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시위 얘기를 꺼내셨고, 나는 곧 사표 낼 예정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1인 시위보다 내 사표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는 듯했다. 좋은 게 좋은 게지, 무슨 일을 하든지 서로의 입장,이있는데 적절히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한다며 나를 설득하셨다. 남의 돈 빼먹기가 그리 만만한 줄 아느냐며,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데, 뭘 하든지 감정적이거나 성급하게 처리하면 안 된다고 일러두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할 얘기가 있다는 듯, 담배 한 개비를 태워 물으셨다. 심각한 듯 뭔가 미안하듯 여러 표정이 뒤엉켜 있었다. 

“무성아, 일이 좀 이상하게 돼 버렸다.”

이상하게 돼 버렸다,는 말 뒤로 타이어 바람 빠지는 듯한 한숨소리가 진하게 묻어나왔다.

“새엄마가 말야... 내 돈을 다 날려버렸어.”

나는 놀라 아버지를 황급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셔요?”

담배를 잡고 있던 아버지의 손가락이 수전증 환자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젊은 사람이 나랑 살아준 것이 무척 고마워서, 그간 풍족히 쓸 만큼 쓰라고 돈에는 내가 전혀 신경을 안 썼는데, 며칠 전 확인해 보니, 통장하고 주식 계좌에 있던 돈들이 거의 다 증발해 버렸어.”

나는 이 사태가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자산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30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며 모아 놓은 돈이 상당했을 터인데, 그 많은 돈이 증발해 버렸다는 말에 나는 기겁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국내 1위 업체의 증권 회사 부장 정도의 월급이면, 웬만한 대기업 임원 연봉 그 이상이었을 터인데,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번씩 나에게 어떤 종목이 좋냐고 물어 보길래, 그냥 재미삼아 한 두판 하는 갑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더라구. 10년 정도 장기투자하려고 중공업 주식에 묻어두었던 것도 나 몰래 팔아서 코스닥 주에 몰빵 했다가 상장 폐지 되구. 돈을 잃으니까 2금융권에서 아파트 담보대출까지 받아 또 급등주에 손 댄 거야. 고점에서 물려 그것도 80% 이상 손실 나구... 그것도 모자라 내 종신보험까지 다 해지해서 또 주식하다가 완전 거덜나 버렸어. 무슨 까페에서 몇몇 사람들하고 작전주 모의까지 한 것으로 보아 사기 일당들한테 당한 것 같기도 하구... 이 일을 어쩌니...”

원래 정이 없던 새어머니지만, 있는 정마저 다 떨어져 나갈 판이었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그간 그런 일을 몰랐다는 게 말이 되냐 했지만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내 명의로 대출을 받으려 시도하다가, 은행에서 회사로 신원 확인하잖아. 나한테 대뜸 1억 신용대출 원하셨는데, 2천만원밖에 안 된다고 하잖아. 그래서 대출 신청한 적이 없는데 무슨 얘기냐고 물었지. 새엄마가 대리로 신청했다 하더라구. 집에 쫓아가 난리쳐서 살펴보니, 이미 게임 끝났지 뭐니...”

나는 참담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의 눈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으면서, 나에게 너무 미안했다고 했다. 장가갈 때 집이라도 한 채 해 주려고 중공업 주식에 2천만원 묶어 두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3억이 넘는다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은행에서 집을 곧 경매로 넘기겠다고 내용증명이 날아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다시 돈이야 벌면 된다고 하셨지만, 평생 이룩한 행복의 원천에 큰 배신을 당한 듯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셨다.

“아들한테 이런 얘기하기 그렇지만, 너 살고 있는 집 전세 처분하고, 일단 나에게 돈을 좀 빌려주렴. 새어머니하고 동생들 잠잘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니... 뭘 알고 했으면 모르겠는데, 아무 것도 모르고 저지른 짓이라 차마 내치지는 못하겠더라...”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이, 아버지 몰래 대출 받다가 들키고, 아버지 몰래 집 담보로 주식질 하느냐고 따지듯 말했다. 제발 사태를 분명하게 직시하시라고, 작전주로 한탕 치려고 했던 사람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냐고 흥분하여 되물었다. 나에게 그간 어떤 행복도 주지 못한 새어머니에 대한 원망까지 토로하였다. 이참에 헤어지시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끝내 가슴에 삭혔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간 모아놓은 돈이 조금 있다며, 일단 통장 잔고에 있는 3천만원을 폰뱅킹으로 그 자리에서 송금하였다. 그 돈으로 일단 전셋집 계약하시고, 중도금 날짜 알려 주시면 다시 송금해 드리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연신 고맙다며, 또 미안하다며 눈물을 글썽거리셨다. 나는 모진 말 해서 죄송한데, 새어머니가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하다며, 마지막까지 분을 참지 않았다. 나는 화장실에 간다고 한 후, 따로 은행카드로 100만원짜리 수표 2장을 출금하여 루이비똥 지갑에 담아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는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면목 없다는 듯 쉽게 고개를 들지 못하셨다.

아버지를 배웅하고 난 후, 난 닌텐도 위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터덜터덜 도심을 배회했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번뜩거렸다. 간판도, 자동차도, 가로등도 정지된 것이 하나 없었다. 나는 청계천을 따라 걸어갔다. 모두 다 세월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청계고가가 있던 자리, 그 아래 이렇게 훌륭한 자연이 흐르고 있었던가. 나는 감상에 젖었다. 도심은 너무 급격히 바벨탑처럼 올라갔다. 시선을 부여잡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겨낼 수 없다는 듯 경쟁적이었다. 온통 색깔을 입히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너무나 많은 것들에 이미지를 입혀 놓았다. 조화롭지 못한 조경물들, 흐르는 물소리마저 부자연스러워 나는 한참동안 청계천을 바라보았다.

늘 자신만만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출근을 위해 중형 세단 차에 올라타기 전 어머니에게 행복한 웃음을 보여주었던 아버지의 너그러움과 넉넉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채 몇 달 동안 드라이도 하지 않은 듯 양복은 구겨져 있었고, 닦지 않은 구두를 신고 터덜터덜 지하철로 걸어 내려가시던 모습에서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새어머니는 자본주의의 도구로 아버지와 결혼한 듯 보였다.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식에 어린 내가 오는 것을 새어머니가 꺼려했을 정도로, 나는 처음부터 눈밖에 나 있었다. 오랜 인내와 노력으로 이룩한 성은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그런 아버지 앞에서 결혼 얘기를 차마 꺼낼 수 없었다. 10억이라는 돈이 있었지만, 새어머니가 있는 아버지의 성전에 차마 헌금할 자비가 없었다. 청계천은 계속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무심한 듯 표정 없이 콸콸콸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전사가 되라는 누나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세상 모든 것은 전략과 전술 뿐이라는 누나의 말이 귓전을 쾅쾅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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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2009-11-01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