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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전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서거 77주년, 탄생 105주년 기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뉴 에디션 전 시집
윤동주 지음, 윤동주 100년 포럼 엮음 / 스타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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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윤동주 전시집

윤동주

스타북스


그는 독수리의 현실과 맞서서 싸우기보다, 그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우고 있는 얽매인 인간의 고독과 고뇌를 도맡아서 십자가를 짊어진 시인이었다.

[본문 p.216]

생뚱맞게 코로나 확진이 되고, 외출금지에 재택격리 치료중. 어차피 별다른 외출은 않았는데 궁금하다.

대체 어디서 누구로부터 옮은 것일까?

이틀째 꼼짝않고 있는데 그나마 가끔씩 문앞에 무언가 툭. 툭 내던져지는 소리가 들리면 잠시후 삐끔하고 문을 살짝 열어본다.

문앞에 어떨땐 조그마한 박스, 어떨땐 봉투.

이번엔 봉투다. 납작하게 접힌 뽁뽁이 봉투. 서평단신청도서가 드디어 도착했나보다.

별스럽게 발호한 소년심(少年心)이었을까. 윤동주라는 이름에 눈이 번쩍 띄었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그를 만나러 북간도로 달려 가고 싶었다.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 28살로 돌아간 내가 28의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

[윤동주]


북간도에서 나서 일본에서 명을 거두고, 죽어서 다시 북간도로 돌아간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투사, 독립, 저항 따위의 사회참여와 거리가 먼 그를 우리는 '민족시인'이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배웠다. 우리의 '민족적'이지 못했던 역대 국가지도자들과 정부에서 계면쩍음을 가리고자 그리 칭하였을게다. 그정도 이해의 너그러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 향수(鄕愁)따위의 서정(抒情)을 애국, 독립을 향한 투혼으로 각색하는 용기는 어지간한 뻔뻔스러움이 있지 않고서는 입밖에 내기 어려웠을 터인데 나는 그렇게 배웠다. 오해는 내가 철이들면서 시나브로 바로잡아졌으나 아직도 애국애족놀음을 하는 족속들이 적잖이 존재한다. 그들은 언제나 '철'이 들른지.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시인은 [또다른 고향]에서 스스로를 다중적인격으로 표현하였다. 갈등의 시기에는 더욱 분명해 지는것이 아닌가. 현실속의 자신과 그 자신이 동경하고 목표하고, 그리워하는 또 다른 자신. 흔히들 內面이라고 일컷는 제2의 자신. 제2의 우주.

부분적 중첩을 지닌 의식적 다중존재다. 누구라도 이정도 다중적 의식은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갈등이라는 판단의 모호함이 발생하고 후회라는것도, 만족이라는 것도 모두가 이상이라는 제2의 인격과의 괴리와 합치의 변화과정이다. 시인은 그를 자신의 백골로 표현하였다. 얼마나 신선하고 깜찍한 문학적 상상력인가? 두리뭉실한 감동을 구체적, 하나의 단어적 표현으로 유인해내는 작업이 바로 시인의 역할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세련되고 이해가능한 표현으로 뱉어낸것을 시인의 작품이라고 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중구난방하며 이해가 어려운 표현으로 뱉어지면 이를 주정뱅이의 술주정이라 할 것이다. 그런맥락에서 보자면 시인의 작품과 고주망태 술주정과의 부분적 일관성은 존재한다고 봐야겠다.

시인이란 슬픈천명인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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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본문 p.49 쉽게 씌어진 詩]

시인은 태생부터 시인이어야 한다. 뜨거운 가슴을 어쩌지 못하는 운명, 그래서 그들은 글로써 눈물을대신한다.

또 시인이란 별스런것이 없다. 인간은 울음으로 생명의 탄생을 증명하고 울음으로 그 생명이 존재함을 알린다.

어느 누구는 글로서 울고, 어떤 누구는 술로서 울고, 또 어떤 누구는 멀뚱한 모습으로 가슴으로 운다. 시인은 그저 서러움을 글로 뱉아내는 족속일 뿐이다.

