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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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비Q 세 번째 소설인 천희란 작가의 <자동 피아노>. 저자는 2017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천희란 작가는 당시 수상작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로 정체성과 생명과 죽음을 말하였는데, 올해에는 <자동 피아노>로 죽음에 한층 더 세밀한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찾아왔다.


-죽음과 느린 의식

 죽음을 생각하는 자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여기서의 죽음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상태로 차분히 절차를 준비하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 유의미하다고 느끼는 기간의 끝에서 누구나 한번쯤 떠올려보았을 죽음이다. 그런 시기에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내부와 연관성이 약해 보이고 의식이 파도처럼 빠르고 거칠고 끝임없이 움직여서 견딜 수 없다. <자동 피아노>는 그런 사람의 의식을 그대로 옮겨놓기라도 한 듯, 혼란스럽고 모든 의식이 뒤섞이는 한편 놀랍도록 차분하고 무섭도록 정적이다.

 처음 이 책을 펴면 특정한 서사나 인물의 등장 없이 유려한 문장으로 쭉 나열되는 의식이 적힌 문장이 이어지는 걸 보고 누구나 당황할 것이다. 그러다 황급히 작가의 말로 넘어가고, 그때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작가가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이 책 역시 그 생각의 파편이라는 것을.



'이제야 고백건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당신은 무엇을 기대했는가. 서로 다른 퍼즐의 조각들을 한 상자에 섞어놓은 것처럼, 맞대어놓았을 뿐 연결되지 않은 무늬들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그 혼란스러운 전경이 나의 진짜 얼굴이라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이 모든 것이 너절한 문학적 기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왔을지도 모른다. 내가 지나치게 스스로를 연민하고 있는 것을 거북하게 느끼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뿐이라고 질책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나조차 충분히 말할 수 없는 고통 앞에 탄복해 나를 연민할 수도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어쩌면 나는 그것을 구걸하고 있으면서,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주면, 당신이 나를 가엾게 여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p.95)'


 책의 중간쯤 와서야 서술자는 진실을 토로하기라도 하듯, 이때까지 텍스트를 읽으며 따라와준 독자에게 갑자기 '이 글은 소설이 아니다'라는 말을 털어놓는다. 어떤 독자들은 실제로 했을 법한 생각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리라. 하지만 깊은 우울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일상 뒤에 숨은 지옥 속에서 사람이 하는 생각이 이 책과 별반 다르지 않단 것을.


-피아노

 천희란 작가는 피아노와 그 독주곡을 좋아한다. 이 책은 스무 곡의 피아노 독주곡과 그에 따른 서술자의 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이 소설과 피아노 독주곡은 매우 적절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내가 겪는 상황이 고될 때 피아노 독주곡을 많이 듣는다.

 피아노는 혼자서 많은 음을 연주할 수 있으나 그만큼 고독하기도 하다. 연주할 수 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뒤죽박죽인 인간의 사고와 닮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4월은 너의 거짓말>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피아노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이 있어야 연주될 수 있지만 인간이 절대 껴안을 수 없는 피아노. 인간이 같이 있어도 쓸쓸한데, 피아노 혼자서 자동으로 연주를 한다면 얼마나 더 고독할까. <자동 피아노>라는 제목은 그렇게 외로운 사람의 심리를 대변하는 제목일지도 모른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욕망하는 일. 내 욕망이 머뭇거림 속에서 실패에 이르는 일. 내가 욕망하는 것은 단 한번의 선택으로만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쓸 수 없다. 오늘은 아니어야 하는데. 어제도 그랬듯이. 아직은, 나는 아직. - P70

즉흥연주는 악보가 존재하는 모든 음악의 실재 또한 그것이 연주되는 바로 그 순간에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 연주자에 의해 다시 연주되는 음악조차 완저닣 새로운 음악이며, 기록된 음악은 필연적으로 상실의 운명에 놓인다. 음악을 듣는 동안에, 우리는 그 상실을 함께 듣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상실이란 기록된 음악에서 누락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생한 연주의 현장은 바로 그 상실의 과정을 목격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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