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 흡혈마전
김나경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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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조선 한복판에 뱀파이어가 나타난다. 언뜻 듣기에 부자연스러워 고개를 갸웃거릴 법한 이 설정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확장되는 소설이 바로 1931 흡혈마전이다. 이 소설은 아몬드, 버드 스트라이크등 청소년 소설로 독자의 신뢰를 얻고 있는 창비와 장르문학 플랫폼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카카오페이지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1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장르문학상중 우수상을 수상한 김나경 작가의 장편소설을 엮은 단행본이다. 사전 연재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6만 명에 달하는 구독자를 기록하며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이 소설에서는, 일제강점기와 그 시절 여학교에 대한 탄탄한 자료 조사를 통한 사실적인 배경과 그 위를 활보하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생생한 인물들이 절묘한 시너지를 느낄 수 있다.

경성에 있는 진화여자보통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 희덕은 새로 들어온 기숙사 사감 선생인 계월이 동료 교사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을 목격한다. 처음에는 경악을 금치 못하던 희덕이지만 계월이라는 이를 알아갈수록 그와 깊은 유대감을 형성해 간다. 풋내기 1학년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용기 있게 밝히는 솔직한 성격의 희덕과 모종의 동기를 이룰 목적으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계월이 스토리 라인을 쾌활하게 달려나가는 모습이 흥미진진하다.

 

 

이 소설이 여느 뱀파이어물과 구분되는 독특함은 식민지 여성두 명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점에 있다. 저자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자신에게 허락된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인물들의 이야기다.”라고 밝혔듯, 일제의 지배를 받는 조선인으로서, 남성에게 억압받는 여성으로서 이중으로 자유롭지 못하던 두 주인공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뭔지 매 순간 고민한다. 눈앞의 세상이 주는 세뇌에서 벗어나 점차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거나, 어디로든 가야겠다고 결심하는 모습은 가정에 묶여 있던 20세기 이전 여성들에게 그들이 조금이라도 자유를 누렸으면 하는 저자의 마음이 정성스레 담긴 선물과 같다.


 

*이 리뷰는 창비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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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전사 소은하 창비아동문고 312
전수경 지음, 센개 그림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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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별빛 전사 소은하>

 

이 리뷰는 창비 서평단으로 지원받은 도서를 읽은 후 작성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줄 SF동화

2019년부터 SF 소설이 전에 없이 각광받고 있는 시대의 흐름에 힘입어, 아이들을 위한 SF 동화가 출간되었다. SF에 입문한 20대 독자로서 무척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전만 해도 SF라 하면 체계적이고 어려운 과학 지식이 있어야 즐길 수 있는 장르라 생각해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고, 전형적인 문과생인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정작 SF에 발을 들이고 나서는 이렇게 재미있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하고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SF 동화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SF는 무한을 꿈꾸는 상상력을 토대로 하는 장르이지 결코 딱딱하고 지루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책이 이 세상에 한 권 더 생겼으니. 실제로 책을 받아 읽어 보니 기대가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고 기쁨은 더욱 배가 되었다. 이 책으로 처음 SF를 만날 어린이 독자들이 부러웠고, 무한하게 부풀 그들의 세계를 축복하고 싶었고, 이 소설을 쓰신 작가님께 어린이들이 꿈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난 지구를 구하러 가야 되거든.”

<별빛 전사 소은하>의 주인공인 소은하는 상위 티어에 속할 정도로 게임 실력이 매우 뛰어나지만, 그 외에는 도드라지는 면이 없는 평범한 초등학교 6학년이다. 눈치가 없고 언행이 특이하다고 외계인이라는 별명이 붙고 학급에서 조금 겉도는, 조금 외로운 면이 있지만 친한 친구 소령과 게임 친구인 기범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사실 지구인이 아니라 헥시나라는 머나면 별 출신인 외계인임을 알게 되면서 평범하던 은하의 삶에는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은하는 자신이 즐겨 하던 유니콘피아가 실은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외계인의 공작임을 알고 평화를 지지하는 헥시나인들과 힘을 합쳐 지구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초반에는 아이들의 말에 위축되던 은하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성숙해지고, 후반부에선 반 친구들 앞에서 의연하게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선언하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그 작은 아이가 어느덧 의젓한 히어로로 성장했음을 드러내 감동을 준다.