이제 닭이 홰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즛내물아 동켠으로 훠-ㄴ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래도 이 마을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랑지길에서 주저주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본문 p.159 별똥 떨어진데 중]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긴, 아주 긴 터널과 같은 암담한 时节이 있게 마련. 희망과 단절된듯한 캄캄하고 긴 암흑속에서 새벽같은 빛을 기다리노라면 희망이라는 단어보다는 절망과 고통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세상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간혹 글재주 하나믿고 운문을 쓰고, 산문을 쓰고 하는 작가들이 있다. 물론 탁월한 글재주는 높이 받들어 줄만하나 미려한 글들 속에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녹아들어 있지 않다면 한낱 아름답게 울려대는 깽깽이소리에 불과할것. 그들은 삶에 번뇌하지 않았으며 절망과 고통을 통하지 않은 희망인지라 마시고 돌아서면 더한 갈증이 이는 싸구려 단물과 같이 눈을 버렸구나, 귀를 버렸구나 하는 생각만 든다.

시인에게는 아마도 희망보다 좌절이 더 익숙했었나 보다. 혹은 詩人이란 족속들은 그러한 胎生을 짊어지고 났을지도. 시인의 글에서는 산문과 운문의 구분이 필요가 없다. 호흡을 느리면 산문이 되고 호흡을 재촉하면 운문이 된다. 자신의 우주에 속해있는 모든 엘레멘트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 그리고 용서, 부분적 성찰을 통하지 않고서는 길고짧은것 모두가 내것이 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시인을 참 좋아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그의 모나지 않고 겸손한 성격덕에 외롭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다. 재주있는자들은 항상 외롭고 고독한 법이다. 그만이 볼수있는 세계가 있고 그만이 간직한 우주가 있었던 그는, 지극히 외롭고 고독하였다.

살아서 고독했고 또 고통속에 죽어간 시인.

그는 죽어서 이제는, 심히 행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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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9 1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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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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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새움



[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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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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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라시드 할리디

열린책들


역사는 관주(貫珠)와 같은 것이다, 꿰어진 구슬 목걸이 같다는 말이다.

어느 하나의 사건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앞뒤로 구슬이 엮여있듯 주렁주렁 엮여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접한 나에게 왜 11세기의 십자군전쟁이 떠올랐을까? 지역적으로 팔레스타인은 중근동(中近东)에 속하며 역사적으로 부침이 많았던 지역이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로마제국령의 세력권과 파르티아(고대 이란제국)제국의 영향권이 맞부딛히는 지역이었고, 이후 중세, 근세로 오면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과 사산조페르시아, 그리고 뒤를이은 아랍 이슬람, 투르크에까지 온갖 민족의 왕래와 정치/종교 권력이 교차하던 지역이었다.

11세기,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는 동로마제국이 중근동과 이집트를 포함한 북부 아프리카지역등 비교적 비옥한 지역을 오스만 투르크에게 빼앗기고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그리스를 포함한 발칸반도와 에게해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특히 중근동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넘어갔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제1성지로 여기는 기독교권 내에서는 충분한 정치적 이슈를 항상 내포하고 있었다.

11세기 교황은 교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종교적 대 이벤트를 벌인다. 바로 '성전(聖殿)탈환'이다. 기독교 제1의 성지인 이스라엘이 이슬람세력권에 넘어가 있어서 이를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전(聖戰)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이승에서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약속과 함께. 그런데, 동로마로부터의 군사원조 혹은 지원에 대한 간곡한 요청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소아시아가 몽땅 넘어가고 북부아프리카의 비옥한 영역을 모두 잃을때까지 수없이 군사적 지원 요청을 하였으나, 서로마 제국은 모른척 했었다.

