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공박사의 고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않자 황박사는 강검사에게 돌아서서는 애써 헛웃음을 지었다.
“역사의 진보에는 항상 반작용이 따르는 법이지.허허,”
“네. 그런 자들을 처리하는게 제 일입니다. 박사님,”
공박사의 난입으로 뺑소니범 검거가 무산될까봐 내심 조바심냈던 강검사는 황박사의 뚝심에 감탄해하며 자신의 공을 잊지말라는 듯 맞장구를 쳐주었다.황박사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여주었다. 그것을 신호로 여우궁은 조용한 소음을 내며 부드럽게 작동하더니 잠시 후 한줄기 레이저 빛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레이저 빛은 황박사와 강검사가 서있는 곳 바로 앞에서 멈추더니 허공에 선(線)으로 사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사물에 갖가지 색깔이 입혀지더니 순식간에 살아있는 영상으로 변해갔다.
“이크!”
영상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강검사는 겁을 먹고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지수의 머리속에 깊이 숨겨져 있던 수 백 개의 기억들이 입체영상으로 변환되어 어지럽게 쏟아지자 황박사는 코브라에게 꾸짖듯이 말했다.
“자, 자랑질 그만하고 우리 검사님이 제일 보고싶어하는 지난 5월5일 교통사고 현장부터 보여줘!”
“네.”
코브라의 대답과 함께 정신없이 펼쳐지던 입체영상들이 하나 둘씩 빠르게 사라져갔다.
“부아앙!”
이윽고 수원시 인근에 위치한 광교산 터널의 모습이 실내에 펼쳐지더니 갑자기 어디선가 자동차의 엔진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그 바람에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 하고 잔뜩 집중하고 지켜보던 강검사는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두운 터널을 질주하며 빠져나가는 잘 빠진 휜 색 승용차의 커다란 앞부분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아 강검사는 일어서려다가 깜짝 놀라며 황박사 등뒤로 숨었다.
편도 2차선 도로를 경쾌하게 달리는 승용차안에는 웬 젊은 부부가 한창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그 광경을 바라보던 황박사는 젊은 남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강검사에게 말했다.
"저자가 바로 지수의 아빠 한준이네, 옆에 앉은 여자는 지수의 엄마 채은옥이고."
운전을 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한준은 검은 쁠테 안경을 써서 약간 촌스럽게 보였지만 자기 아내랑 대화를 하면서도 수시로 양쪽의 사이드밀러를 주의깊게 살피는 그의 눈빛만은 범상치 않았다.
“젊은 나이에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녀석이었어.”
정말 살아있는 듯이 활짝 웃고있는 옛직원을 바라보며 황박사는 아쉬움을 나타났다.황박사의 등뒤에서 겨우 한 발자국 빠져나온 강검사는 지수의 뇌에서 재현되는 모든 입체영상들을 휘둥래진 눈으로 이리 저리 돌아보며 연신 탄성을 내지른다.
“이게 정말 실제로 일어났던 것들입니까?”
“아암, 두말하면 잔소리지.”
“와우!사람의 머리속을 영화처럼 볼 수 있다니!”
강민호 검사의 감탄사속에 여우궁의 스크린은 지수의 뇌가 그동안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생생한 입체영상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한준의 아내는 뛰어난 미모를 지녔다. 깔끔한 생머리 단발과 평소에도 장난기가 자주 발동할 듯 싶은 큼직한 눈매는 섹시하면서도 이국적인 정취를 풍기는 입술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배여있는 또다른 수수함이 그러한 이국적인 인상을 그리 튀지 않게 가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믿음직한 남편과 귀여운 어린 아들을 번갈아가며 행복한 표정으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런 젊은 어린 아내가 사랑스러운 듯 운전을 하던 한준은 뜬금없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수야, 너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엄마와 같은 미인에게 장가가거라!”
“녭!”
어린 지수의 힘차고 맑은 목소리가 중앙통제실을 한껏 울렸다. 지수의 모습은 스크린에 비춰지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작은 손에 쥐어진 장난감 솔개만이 주인의 입에서 나오는 어설픈 비행기 소리를 따라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모습이 가끔씩 보였다.
“아휴, 당신도 애 앞에서 뭐하는 소리가 없어?”
한준의 젊은 부인은 젊고 고운 눈매로 남편을 흘겨보면서도 이내 그리 싫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어때? 오늘 지수가 생일을 맞아서 아빠가 해주는 덕담인데......난 정말 행복해. 당신과 같은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서...... 하하,”
“이거 봐요! 한준씨, 오늘따라 웬 아부가 이리 심하실까.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바로 이 꼬마 도령이라니까?”
“맞아, 아빠,”
지수의 볼멘 소리에 한준은 얼른 어린 아들을 향해 히죽거린다.
“아빠가 농담 좀 했다. 낄낄.”
“아니, 그럼 지금껏 말한 건 다 거짓말이란 말이예요?”
이번에는 젊은 아내가 발끈해서 손가락으로 남편을 살짝 꼬집는 척 한다. 미인은 화를 내도 여전히 아름답다.
