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이사와 경영기획실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처음부터 모든 게 작정된 시나리오 같았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암담했다. 경영기획실장은 10억 요구한 대화 내용을 녹음해 두었다고 했다. 또한 경쟁업체 관계자로 가장하고 만났을 때, 누나가 했던 말들또한 다 저장돼 있다고 했다. 누나가 경쟁업체라고 만났던 사람은 대현그룹 경영기획실 관계자였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누나는 지금까지 어느 매체에, 어느 포털에, 또한 앞으로 어떻게 일을 전개할 지 모두 말해 버린 것이었다. 나는 해머로 가슴팍을 맞은 것처럼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경영기획실장은 법무팀을 대동하고 나를 코너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10억 협상 자리에서 누나 얘기가 나왔을 때, 왜 내가 눈치를 못 챘는지 후회가 극심하게 밀려들었다. 연락이 끊긴 그 며칠 사이, 누나가 나를 위한답시고 한 일이 모두 덫이 되어 버렸다. 법무팀장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매섭게 말했다.

“분명히 회사를 비방할 시 민형사상 조치를 취한다고 했습니다. 당좌 수표는 지급 정지신청을 해 놓았기 때문에 10원도 쓸 수 없습니다. 당신 한 사람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경쟁업체는 우리를 조롱하였고, 더 이상 광고에도 금연 관련 내용을 쓸 수 없게 됐습니다. 당신이 피켓만 안 들었다 하더라도 일이 이렇게 크게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관된 의지가 당신 한 사람으로 인해 모두 거짓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지난 3년간 회장님 이하 전직원이 언론에 공개 약속을 하였는데, 당신이 그 취지마저도 독단적으로 곡해하여 모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나는 억울했다. 완전히 판이 달라져 있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걷잡을 수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대표이사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대표님... 제가 회사에 억울했던 것은 모두가 저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회사 금연 구역에서 피우지 말라고 해서, 금연 구역에서도 안 피웠고, 옆 빌딩 흡연 구역에서만 피웠는데도, 집 가는 길 어스름한 골목에서만 피웠는데도, 사람들은 저를 신고하고, 월급을 거덜냈습니다. 저를 신고한 사람들은 회사의 표현대로 하면 식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승복 시대의 공산당도 아니구, 모두 독사눈을 하고 저를 신고했습니다. 인사 대기발령 내서 병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온갖 쯧쯧 거리는 소리, 또라이라는 소리, 자기들 인생 망치는 개망나니,라는 모욕적인 소리까지 다 들으며 버티고 버텼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저를 총판으로까지 발령내 버렸습니다. 총판 직원이 우스워서가 아닙니다. 도저히 납득한 만한  기준점 없이 저를 단정하고 단죄하고 죄인으로 몰아가는 이런 회사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자존심은 땅에 꺼진 지 오래됐고, 오냐! 모두들 나를 그렇게 매도한다면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방법 다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봤자 피켓 하나 들고 현관 앞에 동상처럼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회사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이런 제 자신이 불쾌하고 견딜 수 없어 눈에 핏발이 섰습니다. 그런데 경영기획실장이 불러서, 대표님 위로금이라며 2천만원을 건네고 모든 것을 무마하려고 했습니다. 10억 요구했다고요? 요구했다면 그것도 요구죠. 제가 돈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아냥거리 듯 그렇다면 10억 줘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10억짜리 수표를 끊어오잖아요. 그 앞에서 눈 안 돌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 아직 서른살도 안 됐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그렇게 큰 실수를 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누나가 저를 위한답시고 한 일이, 회사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면 제가 책임져야 겠지요. 그러나 누나는 악의적으로 그런 게 아닙니다. 정상 참작을 해 주세요. 물의를 일으켜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요.”

억울함은 끝내 눈물로 터져나왔다. 이렇게 내 자신이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경영기획실장은 나에게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할 것인지 스스로 답을 내라고 했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물이 주체 없이 흐르는 와중에 뜬금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받지 않으려고 폴더를 닫았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경영기획실장은 괜찮으니 일단 전화부터 받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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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음날 아침, 아직 잠자리에서 채 일어나기도 전에 핸드폰 소리에 잠이 깼다. 알람인가 보다,하고 몇 번 무심코 넘기려고 했지만, 계속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는 뭔가 급박한 사정을 알리는 듯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거실까지 눈을 부비며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경영기획실 비서 유은애입니다.”