이슬람과 기독교 그리고 유대교까지 이 말많은 세 영향력이 막강한 종교는 바로 아브라함 계통의 '모세 유니버스'로 묶인 동일한 혈통을 지닌 종교들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교'라는 표현보다는 '이단'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당시 이슬람권의 팔레스타인에는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이 적지않게 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종교까지 지켜가며 말이다. 그들은 유럽전역과 발칸반도를 포함하는 기독교권에서의 성지순례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며 생업을 지켜 나가고 있었다. 당시, 지중해의 해양 패권을 나누가지고 있던 베네치아에서는 성지순례 패키지까지 있었다고 하니 기독교에서 탈환을 한다느데 조금 의아한 느낌이 드는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슬람치하의 기독교 제1성지, 예루살렘은 항상 성지순례자들로 북적 거렸고, 그들을 상대로 하는 아파, 하이파 등 해안도시가 생겨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이어나가고, 무엇보다 이슬람 치하에서 일부 차별을 받기는 했으나 기독교와 유대교는 각자의 종교를 지켜나갈수 있었다.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는 십자군은 장장 200년에 걸쳐 10차의 원정을 벌인다. 요즘같으면 전유럽을 아우르는 다국적 연합군인 셈이다. 그들은 1차와 6차 두번을 제외하고는 변변한 전과가 없었으며, 도리어 기독교 도시를 침략하는등 특히 4차원정때는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여 처참하고 무자비하게 도시를 유린하고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후 그들이 유럽으로 돌아가서 정식으로 재판또는 책임을 진 이는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종교에 대한 믿음과 신의 능력과 역할, 그리고 종교를 빙자한 모든 선동들이 얼마나 사악한 짓인지 명백히 할 뿐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팔레스타인'땅의 작은 도시 '예루살렘'이 기독교와 이슬람 두 종교모두의 성지(聖地)인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중요한 점은 이슬람 점령하의 예루살렘에는 전 유럽에서 성지순례자들이 줄을 잇고, 그들을 상대로하는 도시가 번창하였을 정도이고, 기독교의 성지 탈환 이후에는 전 도시에 대한 살육과 그후 기독교치하에서의 이교적 종교활동은 절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배타적이며 이기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포용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종교라고 한다. 하지만 포용과 용서, 그리고 사랑은 그들, 기독교인 끼리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고 이교에 대하여서는 철저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응징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믿는 신 '그리스도'의 뜻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뜻을 거역하는 개 망나니 같은 대다수 신도들의 뜻인지.

10세기가 훨씬 지난 옛날옛날 이야기를 들먹이는 이유가 이것이다. 같은지역 같은 도시를 두고 다시금 양 진영이 피를 흘리고 있기 때문이며, 그 모습이 천년전의 그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근대의 비극은 오스만의 몰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2차 발칸전쟁을 거치면서 600년을 지배하던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반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오스만이 빠져나간 발칸은 그야말로 무주공산, 야욕과 탐욕이 집중되던 발칸에서 결국은 제1차대전의 불씨가 되는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저격사건이 발발하게 되고, 기다리고 있던 주변 이해국들은 모두 덤벼들게 되는, 인류 최대의 비극과 더불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는 비극, 유대인들에게는 기회가 시작 되었다.

1차대전을 치르며 유대인자금이 필요했던 영국은 벨푸어 선언(1917)을 통하여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설립에 대한 지원을 하겠노라고 하였고, 그 2년전인 1915년에는 뒤늦게 주축국측에 가담한 오스만을 상대로 싸워주는 댓가로 팔레스타인에 아랍국가 설립을 약속하는 후세인-맥마흔 선언을 하는 2중거래, 3중거래를 하는 더러운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물론, 전후의 중근동을 포함한 아프리카지역은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통치 하기로 그들은 책상에 앉아 지도와 자, 그리고 펜을 놓고 선을 그어대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국경이 되고 있었다.

독서하는 내내 유대인이란 어떤 민족인가에 대하여 궁금증이 폭발 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팔레스타인 아랍인에 대한 적지않은 관심을 가졌었으나, 정작 문제의 발단 즉 불씨를 품고있는 유대인에 대한 공부는 게을리 하지 않았던가.

-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로 이천년을 유랑하게 되는 민족.

- 중세를 거치면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여 어쩔수 없이 금융 고리대업에 매달리게 되었던 민족.

- 근대1,2차 대전을 거치면서 거의 멸종단계까지 핍박을 받았던 민족.