“아이쿠, 꼬마야, 들통 났다! 빨리 도망가서 생일 케익이나 먹자, 하하”
“이야, 신난다!”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듯 지수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승용차는 한 가족의 작은 행복한 웃음을 싣고 파티가 벌어질 시내를 향해 경쾌하게 질주했다. 그때였다.
“뿌우우앙!”
세 사람을 태운 채 바람처럼 달려가던 하얀 승용차의 20여 미터 앞에 느닷없이 거대한 8톤 트럭이 요란한 크락숀 소리와 함께 나타나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는 상관없이 그냥 지나갈 것 같은 시커먼 8톤 트럭은 행복한 웃음꽃을 피우는 승용차를 시샘이라도 하는 듯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서 승용차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앗!위험해!”
한준 가족의 화목한 한때를 넋놓고 바라보던 강검사는 난데없는 트럭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끼익!”
승용차도 무섭게 돌진해오는 트럭을 발견했는지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가드레일쪽으로 급히 빠져나가려고 했다.그러나 너무 늦었다. 거친 소리를 내며 달려오던 8톤 트럭은 마침내 휘청거리는 승용차의 옆구리를 무지막지하게 들이박았다.
“꽝!”
굉음과 함께 삽시간에 모든 것이 짙은 암흑에 휩싸였다.
“……!”
잠시 후 실내가 서서히 밝아지면서 제일 먼저 육중한 트럭의 앞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트럭은 덩치 탓인지 큰 손상을 입지 않았다.
이윽고 트럭이 뒤로 완전히 빠지자 1미터 크기의 무지막지한 바퀴에 처참하게 짓이겨진 승용차 운전석이 드러났다. 운전석에 머리를 처박은 채 피투성이가 된 한준과 채인옥은 이미 사망한 듯 꿈쩍도 하지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트럭에서 덩치좋은 한 사내가 내렸다.40대초반으로 눈이 째지고 깡마르게 생긴 사내는 부숴진 승용차로 다가와 차안을 조심스럽게 살피기 시작했다.잠깐 낭패한 표정을 짓던 사내는 갑자기 들고있던 쇠망치로 운전석에 장착되어 있던 블랙박스를 사정없이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저 개새끼가 고장낸 것였었군!”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알게된 강검사는 정체불명의 사내를 향해 욕설부터 날렸다.
아무튼 블랙박스의촬영장치와저장장치를철저히게때려부수던사내의험상궂은얼굴이문득점점확대되어갔다.사내가차안에서자지라지게 울고있던지수를발견하고쏘아보는모양이었다.잠시 착잡한 빛을 띠우던 사내의날카로운눈이이내 사라지더니 허공위로치켜지는 쇠망치가 언뜻 보였다.
“저새끼가아이까지!”
실내에있던모든사람들이깜짝놀라 고함을 지르자 그것을 듣기라도 한 듯 사내는쇠망치를그냥내리고뒤로물러섰다. 휴! 하고모두가 안도하는사이에사내는다시트럭에 올라타고는 그대로 뺑소니를 쳐버렸다, 다시 쥐죽은듯해진승용차 안에서는 어린 지수의 울음소리만 가늘게 새어나왔다.
“저런! 천하에 죽일 놈 같으니라고!”
처참한 광경에 분노한 강검사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거친 욕설을 뺑소니범에게 퍼부었다.
그런데 한 순간 실내에 뺑소니치는 덤프트럭의 번호판이 크게 확대되어 다가왔다.울고있던 어린 지수의 눈이 목격한 범인의 차량번호였다.
“바로 저거야!”
계속 욕설만 퍼붓던 강검사는 트럭의 차량번호판이 선명하게 드러나자 금방 환하게 웃으며 번호판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그의 돌변에 쓴 웃음을 짓던 황박사는 코브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번호판을 정지화면으로 찍어드리고 동영상도 USB로 복사해드려라.”
“네.”
황박사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여우궁 밑으로 금방 현상된 여러장의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강검사는 날쌔게 사진들을 집어들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박사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무슨 소리! 고통스런 사고를 버리지않고 잘 기억하고 있는 지수에게 고맙다고 해야지.허허.”
“하여튼 고맙습니다. 이것으로 놈을 검거해서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강검사는 기술요원이 건네주는 사고현장의 동영상을 담은 USB를 받아 주머니에 챙겨넣고는 황박사에게 꾸뻑 절을 했다. 그리고는 더이상 뒷일은 관심없다는 듯이 서둘러 중앙통제실을 빠져나가다가 갑자기 우뚝 멈추었다.그리고 다시 황박사에게 다가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특급비밀입니다.”
“암. 물론이지.”
“남의 기억을 복사할 수 있다는 기계가 있다는 것을 알면 아마 난리가 날 것입니다.그러니 저 여우궁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시기 바랍니다.가능하죠?”
“나도 바라는 바이니 걱정말게.”
황박사가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확답하자 강검사는 뭐가 그리 신났느지 휘파람을 불며 걸어갔다.문밖으로 사라지는 강검사를 정구한 기술국장과 기술요원들이 강검사가 무슨 의도로 여우궁을 공개하지말라고 했는지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황박사는 코브라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코브라, 카피도 끝났으니 이제는 진짜 일을 해야지.준비 다 됐지?”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