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소명에 대한 충성이다. - P83

일차적인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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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았다. 이것이 우리의 일차적인 소명으로, 무언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라는 부름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과의 개인적인 관계로 부르신다. •••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보다 우리가 누구인지에 더 관심이 있으시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상장과 성과를 내밀어도 하나님은 별로 감흥이 없으시다. 그분이 주목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인격과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 P99

이차적인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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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적인 소명은 무언가를 ‘하라’는 부름으로 학생, 회계사, 엄마, 화가 등으로 부름받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이 지어 주신 독특한 모습에 맞는 구체적인 행동으로의 부름이다. 모든 사람에게 일차적인 소명은 똑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차적인 소명은 사람마다 다르다. 여기에는 직업과 평범한 일상 속 일거리가 포함된다. - P103

신앙과 일, 경제 연구소Institute for Faith, Work and Economics의 설립자 휴이 첼Hugh Whelchel은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주는 이차적인 소명의 네 가지 측면을 규명했다.

첫째, 이차적인 소명 중 가장 중요하고 자연스러운 소명은 육신의 가족에 대한 소명이다. 우리는 가족 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형제나 자매, 아들이나 딸, 아버지나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가정을 만드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하셨다. 육신의 가족 안에서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한 방법이다.

둘째, 우리는 교회로 부름을 받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 몸의 지체들은 모두 영적 은사를 갖고 있고 그 은사를 사용하여 몸을 튼튼하게 만든다. 여기에 은사의 다양성까지 더해져 교회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한다(엡 4:13).

셋째, 우리는 서로 이웃으로 부름을 받았다. C.S.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성체를 제외하면 이웃은 우리의 오감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대상이다." 우리의 이웃은 교회와 가족밖에 있는 공동체로, 가까이서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과 일터나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포함된다.

넷째, 우리는 직업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것이 이차적인 소명중 가장 많이 다루는 영역이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일을 의미한다.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이렇게 말했다. "일은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어야 한
다…(일은) 일꾼이 재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영적, 정신적, 육체적 만족을 찾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통로여야 한다." - P104

삶이 왜곡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일차적인 소명과 이차적인 소명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베드로처럼 우리는 두 가지소명을 마주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구원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차적으로는 일 속에서 구원에 반응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베드로의 경우는 이차적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 곧 사도로부름을 받았다. 우리도 하나님이 지어 주신 독특한 모습에 맞게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차적인 소명을 일차적인소명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차적인 소명은 일차적인 소명과 연결되어야 가치가 있다. 일차적인 소명을 무시한 채 이차적인 소명만 찾으면 그 결과는 허무함뿐이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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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너무 바쁘면 심신이 지쳐 진정한 소명을 놓칠 수 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최대 경쟁자는 바로 그분에 대한 섬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유일한 이유는 그분을 위해 뭔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만족을 누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는 일조차도 그것에만 매달리면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을 놓칠 수 있는 것이다. - P51

나를 부르신 분의 관점에서 자신을 정의할 때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 시편 17편 8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라고 간구한다. 여기서 "눈동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내 눈의 작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 누군가의 눈 속을 가까이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로 자기 자신이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분을 뚫어져라 보다 보면 자신의 정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세상의 거짓말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나의 모습, 진짜 자신이 보이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닫고 성경이 나에 대해 말하는 진리를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 P65

부르심에 관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은 자격 있는 자들을 부르지 않고 부르신 자들에게 자격을 주신다."

전도자이자 기독교 교육가인 D. L. 무디도 비슷한 말을 했다. "모세는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40년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이 하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40년이 걸렸다. 그다음 40년은 하나님이 하찮은 사람을 통해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 P122

우리는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하나님의 투자 대상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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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비유)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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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청년편지
김기석 지음 / 성서유니온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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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연식과 지식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글이었다. 수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내가 읽은 에세이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주제는 무겁지만 필체는 가볍고 제목부터 마무리까지 한번에 정리되는 그런 글. 목사님의 다른 글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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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장 자리에서

우리는 그럴듯한 자기 동일성이 무너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시디 이야기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제자가 랍비에게 묻습니다. "토라는 왜 우리에게 ‘이 말씀을 네 마음 위에 두라‘고 말하나요? 왜 이 거룩한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두라고 말하지않나요?" 랍비는 우리 마음이 닫혀 있기에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둘 수 없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우리 마음 꼭대기에 둔다. 그리고 말씀은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 마음이 부서지면 그 속으로 떨어진다" (파커J. 파머, 『모든 것의 가장 자리에서』, 글항아리, p. 217). 파커 파머는 마음이 부서져 조각나는 이들도 있지만 부서져서 열리는 이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에 대해 절망해 보지 않은 이가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철저한 절망이야말로 은총으로의 입구일 때가 많습니다. - P214

그러나 고백을 삶으로 번역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살기 어려운 이유가 백 가지도 더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길이라 고백하면서도 정작 그 길을 걷지는 않습니다.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개 그 길을 걷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교인으로 평가받고 싶어 합니다. 교회 출석도 열심히 하고, 헌금 생활도 잘 하고, 전도 혹은 선교도 게을리 하지 않고, 가급적 봉사활동에도 빠지지 않으려 합니다. 이만하면 좋은신자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이런 이들을 일러
"명목상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이라 말합니다. 명목상‘ 이라고 번역된 ‘almost‘는 사실 거의, 대체로‘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꽤 긍정적 평가처럼 들리지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곧 ‘거의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웨슬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 대비되는 참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의 징표가 있다고 말합니다. 전심전력을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초월합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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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시대의 신앙 고백"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고 믿기에, 인종적 편협함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잔혹한 부인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 성, 정체성, 계급에 따른 어떤 억압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성 혐오, 학대, 성폭행, 성추행과 모욕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가정과 교회 공동체, 일터와 정치 무대에서 여성이 존중받는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낯선 사람, 병든 사람, 갇힌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함부로 대하고, 병든 이들의 치유받을 권리를 보호하지 않는 정치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정치입니다. ••• 그리스도적인 리더십은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기에 선출된 공직자들은 그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특정한 나라의 경계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미국 우선‘이라는 구호는 신학적 이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205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이 불편한 교회, 예수님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교회는 이미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어렵다고 느끼기에 예수님을 저만치 밀어 올린 후 경배합니다. 경배하는 일은 쉽습니다.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이래저래 예수님이 외로운 시대입니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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