
(특별한 일?)
(네. 우렁각시를
만났어요.)
(꼭두새벽에 웬
우렁각시 타령이냐?)
지수를 바라보는 지수엄마의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 퍼졌다.
(어머니 며느리감이요.)
(며느리감? 지금
집에 있으면 나도 얼굴 좀 보자.)
지수엄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쉽게도 조금 전에 갔어요.)
(그래? 너
딴 여자 선보라고 할까봐 미리 선수치는 거 아니니?)
(그럴 리가요?)
(어미에게 거짓말을 하면 혼날 줄 알아,)
(어이구, 겁나,)
(이 녀석이 어미를 놀리네.)
(에이, 장난이예요. 다음에는 꼭 보여드릴께요.)
(기대하마,)
(그러기 위해서도 엄마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 돼요.)
(알았다. 이
녀석아!)
아들과 농담을 유쾌하게 나누던 파마머리 지수엄마는 아들의 마음이 기특한지 흐뭇한
미소를 살짝 짓는다.그러나 지수는 자신을 한 번도
효자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엄마는 자동차로 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살았지만 지수는 최근에 직접 엄마를 찾아간 기억이 별로 나지 않았다. 지금처럼 가끔 여의주를 통해 서로 화상통화를 해왔을 뿐.
“조만간 한번 들릴께요.’
“바쁜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고 연락이나 자주하거라.”
“네.”
지수가 다정한 미소로
작별인사를 보내자 지수엄마는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져갔다.
엄마가 사라진 허공을 아쉬운 듯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던 지수는 문득 오늘 일과중에 자신이 그동안 여의주 반대파들을 타화자재천국으로 호송해야
하는 일이 있었지만 왠지 팔달산 쪽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방향이 정해지자 그는 후다닥 옷을 갈아입었다. 짙은 색 선글라스를 멋있게 걸치고 치솟는 젊은 혈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밖으로 로켓트처럼 튀어나갔다.오토바이에 올라 탄 한지수의 붉은 뺨에 7월의 아침 공기가
씽씽 스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