“네... 그런데요.. 무슨 일이세요?”

“경영기획실장님이 오전 중에 급히 좀 보자고 하시네요. 회사로 내방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걱정이 앞섰다. 나는 더 이상 해닮은식품의 마케팅팀 사원도 아니고, 그와의 관계도 다 정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토요일 아침 8시부터 걸려온 전화는 괜한 불안감을 조장했다. 나는 10시까지 회사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누나에게 분당 아파트는 오후에 다시 시간을 잡아서 가자고 얘기한 후, 회사로 나갔다.

홀로 시위를 벌였던 현관 앞은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주말의 회사는 정적했다. 늦가을인데도 아침부터 뜨거운 햇살이 수직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온난화로 인해 한낮에는 여름과 가을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어떤 것도 이분법적으로 쉽게 구분되지 않는 듯 보였다. 착한 것과 악한 것, 남자와 여자, 도심의 낮과 밤, 계절과 계절의 경계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하나로 뭉뚱거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현관 경비원은 나를 알아보고는 3층으로 올라가세요,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미리 비서실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입안에 잘못 씹힌 돌덩이라도 있는지 경비원은 오늘따라 더욱 불친절해 보였다.

3층 경영기획실장 방으로 올라가자 경영기획실장은 낯선 대여섯명의 직원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그룹 법무팀장이라며 한 사람이 명함을 건넸다. 분위기가 이상하리만큼 날카로웠다. 경영기획실장은 비서에게, 김무성 사원 도착했다고 내려오시면 된다는 말을 했고, 잠시 후 메인 상석에 대표이사가 들어와 앉았다. 내가 공손히 목례를 했지만, 대표이사는 인사를 받아주지도,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직감에 사로잡혔다. 판사 앞에 선 피고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법무팀장은 대표이사가 앉자마자 심문하듯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김무성씨, 전에 합의서에 지장 찍은 거 기억 나죠?”

“네...” 

“그 합의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첫째, 김무성 사원이 현금 10억원을 요청했다. 둘째 10억원을 받는 즉시 회사 직원으로서 지위를 상실한다. 셋째 회사를 더 이상 비방하지 않는다. 비방하면 민형사상 책임을 진다,였어요. 기억나죠?”

나는 짧게 네,라는 답하였지만, 합의서의 내용 면면까지는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법무팀장은 합의서 복사본을 탁자 위로 바로 꺼내어 확인시켜 주었다.

“그래서 회사는 합의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10억원의 당좌수표를 지급했고, 결재 절차상 10일 후에 현금으로 지급되게끔 저희가 조치했습니다만, 저희는 그 돈을 지급할 수 없게 됐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 고개를 바짝 들고 법무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냉혈인간보다 더 냉혈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급할 수 없는 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급받은 날 이후, 당신과 사실혼 관계에 있던 김세희씨는 대현그룹 모든 기사에 김무성씨는 금연하지 않고 있으며, 회사의 폭압에 당당히 저항하고 있다는 식으로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제가 한 것은 아닙니다. 전 그날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무슨 얘기 하는 겁니까? 당신은 포탈에 들어가서 로그인을 했고, 실명 인증을 거쳐야만 댓글을 달 수 있는 언론사 사이트에 들어가서도 회사를 비방하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법무팀장은 다 예감하고 있다는 듯 파워포인트로 작성된 문서를 보여주었다. 문서에는 내가 남긴 글들이 96건이라고 적혀 있었고, 포털과 언론사, 기타 사이트에서의 내 행적이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모두 누나가 한 일인 것 같았다. 내 입에서 긴 탄식 소리가 새어나왔다. 누나가 나를 도우려고 했던 일이 되려 내 발목을 잡아서 옴짝달짝할 수도 없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대표이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무성 사원...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모두 답해야 하네. 대현그룹이 그렇게 파렴치한 기업인가? 한 개인을 조직적으로 몰살시키는 기업에서 나온 제품도 비양심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 말이 사실인가? 언제 해닮은식품이 노조를 구성하려는 직원을 강제로 인사발령내고 불이익을 줬다는 것이지? 쌀음료가 100% 국내산이 아니라는 말은? 강석현 회장님이 집에서는 몰래 담배를 피운다는 말은? 대체 어떤 증거로 그런 말도 안 되는 비방을 퍼뜨린 거지?”