- 미국의 이민러쉬를 타고, 핍박을 피하여 도미하여 미국이라는 나라의 경제를 쥐어틀고 있는 민족.

- 옆집아저씨, 옆자리 친구와 같이 같은 외양, 같은 말을 쓰는 숨겨진 민족.

-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들의 신이 허락하였다는 곳에 모여드는 민족.

독서에 임할때는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피해자라는 마음가짐이 있었고 유대인들이 가장 치밀하고 계산된 악한 가해자라는 생각. 그러나, 독서기간 내내 그들에 대한 동정심 역시 감출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의 불행에 대한 진정한 가해자는 누구일까?

영국일까? 프랑스일까? 미국일까?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독일일까? 물론, 관련된 모든 국가들이 저마다의 책임이 있고, 지금도 책임을 감당하기는 커녕 뻔뻔스러운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현실을 차지하고서라도 근본적인 문제의 발단을 쥐고 있는 나라 혹은 사건이 분명히 있기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불행의 책임도 가려내야 겠지만, 목전의 본질적 문제는 현재 이렇게 기형적으로 엉켜있는 불행스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세계의 묵직한 위정자들이 그들의 뛰어난 머리를 발휘해야 하는 순간 이지만, 나는 무엇보다 그들 각자의 신(神)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것이 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탄생한 이천년전의 고대 로마제국통치하에서도 제국은 절대 배타적이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신을 믿고 숭배할 자유를 주었다.

그리스도 역시 포용과 사랑, 용서와 이해의 거울이다.

이슬람 역시 지난 이천년동안 그들의 통치지역에서의 종교의 자유를 허락 하였다.

그랬던 것이, 이천년이라는 세월을 겪어오면서 각기 지극적으로 배타적, 폭력적으로 변질되었다.

우리가 풀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호와와 알라가 담판을 지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들이 믿는바대로 그들의 신들이 정말 살아서 역사한다면 말이다.

이제는 마음을 열고 그들 각자의 신들이 매 순간 우리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각자의 신들이 정말로 화를 낼것이다.

'샬롬! 샬롬!' '앗살람 알라이쿰!' '평화가 그대와 함께!'


[라시드 할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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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조지 오웰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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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조지 오웰

소담출판사


이제 투쟁의 시간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본문 p.457]


1949년 발간된 조지 오웰의 1984. 35년 이후의 세계를 빗대어 신.전체주의로의 회귀로의 경계함인가? 그에게 전후의 세계는 거대 양대 헤게모니라는 두개의 블랙홀로 사정없이 빨려들어가고 있는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미.소가 그 중심에 있었으며 정치를 중심으로 경제, 문화 등 각계각층이 색깔론을 중심으로 나름 줄서기에 한창이었다. 마치 그 줄을 놓치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던 어리석은 행렬들.

줄서기에 서툴러서 나라의 주권마저 빼앗겼던 동방의 어리버리 백의민족이라는 우리는 어찌하였던가? 고마운 외세에 의해 감나무 감떨어지듯 툭 떨어진 돌아온 주권. 주체하지 못하고 깨춤에 젖어있다가 두개의 블랙홀로 희한하게도 절반이 찢어져 각각 빨려 들어가 버리지 않았던가. 결국 대리전을 치르고 형제부모를 향해 온갖 원한과 악담을 쏟아부으며 총질, 칼질 그도 모자라면 죽창질까지 해대며 큰형님의 눈치를 보던 줏대없던 민족. 조지 오웰은 우리네더러 제발 줏대좀 찾으라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것이다.

1984의 세계는 지리적으로 세개의 세력으로 분리되어 있다. 삼분된 세력이라는 것은 역사적을 가장 안정된 분리구도가 아닌가? 중국에는 삼국지가 있었고, 한반도에도 삼국시대라는 크고작은 거울이 있듯, 적당한 견제와 이간질 그리고 붙었다가 떨어지고를 반복하다보면 노력에비해 누리는것이 훨씬 크고 많다는것을 깨닫게 된다.

