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다음날 아침, 아직 잠자리에서 채 일어나기도 전에 핸드폰 소리에 잠이 깼다. 알람인가 보다,하고 몇 번 무심코 넘기려고 했지만, 계속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는 뭔가 급박한 사정을 알리는 듯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거실까지 눈을 부비며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경영기획실 비서 유은애입니다.”
“네... 그런데요.. 무슨 일이세요?”
“경영기획실장님이 오전 중에 급히 좀 보자고 하시네요. 회사로 내방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걱정이 앞섰다. 나는 더 이상 해닮은식품의 마케팅팀 사원도 아니고, 그와의 관계도 다 정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토요일 아침 8시부터 걸려온 전화는 괜한 불안감을 조장했다. 나는 10시까지 회사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누나에게 분당 아파트는 오후에 다시 시간을 잡아서 가자고 얘기한 후, 회사로 나갔다.
홀로 시위를 벌였던 현관 앞은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주말의 회사는 정적했다. 늦가을인데도 아침부터 뜨거운 햇살이 수직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온난화로 인해 한낮에는 여름과 가을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어떤 것도 이분법적으로 쉽게 구분되지 않는 듯 보였다. 착한 것과 악한 것, 남자와 여자, 도심의 낮과 밤, 계절과 계절의 경계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하나로 뭉뚱거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현관 경비원은 나를 알아보고는 3층으로 올라가세요,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미리 비서실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입안에 잘못 씹힌 돌덩이라도 있는지 경비원은 오늘따라 더욱 불친절해 보였다.
3층 경영기획실장 방으로 올라가자 경영기획실장은 낯선 대여섯명의 직원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그룹 법무팀장이라며 한 사람이 명함을 건넸다. 분위기가 이상하리만큼 날카로웠다. 경영기획실장은 비서에게, 김무성 사원 도착했다고 내려오시면 된다는 말을 했고, 잠시 후 메인 상석에 대표이사가 들어와 앉았다. 내가 공손히 목례를 했지만, 대표이사는 인사를 받아주지도,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직감에 사로잡혔다. 판사 앞에 선 피고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법무팀장은 대표이사가 앉자마자 심문하듯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김무성씨, 전에 합의서에 지장 찍은 거 기억 나죠?”
“네...”
“그 합의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첫째, 김무성 사원이 현금 10억원을 요청했다. 둘째 10억원을 받는 즉시 회사 직원으로서 지위를 상실한다. 셋째 회사를 더 이상 비방하지 않는다. 비방하면 민형사상 책임을 진다,였어요. 기억나죠?”
나는 짧게 네,라는 답하였지만, 합의서의 내용 면면까지는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법무팀장은 합의서 복사본을 탁자 위로 바로 꺼내어 확인시켜 주었다.
“그래서 회사는 합의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10억원의 당좌수표를 지급했고, 결재 절차상 10일 후에 현금으로 지급되게끔 저희가 조치했습니다만, 저희는 그 돈을 지급할 수 없게 됐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 고개를 바짝 들고 법무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냉혈인간보다 더 냉혈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급할 수 없는 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급받은 날 이후, 당신과 사실혼 관계에 있던 김세희씨는 대현그룹 모든 기사에 김무성씨는 금연하지 않고 있으며, 회사의 폭압에 당당히 저항하고 있다는 식으로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제가 한 것은 아닙니다. 전 그날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무슨 얘기 하는 겁니까? 당신은 포탈에 들어가서 로그인을 했고, 실명 인증을 거쳐야만 댓글을 달 수 있는 언론사 사이트에 들어가서도 회사를 비방하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법무팀장은 다 예감하고 있다는 듯 파워포인트로 작성된 문서를 보여주었다. 문서에는 내가 남긴 글들이 96건이라고 적혀 있었고, 포털과 언론사, 기타 사이트에서의 내 행적이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모두 누나가 한 일인 것 같았다. 내 입에서 긴 탄식 소리가 새어나왔다. 누나가 나를 도우려고 했던 일이 되려 내 발목을 잡아서 옴짝달짝할 수도 없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대표이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무성 사원...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모두 답해야 하네. 대현그룹이 그렇게 파렴치한 기업인가? 한 개인을 조직적으로 몰살시키는 기업에서 나온 제품도 비양심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 말이 사실인가? 언제 해닮은식품이 노조를 구성하려는 직원을 강제로 인사발령내고 불이익을 줬다는 것이지? 쌀음료가 100% 국내산이 아니라는 말은? 강석현 회장님이 집에서는 몰래 담배를 피운다는 말은? 대체 어떤 증거로 그런 말도 안 되는 비방을 퍼뜨린 거지?”
에코가 잔뜩 들어간 마이크에서 들리는 소리마냥 대표이사의 말은 귓전에서 웅웅거렸다. 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도무지 감 잡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저는 사실 그런 말한 적 없습니다. 결단코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얘기가 제 이름으로 나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법무팀장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엄중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기업은 브랜드 가치가 생명인데, 김무성씨는 대현그룹과 해닮은식품의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였습니다. 저희 법무팀에서 알아본 결과 당신의 비방 선동으로 인해 회사는 약 400억원 가량의 브랜드 가치를 손실 입었습니다. 주가가 떨어진 이유에 대해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주식 종목 게시판에까지 악의적인 비방 선전을 하였기 때문에 그 손실액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회사에 금전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신은 인권위에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했다고 하였지만, 이 사실을 알면 여론의 동정도 받을 수 없습니다.”
“금전을 요구하다니요. 금전을 먼저 제시한 것은 회사였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전혀 돈을 고려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합의의 형식으로 대표이사님이 주신 거라며 2천만원을 건네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야 그게! 우리가 언제 돈으로 합의를 보려 했다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