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와 나는 몇 일간 혼자만의 혼수 준비로 바빴다. 누나는 토요일날 올라오겠다며, 생각했던 일이 잘 되어 기분이 좋다고 했다. 나는 누나를 놀라게 해 줄 생각으로 회사 일은 전혀 얘기하지 않았다. 웃으며 사고치지 말고 빨리 올라오라는 내 독촉에도 곧 간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빨리 누나와 결혼하고 싶었다. 동거 기간이 길수록 어떤 형식이 필요해 보였다. 보증된 장치가 없으니, 언제든 누나가 떠나 버릴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누나를 합법적으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누나가 집으로 돌아오는대로, 혼인신고를 마치고, 아버지와 장인어른을 찾아뵌 후 정식으로 결혼 승낙을 얻고, 날을 잡아 결혼식을 올릴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들뜬 하루 하루를 보냈다.

첫째 날 나는 보험과 증권을 모두 해약하고, 통장 잔고까지 모두 털어서, 분당에 있는 24평짜리 아파트를 매매 계약했다. 집 앞에 개천이 있어서 산책하기에도 좋았고, 경부고속도로와 지하철 역이 가까워 교통도 무척 편리하였다. 누나 사무실이 있는 강남까지도 30분 내외의 거리여서, 나는 망설임 없이 3천 만원의 계약금을 주었다. 둘째 날은 장롱과 가죽소파, 서재 등 모든 가구를 바꿀 계획으로 일산 가구공단에 가서 물건을 살피고 계약했다. 셋째 날은 하이마트에 가서 40인치가 넘는 대형벽걸이 TV와 스피커만 해도 300만원이 넘는 오디오 세트를 카드로 구입했다. 매일 아침이면 나는 이불장 한 구석에 고이 감춰둔 10억짜리 당좌수표를 확인했다. 님은, 고스란히, 거기에, 새색시처럼 가만히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세어 봐도 0은 아홉 개였다. 셋째 날 밤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고 다그쳤다. 축복의 긴 하루하루를 홀로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누나는 집으로 오자마자 나를 껴안고, 격렬한 정사를 나누었다. 한 십년 만에 만난 오랜 애인을 그리워하듯 누나는 뜨겁게 내 몸에 올라탔다. 타들어가는 듯한 누나의 신음 소리가 여느 때보다 유난했다. 정사가 끝난 후 누나는 내 목덜미에 뜨거운 입김을 품으며 여론이 완전히 나에게로 넘어 왔다,고 말했다. 나는 누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쉿,하며 손가락으로 누나의 입을 막았다. 나는 휘파람을 부르며 장롱 속에 있던 10억짜리 당좌수표를 누나의 알몸 위로 가을 낙엽처럼 떨어뜨렸다. 누나는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긴 검지손가락으로 또박또박 0을 몇 번이나 세어보고 또 세어보았다. 누나는 어찌된 영문이냐며, 내 위에 맨몸으로 올라타서 다그쳐 물었다. 나는 그동안 벌어졌던 회사 일을 말해 주었다. 누나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와 수표를 몇 번이나 번갈아보았다. 누나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누나는 내 가슴을 애교 있게 통통 때리며, 미리 알려줬으면 내가 생고생 안했지,라며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토론방이 난리가 났어 난리가. 내가 알바 애들 좀 풀었거든. 대현그룹과 관련된 모든 기사에 댓글을 달라고...”

“저번에 다 했잖아요 그건...”

나는 누나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살짝 잡아채며 말했다.

“내가 거기에서 끝났겠어? 강회장이 보건복지부 금연 광고 들어갔잖아.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에 가서, 대현그룹의 만행이라는 장문의 기사도 올리고, 인권위원회에도 대현그룹 실상에 대해 까발리고, 민주노총 관계자도 만나고 정신 없었어. 그뿐 아니야. 어제는 해닮은식품 경쟁업체인 정원식품 알지? 거기에서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홍보팀 관계자가 만나자고 하더라구. 진짜 담배 피우는 사람 있냐. 지금 포털이 난리가 아닌데, 그렇게 피해를 입었으면 자기네들이 조직적으로 더 도울 테니, 그동안 투쟁했던 거 다 알려 달라고 해서 알려 줬지. 우아! 돈 많은 애들은 다르더라. 고맙다며 선뜻 현금 백만원을 주더라니깐!”

나는 누나에게 더 이상 이제 투쟁할 일 없다며, 내가 퇴사했기 때문에 그만 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나는 누나에게 뭔가 일이 잘 풀려나갈 때 우리 인생도 새출발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며, 다이아반지를 끼워주며 청혼하였다.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벌여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10억보다 더 큰 이벤트는 언뜻 생각해 보아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나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 알았다며, 내가 두 팔을 벌리자 스르르 안겨왔다. 누나는 나처럼 늙은년을 데리고 가서 뭣하게,라며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청혼을 수락했다. 누나는 내 삶의 리더였다. 누나 때문에 좋은 대학에 가게 됐고, 누나 때문에 좋은 직장도 얻었다. 게다가 누나 때문에 평생 편히 살아도 될 만큼의 돈도 얻었다. 누나와 평생 함께 갈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자신 있었다. 10년 가까이 써 내려간 일기장을 누나는 몇 번이고 읽어봤을 것이다. 책상 한 켠에 비밀스럽게 숨겨둔 듯 했지만, 나는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곳곳에 해 두었다. 일기는 나의 기록이자 누나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백만 번의 사랑한다는 말보다 그 일기장 두 권이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것이었다. 나는 누나에게 다음 주 말에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그 다음 주에 부산에 내려가 장인 어른을 뵙고, 그 한 달 뒤에 상견례하고, 날짜를 잡자고 했다. 누나는 다소곳이 서방님께서 하자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하며 행복하게 웃었다. 누나는 화장도 채 지우지 않고, 알몸으로 내 위에 몸을 포개듯 잠들었다. 나는 누나를 부드럽게 껴안으며,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말을 가슴 속으로 되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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