에코가 잔뜩 들어간 마이크에서 들리는 소리마냥 대표이사의 말은 귓전에서 웅웅거렸다. 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도무지 감 잡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저는 사실 그런 말한 적 없습니다. 결단코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얘기가 제 이름으로 나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법무팀장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엄중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기업은 브랜드 가치가 생명인데, 김무성씨는 대현그룹과 해닮은식품의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였습니다. 저희 법무팀에서 알아본 결과 당신의 비방 선동으로 인해 회사는 약 400억원 가량의 브랜드 가치를 손실 입었습니다. 주가가 떨어진 이유에 대해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주식 종목 게시판에까지 악의적인 비방 선전을 하였기 때문에 그 손실액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회사에 금전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신은 인권위에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했다고 하였지만, 이 사실을 알면 여론의 동정도 받을 수 없습니다.”

“금전을 요구하다니요. 금전을 먼저 제시한 것은 회사였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전혀 돈을 고려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합의의 형식으로 대표이사님이 주신 거라며 2천만원을 건네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야 그게! 우리가 언제 돈으로 합의를 보려 했다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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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나는 몇 일간 혼자만의 혼수 준비로 바빴다. 누나는 토요일날 올라오겠다며, 생각했던 일이 잘 되어 기분이 좋다고 했다. 나는 누나를 놀라게 해 줄 생각으로 회사 일은 전혀 얘기하지 않았다. 웃으며 사고치지 말고 빨리 올라오라는 내 독촉에도 곧 간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빨리 누나와 결혼하고 싶었다. 동거 기간이 길수록 어떤 형식이 필요해 보였다. 보증된 장치가 없으니, 언제든 누나가 떠나 버릴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누나를 합법적으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누나가 집으로 돌아오는대로, 혼인신고를 마치고, 아버지와 장인어른을 찾아뵌 후 정식으로 결혼 승낙을 얻고, 날을 잡아 결혼식을 올릴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들뜬 하루 하루를 보냈다.

첫째 날 나는 보험과 증권을 모두 해약하고, 통장 잔고까지 모두 털어서, 분당에 있는 24평짜리 아파트를 매매 계약했다. 집 앞에 개천이 있어서 산책하기에도 좋았고, 경부고속도로와 지하철 역이 가까워 교통도 무척 편리하였다. 누나 사무실이 있는 강남까지도 30분 내외의 거리여서, 나는 망설임 없이 3천 만원의 계약금을 주었다. 둘째 날은 장롱과 가죽소파, 서재 등 모든 가구를 바꿀 계획으로 일산 가구공단에 가서 물건을 살피고 계약했다. 셋째 날은 하이마트에 가서 40인치가 넘는 대형벽걸이 TV와 스피커만 해도 300만원이 넘는 오디오 세트를 카드로 구입했다. 매일 아침이면 나는 이불장 한 구석에 고이 감춰둔 10억짜리 당좌수표를 확인했다. 님은, 고스란히, 거기에, 새색시처럼 가만히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세어 봐도 0은 아홉 개였다. 셋째 날 밤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고 다그쳤다. 축복의 긴 하루하루를 홀로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누나는 집으로 오자마자 나를 껴안고, 격렬한 정사를 나누었다. 한 십년 만에 만난 오랜 애인을 그리워하듯 누나는 뜨겁게 내 몸에 올라탔다. 타들어가는 듯한 누나의 신음 소리가 여느 때보다 유난했다. 정사가 끝난 후 누나는 내 목덜미에 뜨거운 입김을 품으며 여론이 완전히 나에게로 넘어 왔다,고 말했다. 나는 누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쉿,하며 손가락으로 누나의 입을 막았다. 나는 휘파람을 부르며 장롱 속에 있던 10억짜리 당좌수표를 누나의 알몸 위로 가을 낙엽처럼 떨어뜨렸다. 누나는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긴 검지손가락으로 또박또박 0을 몇 번이나 세어보고 또 세어보았다. 누나는 어찌된 영문이냐며, 내 위에 맨몸으로 올라타서 다그쳐 물었다. 나는 그동안 벌어졌던 회사 일을 말해 주었다. 누나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와 수표를 몇 번이나 번갈아보았다. 누나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누나는 내 가슴을 애교 있게 통통 때리며, 미리 알려줬으면 내가 생고생 안했지,라며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토론방이 난리가 났어 난리가. 내가 알바 애들 좀 풀었거든. 대현그룹과 관련된 모든 기사에 댓글을 달라고...”

