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에게 누나는 큰 힘이었다. 사실 나의 투쟁 뒤에 만약 누나가 없었다면 나는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스무살이 되어 나는 누나에게 수줍게 고백을 했다. 누나의 원룸집 가로등 아래에서 나는 만년 소년처럼 한참을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어린 애 취급할 것만 같아서, 머리 한 번 시원하게 쓰다듬으며 집에 가 자라, 할 것만 같아서,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다. 나는 누나에게 집에 가 읽어 보라며 편지를 썼다. 누나는 아무런 말도, 답장도 하지 않고, 알고 있다는 듯 씨익 웃으며 내 엉덩이를 톡톡 쳤다. 5년 동안 누나를 너무 좋아했다고, 앞으로 딱 5년만 이전처럼 지내자는 내용이었다. 누나의 집은 세상에서 제일 편안 안식처였다. 누나는 편지에 아무런 답장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공부를 핑계 삼아 자주 들락거렸다. 누나가 과외비도 주지 않으면서 왜이렇게 들락거리냐며 면박하기도 했지만, 예전과 속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몇 번의 사랑이 있었던 것도, 그 사랑의 헤어짐에 아파하는 것도 나는 곁에서 지켜보았다. 심장을 도려낸 듯 아리고 쓰렸지만 나는 내색할 수 없었다. 사랑 같은 것이 고백한다고, 부탁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충분히 알 만한 나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동딸로 자란 누나도 나를 동생처럼 이뻐해 주었다. 나는 빨래도 했고, 청소도 했고, 누나가 원하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그림자처럼 남모르게 알아서 했다. 부산에 외홀로 아버지가 계셨지만, 누나는 잘 챙기지 않았다. 어머니가 뇌출혈로 돌아가신 것이 모두 아버지가 준 스트레스라 생각하는 듯하였다. 누나와 나는 서로 시간에 스며들었다. 누나 집보다 내 집이 훨씬 더 크니, 함께 붙어 있자는 말에 그럴까,라는 답이 편하게 나오기까지 우리는 충분히 서로를 알았고, 이해했다. 푹신한 곰인형 껴안 듯 누나가 말없이 나를 안아주기까지는 동거 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도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8시 30분에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일교차가 무척 커져, 하루에도 계절이 몇 번씩 바뀌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나의 존재를 이미 까마득히 잊은 것인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저들이 나와 공통된 회사의 비전으로 함께 달려온 사람들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난 이 사람들 속에서 무슨 의미인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심난해 있던 찰나, 현관 회전문을 열고 인사팀장이 다가왔다. 인사팀장을 보자 차마 못볼 것을 본 사람마냥 나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보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비린내 날 정도로 거북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말했다.
“경영기획실장님이 잠깐 얼굴 좀 보자신다.”
나는 볼 일 있으면 직접 와서 보시죠,라는 말을 하려다가 꾹 참았다.
“꼭 저를 봐야만 하는 일이라면 가겠지만, 담배 끊으라는 말을 하려 한다면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의미 없습니다.”
인사팀장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달래듯 말했다.
“잠깐이면 된다니깐, 잠깐 뵙고 다시 내려 와라.”
나는 경영기획실장 방으로 올라갔다. 비서는 인터폰으로 김무성 사원 왔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잠시 후 나는 실장 방으로 들어섰고, 실장은 내가 자리에 앉은 후 정지된 동작으로 한동안 가만 있다가 말을 꺼냈다.
“회사 그만 두는 게 어때... 더 이상 힘들어하지 말구...”
그는 만년필로 탁자를 두드리며, 마치 최후의 제안을 한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표시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실장은 연신 한숨을 쉬다 화재를 돌려 다시 말했다.
“혼자 시위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으로 인해 회사가 받는 피해가 만만치 않아. 회사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회사가 받는 피해가 구체적으로 뭔지 모르겠지만, 피해자는 제가 아닌가요?”
나는 시무룩하게 대꾸하며, 못마땅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경고하는데 회사 비방하지마.”
“협박하지 마세요. 먼저 싸움을 걸어온 것은 회사입니다. 대체 저 하나가 뭐라고 사만명대 일로 싸움하는 겁니까. 그냥 이대로 회사 다니게 해 주시면 되고, 회사 밖에서 담배 피워도 뭐라 안하시면 됩니다. 그게 어렵습니까?”
나는 분명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경영기획실장은 별로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눈치였다.
“암튼 그건 그렇고... 대표이사님이 너에게 너무 미안해 하고 있어. 담배를 끊어 보셔서 금단 현상이 얼마나 지독한지 아는 분이야. 대표이사로서 많은 직원에게 독한 결심을 요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야.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꼭 전해 달래.”
뻔한 얘기에 나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예산 및 사업기획을 비롯한 회사의 모든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총괄 책임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다분히 의례적인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야. 담배를 못 끊겠으면..., 아니다, 그냥 회사를 나가는 게 어떻겠어. 내가 얼마든지 좋은 자리는 봐 줄 테니...”