아이가 세상을 구한다는 소재는 언뜻 보면 오랜 세월 온갖 매체에서 쓰인 흔한 클리셰이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수많은 소설과 만화, 영화에서는 빠지지 않고 어린이 히어로가 등장한다. 어린 아이에게 어른도 감당 못 할 너무 큰 짐을 지운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청소년 히어로는 매력적인 존재로 아이들의 곁을 지키고 있다. 세상을 구하는 근사한 히어로가 자신과 똑같이 학교에 가고 숙제를 하는 아이라는 사실은 어린이 독자에게 자신을 히어로에게 이입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주인공은 위기를 극복하며 이들에게 원대한 꿈과 어떤 고난이 와도 최후의 희망을 믿고 해내는 의지, 최후의 선을 믿는 따뜻한 마음씨를 불어넣는다. 주인공이 당당한 영웅적 자질과 현실 속 아이로서의 사실성을 겸비할 때 히어로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된다. 주인공의 언행을 모방하는 놀이를 하거나 일상 생활에서 주인공이 했을 법한 선하고 용감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내 친구 히어로

소은하는 이런 점에서 아이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될 캐릭터이다. 은하는 학급에서 겉돌아 위축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아이들의 인기를 받았을 때에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평범한 초등학생이다. 옛날 소년만화 주인공처럼 마냥 밝고 기운차지 않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사건을 관망하고 현명하게 분석하는 성격도 이 캐릭터의 사실성에 한몫한다. 무엇보다 은하는 게이머로서도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게임을 하루종일 붙잡고 클리어에 매달리는 것보다 조금씩 꾸준히 연습해서 감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고 승급전에서도 유저들 간의 매너를 지킨다. 또한 은하는 단순한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게임을 하는 철없는 아이가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상품에 정당한 니즈를 요구하는 고객이자 세상을 구하는 힘이 있는 영웅으로 서술된다. 마냥 순수한 어린아이가 아닌 현실적인 초등학생 캐릭터 소은하는 어린이 독자들의 공감대를 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은하뿐만 아니라 다른 어린이 등장인물들의 개성도 매력적이다. 은하의 친구 소령은 초등학생에게도 자기 주장을 할 인권이 있다고 말하고, 게임 친구 기범은 은하와 연애 감정을 느끼는 대신 든든한 동료로서 애인보다 더 끈끈한 신뢰 관계를 은하와 형성한다. 달콤한 환상보다 각자의 개성과 발언, 자신을 믿는 용기를 존중하는 2020년대 아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이야기다.

 

끝으로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성장할 수 있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부럽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전하고 싶다. 물론 내가 어린이였을 적에도 마음을 풍요롭게 했던 동화는 많았지만, 이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어린이가 읽으면 얼마나 더 생생하고 짜릿할까 싶어 조금 샘이 난다. 그 정도로 재미있는 동화다.


#별빛전사소은하 #어린이책 #한학기한권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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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
이랑 지음 / 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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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돈이 필요하다. 밥 한 끼를 사 먹더라도 아무리 싼 식당에 찾아가도 6천 원은 넘는 돈을 내야 한다. 입고 먹고 자는 모든 비용을 대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골라 직장에 들어간 사람도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도 있다. 흔히 할 수 있는 일을 골라 하는 사람들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직업 만족도와 성취감을 중시하기 때문에 돈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사람 역시 항상 돈에 목이 말라 있다. 이런 오해에 묶여 끊임없이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사람들을 대표할 직종은 역시 예술계 종사자일 것이다. 저자 이랑 역시 영화 감독, 음악가, 작가를 겸하고 있는 아티스트이다.