“저번에 다 했잖아요 그건...”

나는 누나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살짝 잡아채며 말했다.

“내가 거기에서 끝났겠어? 강회장이 보건복지부 금연 광고 들어갔잖아.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에 가서, 대현그룹의 만행이라는 장문의 기사도 올리고, 인권위원회에도 대현그룹 실상에 대해 까발리고, 민주노총 관계자도 만나고 정신 없었어. 그뿐 아니야. 어제는 해닮은식품 경쟁업체인 정원식품 알지? 거기에서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홍보팀 관계자가 만나자고 하더라구. 진짜 담배 피우는 사람 있냐. 지금 포털이 난리가 아닌데, 그렇게 피해를 입었으면 자기네들이 조직적으로 더 도울 테니, 그동안 투쟁했던 거 다 알려 달라고 해서 알려 줬지. 우아! 돈 많은 애들은 다르더라. 고맙다며 선뜻 현금 백만원을 주더라니깐!”

나는 누나에게 더 이상 이제 투쟁할 일 없다며, 내가 퇴사했기 때문에 그만 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나는 누나에게 뭔가 일이 잘 풀려나갈 때 우리 인생도 새출발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며, 다이아반지를 끼워주며 청혼하였다.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벌여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10억보다 더 큰 이벤트는 언뜻 생각해 보아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나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 알았다며, 내가 두 팔을 벌리자 스르르 안겨왔다. 누나는 나처럼 늙은년을 데리고 가서 뭣하게,라며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청혼을 수락했다. 누나는 내 삶의 리더였다. 누나 때문에 좋은 대학에 가게 됐고, 누나 때문에 좋은 직장도 얻었다. 게다가 누나 때문에 평생 편히 살아도 될 만큼의 돈도 얻었다. 누나와 평생 함께 갈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자신 있었다. 10년 가까이 써 내려간 일기장을 누나는 몇 번이고 읽어봤을 것이다. 책상 한 켠에 비밀스럽게 숨겨둔 듯 했지만, 나는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곳곳에 해 두었다. 일기는 나의 기록이자 누나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백만 번의 사랑한다는 말보다 그 일기장 두 권이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것이었다. 나는 누나에게 다음 주 말에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그 다음 주에 부산에 내려가 장인 어른을 뵙고, 그 한 달 뒤에 상견례하고, 날짜를 잡자고 했다. 누나는 다소곳이 서방님께서 하자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하며 행복하게 웃었다. 누나는 화장도 채 지우지 않고, 알몸으로 내 위에 몸을 포개듯 잠들었다. 나는 누나를 부드럽게 껴안으며,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말을 가슴 속으로 되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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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시위 얘기를 꺼내셨고, 나는 곧 사표 낼 예정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1인 시위보다 내 사표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는 듯했다. 좋은 게 좋은 게지, 무슨 일을 하든지 서로의 입장,이있는데 적절히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한다며 나를 설득하셨다. 남의 돈 빼먹기가 그리 만만한 줄 아느냐며,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데, 뭘 하든지 감정적이거나 성급하게 처리하면 안 된다고 일러두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할 얘기가 있다는 듯, 담배 한 개비를 태워 물으셨다. 심각한 듯 뭔가 미안하듯 여러 표정이 뒤엉켜 있었다. 

“무성아, 일이 좀 이상하게 돼 버렸다.”