“제가 왜 나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친구가 우리나라 학습지 1위 기업의 경영기획실장인데, 너네 학교 선배이기도 하고, 너는 충분히 역량이 되니까 가서 일하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지금보다 연봉도 두 배 정도 높을 것이고, 대리 직급 정도는 달 수 있을 걸? 아아, 그리고 거기는 담배 피울 수 있어. 그 친구도 담배 피우고...”
경영기획실장의 말은 제안이 아니라 사실 희롱에 가까웠다. 특히 거기는 담배 피울 수 있어,라는 말을 할 때는 입꼬리가 표나게 올라갔다.
“싫습니다.”
단호한 나의 표정에 잠시 망설이던 경영기획실장은 양복 상의 속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탁자 위에 꺼내놓았다.
“대표이사께서 위로금으로 주신 거야. 2천 만원.”
나는 고개를 들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실장을 바라보았다. 애초부터 돈을 받자고 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실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꼬듯 그와 같이 응수했다.
“10억 주세요, 10억. 진짜로 미안해 하신다면서요. 10억 정도 주셔야 제가 나가지 않겠어요?”
그러나 실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차분하게 나를 응시했다.
“그럼 10억 주면 정말 나갈 거야?”
“네. 사라져 주죠. 10억 정도면 모두 다 포기하겠습니다.”
나는 오기로 심기를 비틀어 말했다. 그러나 실장은 갑자기 인터폰을 누른 후 비서에게 아까 내가 말했던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잠시 후 비서는 서류 한 장과 인주를 내려놓고 나갔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정말로 나에게 10억을 줄 작정인지, 실장은 만년필을 꺼내 몇 자 휙 적더니, 나에게 서류를 건넸다.
그것은 합의서였다. 첫째, 김무성 사원은 금연을 조건으로 (주)해맑은식품에 10억원의 돈 지급을 요청하였다. 둘째, 현금 10억원을 지급받는 순간, 김무성 사원은 회사 직원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셋째, 퇴사 후 회사에 대한 어떠한 비방도 하지 않는다. 만약 비방할 시, 민형사상 책임을 진다,였다. 서류를 읽고 나서,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것은 로또다! 이 돈이면 나는 누나에게 좋은 아파트 한 채와 벤츠 승용차 한 대를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10원 하나 안 쓰고, 30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아닌가. 입가를 비집고 환호가 터져 나올 뻔했다. 누나 말대로, 내가 이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나는 먹먹한 얼굴로 실장을 바라보았다. 실장은 여기에 있는 내용이 맞으면 사인을 하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나는 귀신에 홀린 듯 사인과 지장을 한 후 합의서를 건네주었다. 그는 비서에게 물티슈를 가져오라고 한 후, 내 엄지손가락을 직접 닦아주며 넘치는 친절까지 보여주었다.
“아, 그런데 말야... 10억이 워낙 큰 돈이라 절차상 10일 정도는 지나야 결제가 떨어질 거야. 이렇게 하지. 합의서에 사인을 했으니, 지급은 해야겠고, 일단 지금 10억짜리 당좌 수표를 끊을 텐데, 10일 후에 현금으로 인출될 수 있게끔 날자를 조정해 놓을게. 그럼 되겠지?”
나는 대범한 표정으로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지난 5개월 간의 지독한 마음고생이 한순간 다 날아가는 듯했다. 역시 누나의 말이 맞았다. 회사가 나를 이길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도망치듯 경영기획실장 방을 나와 현관 옆에 잠시 세워놓은 피켓을 시원하게 부러뜨려 쓰레기통에 처 넣었다. 한발 한발 뗄 때마다 경쾌한 웃음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내 삶에 이렇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경영기획실장이 참으로 바보처럼 느껴졌다. 언제까지 1인 시위를 하겠다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극심한 체력 난조로 이번 주 말을 끝으로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하루하루가 생지옥 같았고, 내 처지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실장은 나와 누나의 협공에 기어이 손을 들고야 말았다. 거대기업은 역시 여론을 무서워했다. 포털을 활용해 그간 이미지 마케팅했던 모든 광고가 거짓이라는 것을 누나와 나는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었다. 강회장은 겁이 났을 것이다. 직원들도 나에게 박수까지야 보내지 않았을 테지만, 심적으로는 충분히 내 싸움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개인의 흡연 문제를 떠나서, 모든 선택권이 박탈당한 것에 대한 투쟁이었다. 21세기는 포스트모던한 시대가 아닌가. 모든 축이 와르르 무너진 마당에 획일화된 무엇으로 다시 돌아가서 합을 이룬다는 것이 시대에 온당한 일인가.
나는 상기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에 종로 1가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좀 앞당길 수 없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급히 상의할 게 있다며 전날과 같이 다급한 어투로 빨리 만나자고 하였다. 나는 명동 롯데백화점에 들려 아버지에게 드릴 루이비똥 지갑을 샀고, 동생들에게 줄 닌텐도를 선물 포장하였다. 나는 오늘 아버지에게 누나하고 결혼하겠다는 허락을 받으려고 하였다. 어차피 나에게 가장 큰 문제인 돈 문제가 해결된 마당에 지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그때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되돌아왔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문자로 아버지에게 오늘 결혼 허락받으려고 한다,고 보내려다가 그럴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종각역 스타벅스 커피숍에 나보다 일찍 나와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