예술계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값으로 업계 관행때문에 한참 적은 돈을 받고도 제대로 시정을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적은 임금 때문에 프리랜서 예술가들은 더더욱 돈에 목이 말라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돈을 번다. 보통 직장이라면 급여가 너무 적은 곳을 떠나오기 마련이지만 예술가들은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예술을 놓지 못한다. 이런 예술계 노동의 악순환은 이곳저곳에서 언급되었기에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구체적인 수치로 나는 얼마를 번다, 돈이 더 필요하다고 자신의 정보를 선뜻 드러내는 예술가는 최근에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명망 있는 여성 예술가인 이랑 작가가 예술에도 돈은 필요하다라는 말을 책을 통해 이 문제를 가시화하는 선두 주자에 섰다. 작가는 자신의 자금 부족한 자금 사정과 하는 일들, 돈을 벌기 위해 무대에 선다는 솔직한 의견, 돈의 원리를 공부하다가 금융 공부까지 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써서 책으로 엮었다. 더 많은 예술가들과 보수 기준과 협상 요령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랑 작가는 영화, 음악, 글 등 다방면에서 이야기를 짓는 아티스트이지만, 대중에게는 흔히 인디뮤지션으로 알려져 있다. 2신의 놀이로 큰 음악적 업적을 이루었으며, 특히 수록곡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인디 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들어봤을 유명한 곡이다. 이 앨범으로 이랑 작가는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포크 노래상을 수상했다. 누가 봐도 그의 예술 행보가 빛나는 영광스러운 순간. 그러나 이랑 작가는 단상에 올라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자신이 받은 트로피를 이 자리에서 경매에 부친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한 달에 100만 원이 안 되는 수익으로 어렵게 아티스트로서의 생계를 이어가는 중이었는데 이 상에는 상금이 걸려 있지 않았다. 그날 저자는 부귀영화에서 영화는 누렸을지언정 부귀는 누리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트로피를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초대석에 앉아 있는 이들 모두 저자와 처지가 같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지갑은 두툼하지 못한 예술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명예의 상징인 트로피를 앨범 제작사 대표에게 50만 원에 팔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1부 중에서도 첫 꼭지에 수록된 이 이야기는 이랑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예술을 한다는 명예 때문에 불안정한 수입에 묶여 산다는 혹독한 현실을, 그리고 저자는 이를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필요를 남에게 말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이 입고 먹고 자는 일에는 언제나 돈이 있어야 하고, 이는 프리랜서에게는 특히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얼마를 받는다는 사실을 터놓고 얘기하는 이는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자꾸 돈 얘기를 하느냐?”라는 핀잔을 잊을 만하면 들려왔고, 동료 뮤지션에게는 너는 왜 돈 얘기만 하느냐, 아티스트답지 못하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저자는 꿋꿋이 노동에 부합하는 보수를 받아내어 자신을 챙기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다. 무상으로 하던 인터뷰에 페이를 요청하고, SNS에 자신과 함께 노동하기 위한 요금을 공개했다. 공연에서 티켓값은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공연 후 자신의 앨범과 사인을 적극적으로 판매한다. 코로나19로 수입의 대부분이던 공연과 강연이 끊기자 저자는 좌절하는 대신 돈의 흐름을 공부하기 시작해 금융 회사에 들어갔다. 현재 저자는 트위터에서 스스로를 금융예술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대학에서 영화를 비롯한 예술밖에 모르던 사람이 금융 회사원이 되었다니 실로 놀라운 변신이 아닐 수 없다. 돈을 쫓으며 살다가 돈의 흐름을 파악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감사한 일은, 저자가 금융인의 세계에 입문하고도 여전히 예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비록 예술업계의 낮은 임금으로 고초를 겪긴 했지만 그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예술을 아예 놓지는 않았다. 이를 깨달으니 비로소 예술은 저자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말에 진정성이 느껴진다. 기존의 임금이 좀 더 넉넉했더라면 저자가 예술에 몰두할 수 있었을까. 아니, 업계 환경이 괜찮았더라도 코로나19 앞에서는 무슨 대책이 있었을까. 거꾸로 예술만 알던 사람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짝 내딛게 되었으니 축복할 일인가. 어느 것도 의미 없는 추측일 뿐이다. 확실한 것은 저자는 언제든 예술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다만 거기에 항상 제작비가 따라다닐 뿐.