[조지 오웰의 삼국세력도]

영국을 합병한 미국중심의 오세아니아,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유라시아 그리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는 이스타시아 그리고 세력권이 중첩되며 동시에 완충역할을 하는 분쟁지역으로 삼분되었다.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오세아니아의 런던소재 진리성 기록관리국에 근무하는 하급당원이다. 그가 속한 국가 오세아니아는 '빅 브라더'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아직은 미완의, 진행중인 철저한 계획주의적 국가. 국가조직의 말단부서에서 역사의 외곡과 세탁 그리고 말살의 실무업무를 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중심의 오세아니아에서 스탈린을 닮은 '빅 브라더'를 접목하였다. 미국/영국이 지닌 제국주의적 구조적 토양에 스탈린(빅 브라더)라는 '전체주의적'괴물을 식목시킴으로서 극단적 파시즘을 탄생시켰다. 만일 자본주의라는 비인간적, 탐욕적인 제도권에 스탈린(빅 브라더)이라는 괴물이 탄생한다면 진정한 파시즘의 완성이라고 본 것인가?

그는 공개 재판 피고석에서 모든 것을 자백하고 모든 사람을 연루시켰다. 그는 흰 타일이 깔린 복도를 따라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햇살 속을 걷는 기분을 느끼며, 등 뒤에 무장한 간수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오래도록 바라던 총알이 그의 머릿속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본문 p.456]

권말에 그의 머릿속을 뚫고 들어오는 총알. 그것은 윈스턴의 마음속 빅 브라더를 향한 일말의 반항, 일말의 인간성의 사망이었다. '인간적'임은 결코 '전체적'토양에서 존재할 역량을 갖추지 못한다. 마음 깊숙한 복종과 그에따른 행복을 통하여 제3세계, 즉 인간적 탐욕을 토양으로하는 사회의 전체주의적 통치로 진정한 파시즘이 완성되는 것이다.

오웰의 작품이 발표된지 70여년이 지났을 뿐이다. 지금의 세계는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까? 1991년 세계의 한쪽축을 담당했던 소련이 붕괴하였다. 드디어 전세계는 자본주의가 지배하게 되었으며 자본주의라는 범세계적 정치세력내부에서 크고작은 '빅 브라더'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다. 오웰의 세 국가중 하나는 소멸하였다, 남은것은 오세아니아와 이스타니아이다. 작품중의 이스타니아에서 '자본주의'화로의 변질이 속도를 받았다. 이스타니아에는 '스몰 브라더'마저 이미 등장 하였다. 이스타니아의 자본주의는 이미 염치라는 겉옷마저 벗어던지고 오세아니아와 탐욕대항전을 펼치고있다.

소멸해버린 유라시아가 갖추지 못했던 뻔뻔스러운 제국주의적 탐욕유전자를 갖추고있는 이스타니아와 제도적 우월감과 지리적 선점을 지니고 있는 오세아니아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하는 大한민국은 어디로 가야할 것일까?


어디에 붙어야만이 '빅 브라더'를 조금만 사랑하고, 알량한 자존의 뒤통수에 총알을 박지 않을 수 있을까?


[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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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시민 불복종 (합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1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이종인 옮김, 허버트 웬델 글리슨 사진 / 현대지성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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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시민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

현대지성


그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본문 p.72]

나는 의도적인 삶을 살고 싶었으므로 숲속으로 들어갔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을 직면하고, 삶이 내게 가르쳐주는 것을 배울 수 있을지를 살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온전한 삶을 살지 못했음을 자각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만약 삶이 숭고한 것이라면 그것을 몸소 체험한 다음에 나의 다음번 여행때 그 고상함에 대한 진정한 이야기를 써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 p.121]

삶을 주도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한다. 누군가가 걸었던, 소위 검증된 길을. 그렇게 우리는 평균치를 두텁게 하는데 생각을 보탠다. 숨기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선택과 실천은 용기있는 자들의 전유물 이었다.