이상하게 돼 버렸다,는 말 뒤로 타이어 바람 빠지는 듯한 한숨소리가 진하게 묻어나왔다.

“새엄마가 말야... 내 돈을 다 날려버렸어.”

나는 놀라 아버지를 황급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셔요?”

담배를 잡고 있던 아버지의 손가락이 수전증 환자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젊은 사람이 나랑 살아준 것이 무척 고마워서, 그간 풍족히 쓸 만큼 쓰라고 돈에는 내가 전혀 신경을 안 썼는데, 며칠 전 확인해 보니, 통장하고 주식 계좌에 있던 돈들이 거의 다 증발해 버렸어.”

나는 이 사태가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자산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30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며 모아 놓은 돈이 상당했을 터인데, 그 많은 돈이 증발해 버렸다는 말에 나는 기겁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국내 1위 업체의 증권 회사 부장 정도의 월급이면, 웬만한 대기업 임원 연봉 그 이상이었을 터인데,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번씩 나에게 어떤 종목이 좋냐고 물어 보길래, 그냥 재미삼아 한 두판 하는 갑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더라구. 10년 정도 장기투자하려고 중공업 주식에 묻어두었던 것도 나 몰래 팔아서 코스닥 주에 몰빵 했다가 상장 폐지 되구. 돈을 잃으니까 2금융권에서 아파트 담보대출까지 받아 또 급등주에 손 댄 거야. 고점에서 물려 그것도 80% 이상 손실 나구... 그것도 모자라 내 종신보험까지 다 해지해서 또 주식하다가 완전 거덜나 버렸어. 무슨 까페에서 몇몇 사람들하고 작전주 모의까지 한 것으로 보아 사기 일당들한테 당한 것 같기도 하구... 이 일을 어쩌니...”

원래 정이 없던 새어머니지만, 있는 정마저 다 떨어져 나갈 판이었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그간 그런 일을 몰랐다는 게 말이 되냐 했지만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내 명의로 대출을 받으려 시도하다가, 은행에서 회사로 신원 확인하잖아. 나한테 대뜸 1억 신용대출 원하셨는데, 2천만원밖에 안 된다고 하잖아. 그래서 대출 신청한 적이 없는데 무슨 얘기냐고 물었지. 새엄마가 대리로 신청했다 하더라구. 집에 쫓아가 난리쳐서 살펴보니, 이미 게임 끝났지 뭐니...”

나는 참담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의 눈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으면서, 나에게 너무 미안했다고 했다. 장가갈 때 집이라도 한 채 해 주려고 중공업 주식에 2천만원 묶어 두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3억이 넘는다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은행에서 집을 곧 경매로 넘기겠다고 내용증명이 날아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다시 돈이야 벌면 된다고 하셨지만, 평생 이룩한 행복의 원천에 큰 배신을 당한 듯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셨다.

“아들한테 이런 얘기하기 그렇지만, 너 살고 있는 집 전세 처분하고, 일단 나에게 돈을 좀 빌려주렴. 새어머니하고 동생들 잠잘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니... 뭘 알고 했으면 모르겠는데, 아무 것도 모르고 저지른 짓이라 차마 내치지는 못하겠더라...”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이, 아버지 몰래 대출 받다가 들키고, 아버지 몰래 집 담보로 주식질 하느냐고 따지듯 말했다. 제발 사태를 분명하게 직시하시라고, 작전주로 한탕 치려고 했던 사람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냐고 흥분하여 되물었다. 나에게 그간 어떤 행복도 주지 못한 새어머니에 대한 원망까지 토로하였다. 이참에 헤어지시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끝내 가슴에 삭혔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간 모아놓은 돈이 조금 있다며, 일단 통장 잔고에 있는 3천만원을 폰뱅킹으로 그 자리에서 송금하였다. 그 돈으로 일단 전셋집 계약하시고, 중도금 날짜 알려 주시면 다시 송금해 드리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연신 고맙다며, 또 미안하다며 눈물을 글썽거리셨다. 나는 모진 말 해서 죄송한데, 새어머니가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하다며, 마지막까지 분을 참지 않았다. 나는 화장실에 간다고 한 후, 따로 은행카드로 100만원짜리 수표 2장을 출금하여 루이비똥 지갑에 담아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는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면목 없다는 듯 쉽게 고개를 들지 못하셨다.