 

언제나 돈이 필요하다는 현실을 독자에게 고백하는 저자의 말투는 덤덤하다. 수입이 적다고 부끄러워하며 저자세를 취하지도 않고, ‘그래도 나는 현실에 찌든 사람들과 달리 예술을 한다며 자아도취하지도 않는다. 그저 노동하는 만큼의 보수를 받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이 얼마인지 알리고, 받은 돈의 가치만큼 열심히 일할 뿐이다. 그리고 예술 노동은 그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어느 정도로 가격이 매겨져야 하는지 고민한다.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해결 방안을 찾아서 움직이고, 도착한 곳에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동분서주하는 저자를 보며 독자는 자신의몫을 쟁취하는 책임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다만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제목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아쉽다. 1부의 꼭지들은 모두 일과 돈의 상관관계라는 뚜렷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2부에서부턴 제목과 다른 내용이 나오기 시작한다. 2부에서는 예술인으로서 사는 삶, 3부에서는 그 중에서도 여성 예술인으로서, 몸과 젠더 때문에 치렀던 여러 경험과 갈등을 다룬다. 4부는 앞 장들에 비해서 꼭지들의 유기적이지는 않지만, 저자와 유대감을 주고받는 존재들과 그들을 향한 저자의 사랑이 듬뿍 묻어난다. 이들 모두 솔직담백하고 재치 있는 저자의 톤이 잘 묻어나며 현대 한국 사회에서 특정한 젠더 역할에서 벗어나 온전히 로서 존재하는 과정이 감동을 준다. 이처럼 재미와 시사성 모두를 잡은 깊이 있는 글이지만, 제목만 보고 아티스트의 생계 이야기만을 기대하고 책을 펼친 독자가 느낄 거리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책에 실린 글들이 모두 이랑 작가의 생각이고 분신인 건 맞지만 돈이 필요하다는 말과 모두 방향이 일치하는 건 아니다. “한국에서 프리랜서 노동자로 먹고사는 이야기라는 카피가 제목과 내용을 절충하고 있긴 하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랑이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지금이었던 건 아닐까. ‘노동자가 제목에 들어가고 부제에 이랑이 들어갔으면 책의 정체성을 바로 알 수 있는 표지가 나왔을 법하다.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하다는 말에 눈길이 안 갈 사람은 없으니, 마냥 나쁜 제목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나 같은 경우는 이랑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만족스러웠지만 예술업계 노동자의 이야기만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으니, 혹시 구매를 고려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점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창비 서평단으로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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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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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비Q 세 번째 소설인 천희란 작가의 <자동 피아노>. 저자는 2017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천희란 작가는 당시 수상작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로 정체성과 생명과 죽음을 말하였는데, 올해에는 <자동 피아노>로 죽음에 한층 더 세밀한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찾아왔다.


-죽음과 느린 의식

 죽음을 생각하는 자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여기서의 죽음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상태로 차분히 절차를 준비하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 유의미하다고 느끼는 기간의 끝에서 누구나 한번쯤 떠올려보았을 죽음이다. 그런 시기에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내부와 연관성이 약해 보이고 의식이 파도처럼 빠르고 거칠고 끝임없이 움직여서 견딜 수 없다. <자동 피아노>는 그런 사람의 의식을 그대로 옮겨놓기라도 한 듯, 혼란스럽고 모든 의식이 뒤섞이는 한편 놀랍도록 차분하고 무섭도록 정적이다.

