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이사와 경영기획실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처음부터 모든 게 작정된 시나리오 같았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암담했다. 경영기획실장은 10억 요구한 대화 내용을 녹음해 두었다고 했다. 또한 경쟁업체 관계자로 가장하고 만났을 때, 누나가 했던 말들또한 다 저장돼 있다고 했다. 누나가 경쟁업체라고 만났던 사람은 대현그룹 경영기획실 관계자였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누나는 지금까지 어느 매체에, 어느 포털에, 또한 앞으로 어떻게 일을 전개할 지 모두 말해 버린 것이었다. 나는 해머로 가슴팍을 맞은 것처럼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경영기획실장은 법무팀을 대동하고 나를 코너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10억 협상 자리에서 누나 얘기가 나왔을 때, 왜 내가 눈치를 못 챘는지 후회가 극심하게 밀려들었다. 연락이 끊긴 그 며칠 사이, 누나가 나를 위한답시고 한 일이 모두 덫이 되어 버렸다. 법무팀장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매섭게 말했다.

“분명히 회사를 비방할 시 민형사상 조치를 취한다고 했습니다. 당좌 수표는 지급 정지신청을 해 놓았기 때문에 10원도 쓸 수 없습니다. 당신 한 사람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경쟁업체는 우리를 조롱하였고, 더 이상 광고에도 금연 관련 내용을 쓸 수 없게 됐습니다. 당신이 피켓만 안 들었다 하더라도 일이 이렇게 크게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관된 의지가 당신 한 사람으로 인해 모두 거짓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지난 3년간 회장님 이하 전직원이 언론에 공개 약속을 하였는데, 당신이 그 취지마저도 독단적으로 곡해하여 모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나는 억울했다. 완전히 판이 달라져 있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걷잡을 수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대표이사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대표님... 제가 회사에 억울했던 것은 모두가 저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회사 금연 구역에서 피우지 말라고 해서, 금연 구역에서도 안 피웠고, 옆 빌딩 흡연 구역에서만 피웠는데도, 집 가는 길 어스름한 골목에서만 피웠는데도, 사람들은 저를 신고하고, 월급을 거덜냈습니다. 저를 신고한 사람들은 회사의 표현대로 하면 식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승복 시대의 공산당도 아니구, 모두 독사눈을 하고 저를 신고했습니다. 인사 대기발령 내서 병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온갖 쯧쯧 거리는 소리, 또라이라는 소리, 자기들 인생 망치는 개망나니,라는 모욕적인 소리까지 다 들으며 버티고 버텼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저를 총판으로까지 발령내 버렸습니다. 총판 직원이 우스워서가 아닙니다. 도저히 납득한 만한  기준점 없이 저를 단정하고 단죄하고 죄인으로 몰아가는 이런 회사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자존심은 땅에 꺼진 지 오래됐고, 오냐! 모두들 나를 그렇게 매도한다면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방법 다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봤자 피켓 하나 들고 현관 앞에 동상처럼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회사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이런 제 자신이 불쾌하고 견딜 수 없어 눈에 핏발이 섰습니다. 그런데 경영기획실장이 불러서, 대표님 위로금이라며 2천만원을 건네고 모든 것을 무마하려고 했습니다. 10억 요구했다고요? 요구했다면 그것도 요구죠. 제가 돈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아냥거리 듯 그렇다면 10억 줘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10억짜리 수표를 끊어오잖아요. 그 앞에서 눈 안 돌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 아직 서른살도 안 됐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그렇게 큰 실수를 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누나가 저를 위한답시고 한 일이, 회사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면 제가 책임져야 겠지요. 그러나 누나는 악의적으로 그런 게 아닙니다. 정상 참작을 해 주세요. 물의를 일으켜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요.”

억울함은 끝내 눈물로 터져나왔다. 이렇게 내 자신이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경영기획실장은 나에게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할 것인지 스스로 답을 내라고 했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물이 주체 없이 흐르는 와중에 뜬금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받지 않으려고 폴더를 닫았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경영기획실장은 괜찮으니 일단 전화부터 받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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