아버지를 배웅하고 난 후, 난 닌텐도 위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터덜터덜 도심을 배회했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번뜩거렸다. 간판도, 자동차도, 가로등도 정지된 것이 하나 없었다. 나는 청계천을 따라 걸어갔다. 모두 다 세월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청계고가가 있던 자리, 그 아래 이렇게 훌륭한 자연이 흐르고 있었던가. 나는 감상에 젖었다. 도심은 너무 급격히 바벨탑처럼 올라갔다. 시선을 부여잡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겨낼 수 없다는 듯 경쟁적이었다. 온통 색깔을 입히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너무나 많은 것들에 이미지를 입혀 놓았다. 조화롭지 못한 조경물들, 흐르는 물소리마저 부자연스러워 나는 한참동안 청계천을 바라보았다.

늘 자신만만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출근을 위해 중형 세단 차에 올라타기 전 어머니에게 행복한 웃음을 보여주었던 아버지의 너그러움과 넉넉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채 몇 달 동안 드라이도 하지 않은 듯 양복은 구겨져 있었고, 닦지 않은 구두를 신고 터덜터덜 지하철로 걸어 내려가시던 모습에서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새어머니는 자본주의의 도구로 아버지와 결혼한 듯 보였다.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식에 어린 내가 오는 것을 새어머니가 꺼려했을 정도로, 나는 처음부터 눈밖에 나 있었다. 오랜 인내와 노력으로 이룩한 성은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그런 아버지 앞에서 결혼 얘기를 차마 꺼낼 수 없었다. 10억이라는 돈이 있었지만, 새어머니가 있는 아버지의 성전에 차마 헌금할 자비가 없었다. 청계천은 계속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무심한 듯 표정 없이 콸콸콸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전사가 되라는 누나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세상 모든 것은 전략과 전술 뿐이라는 누나의 말이 귓전을 쾅쾅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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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2009-11-01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있습니다~
 

 

이런 나에게 누나는 큰 힘이었다. 사실 나의 투쟁 뒤에 만약 누나가 없었다면 나는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스무살이 되어 나는 누나에게 수줍게 고백을 했다. 누나의 원룸집 가로등 아래에서 나는 만년 소년처럼 한참을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어린 애 취급할 것만 같아서, 머리 한 번 시원하게 쓰다듬으며 집에 가 자라, 할 것만 같아서,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다. 나는 누나에게 집에 가 읽어 보라며 편지를 썼다. 누나는 아무런 말도, 답장도 하지 않고, 알고 있다는 듯 씨익 웃으며 내 엉덩이를 톡톡 쳤다. 5년 동안 누나를 너무 좋아했다고, 앞으로 딱 5년만 이전처럼 지내자는 내용이었다. 누나의 집은 세상에서 제일 편안 안식처였다. 누나는 편지에 아무런 답장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공부를 핑계 삼아 자주 들락거렸다. 누나가 과외비도 주지 않으면서 왜이렇게 들락거리냐며 면박하기도 했지만, 예전과 속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몇 번의 사랑이 있었던 것도, 그 사랑의 헤어짐에 아파하는 것도 나는 곁에서 지켜보았다. 심장을 도려낸 듯 아리고 쓰렸지만 나는 내색할 수 없었다. 사랑 같은 것이 고백한다고, 부탁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충분히 알 만한 나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동딸로 자란 누나도 나를 동생처럼 이뻐해 주었다. 나는 빨래도 했고, 청소도 했고, 누나가 원하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그림자처럼 남모르게 알아서 했다. 부산에 외홀로 아버지가 계셨지만, 누나는 잘 챙기지 않았다. 어머니가 뇌출혈로 돌아가신 것이 모두 아버지가 준 스트레스라 생각하는 듯하였다. 누나와 나는 서로 시간에 스며들었다. 누나 집보다 내 집이 훨씬 더 크니, 함께 붙어 있자는 말에  그럴까,라는 답이 편하게 나오기까지 우리는 충분히 서로를 알았고, 이해했다. 푹신한 곰인형 껴안 듯 누나가 말없이 나를 안아주기까지는 동거 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도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8시 30분에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일교차가 무척 커져, 하루에도 계절이 몇 번씩 바뀌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나의 존재를 이미 까마득히 잊은 것인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저들이 나와 공통된 회사의 비전으로 함께 달려온 사람들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난 이 사람들 속에서 무슨 의미인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심난해 있던 찰나, 현관 회전문을 열고 인사팀장이 다가왔다. 인사팀장을 보자 차마 못볼 것을 본 사람마냥 나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보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비린내 날 정도로 거북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말했다.