 처음 이 책을 펴면 특정한 서사나 인물의 등장 없이 유려한 문장으로 쭉 나열되는 의식이 적힌 문장이 이어지는 걸 보고 누구나 당황할 것이다. 그러다 황급히 작가의 말로 넘어가고, 그때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작가가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이 책 역시 그 생각의 파편이라는 것을.



'이제야 고백건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당신은 무엇을 기대했는가. 서로 다른 퍼즐의 조각들을 한 상자에 섞어놓은 것처럼, 맞대어놓았을 뿐 연결되지 않은 무늬들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그 혼란스러운 전경이 나의 진짜 얼굴이라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이 모든 것이 너절한 문학적 기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왔을지도 모른다. 내가 지나치게 스스로를 연민하고 있는 것을 거북하게 느끼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뿐이라고 질책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나조차 충분히 말할 수 없는 고통 앞에 탄복해 나를 연민할 수도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어쩌면 나는 그것을 구걸하고 있으면서,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주면, 당신이 나를 가엾게 여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p.95)'


 책의 중간쯤 와서야 서술자는 진실을 토로하기라도 하듯, 이때까지 텍스트를 읽으며 따라와준 독자에게 갑자기 '이 글은 소설이 아니다'라는 말을 털어놓는다. 어떤 독자들은 실제로 했을 법한 생각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리라. 하지만 깊은 우울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일상 뒤에 숨은 지옥 속에서 사람이 하는 생각이 이 책과 별반 다르지 않단 것을.


-피아노

 천희란 작가는 피아노와 그 독주곡을 좋아한다. 이 책은 스무 곡의 피아노 독주곡과 그에 따른 서술자의 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이 소설과 피아노 독주곡은 매우 적절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내가 겪는 상황이 고될 때 피아노 독주곡을 많이 듣는다.

 피아노는 혼자서 많은 음을 연주할 수 있으나 그만큼 고독하기도 하다. 연주할 수 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뒤죽박죽인 인간의 사고와 닮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4월은 너의 거짓말>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피아노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이 있어야 연주될 수 있지만 인간이 절대 껴안을 수 없는 피아노. 인간이 같이 있어도 쓸쓸한데, 피아노 혼자서 자동으로 연주를 한다면 얼마나 더 고독할까. <자동 피아노>라는 제목은 그렇게 외로운 사람의 심리를 대변하는 제목일지도 모른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욕망하는 일. 내 욕망이 머뭇거림 속에서 실패에 이르는 일. 내가 욕망하는 것은 단 한번의 선택으로만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쓸 수 없다. 오늘은 아니어야 하는데. 어제도 그랬듯이. 아직은, 나는 아직. - P70

즉흥연주는 악보가 존재하는 모든 음악의 실재 또한 그것이 연주되는 바로 그 순간에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 연주자에 의해 다시 연주되는 음악조차 완저닣 새로운 음악이며, 기록된 음악은 필연적으로 상실의 운명에 놓인다. 음악을 듣는 동안에, 우리는 그 상실을 함께 듣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상실이란 기록된 음악에서 누락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생한 연주의 현장은 바로 그 상실의 과정을 목격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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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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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30대와 그 아래 젊은 세대는 대부분 두 가지 매체를 통해 소설을 읽었다. 출판사가 종이로 찍어내 단행본으로 출간한 일반 교양 소설, 그리고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자유롭게 퍼져나가던 인터넷 소설. 전자는 대체로 상업성이나 전문성이 검증된 작가의 소설인 데에 비해 후자는 무명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기호대로 엮어나가는 소설도 많았다. 장르도 다양해서 흔히 말하는 '1차' 판타지, 무협물, 순정물 등이 있었다. 하지만 '팬 픽션', 통칭 팬픽을 빼놓고 인터넷 소설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팬픽을 통해 인터넷 소설로 유입되었고 끈끈한 팬 문화를 형성하였다. 팬픽은 그 시절에도 지금에도 '음지 문화'여서 공적인 자리에서 떳떳하게 팬픽을 본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다지 없었지만, 무수한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창작과 소비가 되고 있다. 그 기동력은 말할 것도 없이 '팬심'이다. 유명한 인물을 동경하고 사랑하는 마음.