월든에서의 사상은 자연에 기초한다. 자연에 근거를 둔다는 것은 화합과 조화를 기본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에 귀착하는것을 최선의 합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실천한다. 스승의 땅을 조금 빌려 스스로 월든 숲속으로 들어가 2년여 생활을 하며 그 기간을 집필과 생각의 기저를 튼튼히 한다. 즉, 바램을 실천하고 실천을 통하여 사상의 초석을 다지게 된 것이다.

먼저 그 용기에 큰 찬사와 함께 부러움이 인다.

세상엔 한편으론 하고싶어만 하는 사람들과, 하고싶은 것들을 해 나가는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크고작은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동기는 용기 일 것이고 또한 용기를 뒷받침하는 사고의 유연성 이었을 것이다.

환경은, 사상들은 세월의 변화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어떨때는 세월의 물리적 변화에 앞서기도 한다. 하지만, 표면적 변화와 달라 한가지 변하지 않는것이 있다면 그것은 동기를 유발하는 용기 일 것이다. 총칼들고 전쟁터로 뛰어 나가는 용기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 용기도 같은, 아니 어쩌면 조금 더 큰 용기일 수도 있다.

월든에서의 생활은 여러가지 측면에서의 사색과 반성을 허락한다. 사색이 사색을 유발시키고, 반성이 반성을 유발 시키는 경우다. 정당하고 합리적인 관계의 정립은 또 다른관계를 연쇄적으로 발생 시킨다. 그와 유대를 지니는 모든 관계의 상대편은 항상 우주였다. 그(나) 스스로가 우주의 아주 작은 미미한 조각에 불과 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나)와 우주와의 바람직한 관계가 성립된다. 월든숲은 작은 우주다.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는 수 많은 우주들 중 다소 자그마한 우주.

만일 종교가 인간의 작품이 아니고 신의 작품이라면, 신은 인간보다 손재주나 말재주가 훨씬 뒤떨어 지는 것일게다. 2000년전 열매따먹고 땅파먹고 살던 시기의 종말론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기가 힘들다. 종교가 아니면,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이야 말로 우주라는 유일신의 독생자일 것이다. 자연이 우리를 멸망 시키기도 또한 죽음에서 구하기도 할 것이다.

자연에 근거함은 우주를 근거함 이고, 우주를 근거함은 시효가 발생하지 않는다.





국가가 이성적 원칙으로 다스려 진다면, 가난과 비참함은 수치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성적 원칙에 따라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부와 명예가 수치의 대상이다.

[공자]

나는 남의 강요를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정한 방식으로 숨 쉬고 살고 싶다. 누가 더 강한지 어디 두고 보자. 다수에게는 무슨 힘이 있는가? 나보다 더 높은 법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나를 강요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만이 나에게 그들처럼 되라고 강요할 수 있다. 사람다운 사람이 다수 군중에게 이런저런 방식으로 살것을 강요당하는 경우는 들어본 바가 없다. 그런 식으로 강요당한다면 그게 무슨 삶이겠는가?

[본문 p.466]

시민 불복종을 읽은후 첫 느낌은, 자연주의이다 지독한 자연주의 이다 라는 느낌. 세상을 살아가는데 각기 저마다 나름의 몫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그 의식에 근거한 표현역시 차거나 넘치지 않는다면, 법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제도라는 것이 굳이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 질서란 것은 유기체처럼 살아서 조직과 사회를 감싸 안을 것이며 상호간의 이해와 사랑만이 넘쳐 흐를 것이다. 이것이 이상주의가 아닌가?

소로는 월든. 숲속의 생활에서 자연을 구성하는 각 개체들의 화합을 보았고 익혔으리라. 자연속에서 무슨 성문(成文)의 법률이 존재할 것이며, 제도와 규율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곳에서는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고 각 개체들의 이해와 양보로 완성되는 곳이 아닌가? 이러한 성숙하고 완성도 높은 개체들의 '양심'은 1차원적인 '평균치'에 그 논거를 근거하는 인위적 '법률'과 '제도'와 대립하는 경우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각기, 개인이 스스로 판단할 문제이리라.

"가장 훌륭한 정치란 어떤 정치인지요?"

"가장 훌륭한 정치란, 누가 다스리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정치이다."

贞观政要 中.


[헨리 데이비드 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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