“경영기획실장님이 잠깐 얼굴 좀 보자신다.”

나는 볼 일 있으면 직접 와서 보시죠,라는 말을 하려다가 꾹 참았다.

“꼭 저를 봐야만 하는 일이라면 가겠지만, 담배 끊으라는 말을 하려 한다면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의미 없습니다.”

인사팀장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달래듯 말했다.

“잠깐이면 된다니깐, 잠깐 뵙고 다시 내려 와라.”

나는 경영기획실장 방으로 올라갔다. 비서는 인터폰으로 김무성 사원 왔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잠시 후 나는 실장 방으로 들어섰고, 실장은 내가 자리에 앉은 후 정지된 동작으로 한동안 가만 있다가 말을 꺼냈다. 

“회사 그만 두는 게 어때... 더 이상 힘들어하지 말구...”

그는 만년필로 탁자를 두드리며, 마치 최후의 제안을 한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표시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실장은 연신 한숨을 쉬다 화재를 돌려 다시 말했다.

“혼자 시위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으로 인해 회사가 받는 피해가 만만치 않아. 회사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회사가 받는 피해가 구체적으로 뭔지 모르겠지만, 피해자는 제가 아닌가요?”

나는 시무룩하게 대꾸하며, 못마땅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경고하는데 회사 비방하지마.”

“협박하지 마세요. 먼저 싸움을 걸어온 것은 회사입니다. 대체 저 하나가 뭐라고 사만명대 일로 싸움하는 겁니까. 그냥 이대로 회사 다니게 해 주시면 되고, 회사 밖에서 담배 피워도 뭐라 안하시면 됩니다. 그게 어렵습니까?”

나는 분명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경영기획실장은 별로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눈치였다.  

“암튼 그건 그렇고... 대표이사님이 너에게 너무 미안해 하고 있어. 담배를 끊어 보셔서 금단 현상이 얼마나 지독한지 아는 분이야. 대표이사로서 많은 직원에게 독한 결심을 요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야.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꼭 전해 달래.”

뻔한 얘기에 나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예산 및 사업기획을 비롯한 회사의 모든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총괄 책임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다분히 의례적인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야. 담배를 못 끊겠으면..., 아니다, 그냥 회사를 나가는 게 어떻겠어. 내가 얼마든지 좋은 자리는 봐 줄 테니...”

“제가 왜 나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친구가 우리나라 학습지 1위 기업의 경영기획실장인데, 너네 학교 선배이기도 하고, 너는 충분히 역량이 되니까 가서 일하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지금보다 연봉도 두 배 정도 높을 것이고, 대리 직급 정도는 달 수 있을 걸? 아아, 그리고 거기는 담배 피울 수 있어. 그 친구도 담배 피우고...”

경영기획실장의 말은 제안이 아니라 사실 희롱에 가까웠다. 특히 거기는 담배 피울 수 있어,라는 말을 할 때는 입꼬리가 표나게 올라갔다.

“싫습니다.”

단호한 나의 표정에 잠시 망설이던 경영기획실장은 양복 상의 속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탁자 위에 꺼내놓았다.

“대표이사께서 위로금으로 주신 거야. 2천 만원.”

나는 고개를 들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실장을 바라보았다. 애초부터 돈을 받자고 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실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꼬듯 그와 같이 응수했다. 

“10억 주세요, 10억. 진짜로 미안해 하신다면서요. 10억 정도 주셔야 제가 나가지 않겠어요?”

그러나 실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차분하게 나를 응시했다. 

“그럼 10억 주면 정말 나갈 거야?”