조우리 작가의 신작 <라스트 러브>는 해체될 예정인 여성 아이돌 그룹 '제로캐럿'의 멤버들과 그 팬들의 이야기 7개, 그리고 팬 중 한 명인 파인캐럿의 팬픽 작품 7개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팬픽인 줄 몰라서 '왜 이렇게 시간과 배경이 왔다갔다 하지?'라고 생각했으나 곧 색지가 들어간 페이지가 팬픽인 걸 알고 읽기가 쉬워졌다. 아이돌 멤버들의 이야기와 가상의 팬픽을 읽으며, 작가가 K-POP을 사랑하고 그 내부의 팬클럽 문화에도 깊은 애착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조우리 작가는 여성 아이돌들의 팬이고 팬 픽션도 창작했다고 한다. 나는 비록 20대지만 K-POP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어서, 소설을 읽는 내내 미지의 팬 문화의 한 부분을 엿보고 온 기분이었다.

아이돌을 좋아한 적은 없지만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들을 일컬어 흔히 2D라고 한다)를 좋아한 덕에 그 등장인물로 쓰이고 그려진 팬픽은 많이 읽었는데, 그 덕분인지 이 책에 나오는 가상의 팬픽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파인캐럿은 이쪽 말로는 '네임드 존잘'쯤 되는 사람이고 그 정도로 제로캐럿을 사랑하는 사람 같은데 파인캐럿 같은 사람, 그러니까 조우리 작가 같은 사람에게 나는 동질감이 들면서도 낯설다. 어떤 인물들을 좋아해서 그를 가지고 2차 창작을 하며 행복해한다는 것은 비슷한데 그 대상이 실존하는 가수인 것이 신기했다. 들리는 바로는 알게 모르게 아이돌 팬픽은 규모가 꽤 큰 판이었다고 하고 내가 다녔던 학교에도 남자 아이돌 팬픽을 읽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지만, 나는 아이돌 팬픽은 파인캐럿의 작품으로 처음 접한다. 감상은 내가 많이 읽었던 2D 팬픽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과 파인캐럿의 필력이 뛰어나다, 정도였다. 비록 그 대상은 달라도 어쨌든 사랑하는 방식은 비슷하구나 싶어서 은근한 동질감과 반가움을 느꼈다.

<라스트 러브>는 팬픽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이점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소설의 본편은 냉정한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현주소를 비춘다. 시기를 타고 형성되고 시장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흩어지고 마는 아이돌 그룹들. 해체가 다가오는 걸 알고 있지만 애써 부정하려 하며 여전히 자신의 가수를 사랑하는 팬들. 해체 후 자신의 길을 어떻게든 찾아가려 하는 옛날의 아이돌들. 도를 넘은 사랑으로 자신의 가수를 위협하는 팬. 그리고 수익이 나지 않자 적당히 마지막 콘서트를 하고 팀을 해체하려는 회사 등. 하지만 이 소설은 시장의 시스템을 고발한다기보다 그저 그 속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담담하게 비출 뿐이다. 소설을 통해 작가의 마음이 들려온다. '비록 이런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아이돌이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언제나 그들을 사랑한다'고. 

언제나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었다. 텔레비전이라는 걸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파인캐럿은 지금껏 자신이 좋아했던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길 즐겼다. 처음 방송국 앞으로 얼굴을 보러 갔던 아이돌, 처음 팬클럽에 가입했던 아이돌, 처음 콘서트를 보러 갔던 아이돌. 보고 있으면 괜히 웃음이 나고 그 순간엔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얼굴들. 이제는 볼 수 없는 얼굴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얼굴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얼굴들. 그 짧은 순간, 그래서 너무나 생생한 순간, 그때의 마음.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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