“네. 사라져 주죠. 10억 정도면 모두 다 포기하겠습니다.”

나는 오기로 심기를 비틀어 말했다. 그러나 실장은 갑자기 인터폰을 누른 후 비서에게 아까 내가 말했던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잠시 후 비서는 서류 한 장과 인주를 내려놓고 나갔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정말로 나에게 10억을 줄 작정인지, 실장은 만년필을 꺼내 몇 자 휙 적더니, 나에게 서류를 건넸다. 

그것은 합의서였다. 첫째, 김무성 사원은 금연을 조건으로 (주)해맑은식품에 10억원의 돈 지급을 요청하였다. 둘째, 현금 10억원을 지급받는 순간, 김무성 사원은 회사 직원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셋째, 퇴사 후 회사에 대한 어떠한 비방도 하지 않는다. 만약 비방할 시, 민형사상 책임을 진다,였다. 서류를 읽고 나서,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것은 로또다! 이 돈이면 나는 누나에게 좋은 아파트 한 채와 벤츠 승용차 한 대를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10원 하나 안 쓰고, 30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아닌가. 입가를 비집고 환호가 터져 나올 뻔했다. 누나 말대로, 내가 이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나는 먹먹한 얼굴로 실장을 바라보았다. 실장은 여기에 있는 내용이 맞으면 사인을 하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나는 귀신에 홀린 듯 사인과 지장을 한 후 합의서를 건네주었다. 그는 비서에게 물티슈를 가져오라고 한 후, 내 엄지손가락을 직접 닦아주며 넘치는 친절까지 보여주었다.  

“아, 그런데 말야... 10억이 워낙 큰 돈이라 절차상 10일 정도는 지나야 결제가 떨어질 거야. 이렇게 하지. 합의서에 사인을 했으니, 지급은 해야겠고, 일단 지금 10억짜리 당좌 수표를 끊을 텐데, 10일 후에 현금으로 인출될 수 있게끔 날자를 조정해 놓을게. 그럼 되겠지?”

나는 대범한 표정으로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지난 5개월 간의 지독한 마음고생이 한순간 다 날아가는 듯했다. 역시 누나의 말이 맞았다. 회사가 나를 이길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도망치듯 경영기획실장 방을 나와 현관 옆에 잠시 세워놓은 피켓을 시원하게 부러뜨려 쓰레기통에 처 넣었다. 한발 한발 뗄 때마다 경쾌한 웃음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내 삶에 이렇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경영기획실장이 참으로 바보처럼 느껴졌다. 언제까지 1인 시위를 하겠다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극심한 체력 난조로 이번 주 말을 끝으로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하루하루가 생지옥 같았고, 내 처지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실장은 나와 누나의 협공에 기어이 손을 들고야 말았다. 거대기업은 역시 여론을 무서워했다. 포털을 활용해 그간 이미지 마케팅했던 모든 광고가 거짓이라는 것을 누나와 나는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었다. 강회장은 겁이 났을 것이다. 직원들도 나에게 박수까지야 보내지 않았을 테지만, 심적으로는 충분히 내 싸움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개인의 흡연 문제를 떠나서, 모든 선택권이 박탈당한 것에 대한 투쟁이었다. 21세기는 포스트모던한 시대가 아닌가. 모든 축이 와르르 무너진 마당에 획일화된 무엇으로 다시 돌아가서 합을 이룬다는 것이 시대에 온당한 일인가.

나는 상기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에 종로 1가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좀 앞당길 수 없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급히 상의할 게 있다며 전날과 같이 다급한 어투로 빨리 만나자고 하였다. 나는 명동 롯데백화점에 들려 아버지에게 드릴 루이비똥 지갑을 샀고, 동생들에게 줄 닌텐도를 선물 포장하였다. 나는 오늘 아버지에게 누나하고 결혼하겠다는 허락을 받으려고 하였다. 어차피 나에게 가장 큰 문제인 돈 문제가 해결된 마당에 지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그때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되돌아왔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문자로 아버지에게 오늘 결혼 허락받으려고 한다,고 보내려다가 그럴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종각역 스타벅스 커피숍에 나보다 일찍 나와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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