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과학이 여는 세계 - 세상을 바꾼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원천 아이디어 그리고 미래
이광근 지음 / 인사이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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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이론 과제

p.88

한편 전기 스위치가 컴퓨터를 구현하는 데 영원히 최선일 수는 없을 것 이다. 전기 스위치의 효율이 더 좋아질 여지는 아직 많다. 초창기에는 마치 불도저로 방문을 여닫는 정도의 효율이었고,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지만 방문을 여닫는 데 말 한 마리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효율 정도다. 아직 너무 큰 힘으로 너무 작은 일을 하는 것이다.

p.93

컴퓨터는 마음의 도구이고 그 도구를 다루는 방법은 지혜와 언어다. 모든 도구는 다루는 방법이 함께 하는데, 인류가 발명한 대개의 도구는 물리적인 도구였고 다루려면 물리적인 근육이 필요했다. 하지만, 컴퓨터는 마음의 도구이고 그 도구를 다루는 방법은 지혜와 언어로 짜인 소프트웨어다.

p.228

이 문제를 컴퓨터가 해결해 준다. 빅 메커니즘big mechanim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컴퓨터가 동원되어 계속 많아지는 파편화된 사실들을 모두 이해해서 전체 시스템의 작동 기제를 자동으로 유추해주는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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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넘기기 어려우나 점점 빠져들게 된다.

철학 개론서..?

평소 고민해오던 것들이라 책갈피가 너무 많다..

[1. 낭만적 운명론]

18.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우리의 사랑 이야기의 발단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증명해준다 — 내가 클로이를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 뿐이라고,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동시에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3. 이면의 의미]

10. •••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곧바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락하는 사람[우리는 곧 배은망덕해진다]이나 절대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우리는 곧 그 사람을 잊어버린다]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상대의 마음에 안겨줄 줄 아는 사람이다.

[4. 진정성]

5. ••• 정확한 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확한 말을 의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경우가 많다. ••• 진정한 욕망은 명료한 표현이 불가능하다.

12. 나는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곧 나의 모든 개인적 특징들을 버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의 진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완벽성과 화해 불가능한 갈등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무가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6. 마르크스주의]

1.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천사]을 보면서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위험을 잊기 쉽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에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가 있다는 것이다.

7. ••• 다름 아니라, 내가 클로이에게 몇 주 동안 느껴오던 것을 클로이도 나에게 약간은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어쩐 일인지 보답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나는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데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며, 큐피드의 화살을 맞기보다는 쏘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12.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곰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

15. 우리가 아는 또다른 마르크스(Grucho Marx, 1890-1977, 미국의 희극인, 이 장에서 저자가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나 마르크스주의자 역시 그루초 마르크스와 관련된 것이다 / 역주)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농담을 했다. 이 농담은 클럽 회원권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16. 어쩌면 어떤 사랑은 아름답거나 고귀한 존재와 사랑의 동맹을 맺음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약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사랑해준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 우리를 애초에 사랑으로 몰고 간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믿을 수 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믿게 되었으니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18.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서 자신의 사랑이 보답받기를 갈망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꿈이 공상의 영역에 남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나 자신을 더 낫게 생각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르크스주의자를 우습게 생각할 때에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해서 최대로 존중하게 된다. 클로이가 나와 함께 자고 나에게 잘해줌으로써 오히려 그녀에 대한 내 평가 점수가 낮아졌다면, 그것은 혹시 그녀가 그 과정에서 나라고 하는 심한 전염병에 감염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24.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이 있다. 사랑이 보답을 받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자기 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저런 핑계로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자신의 쓸모없는 면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것이다.

[8. 사랑이냐 자유주의냐]

2. •••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상대를 마음대로 살게 해주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우리더러 마음대로 살라고 허락한다면 그것은 보통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왜 두 연인 사이에서 목격되는 잔인함을 증오와는 다른 문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하고 물어볼 수밖에 없다. 나아가, 구두의 문제와 국가의 문제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서 이렇 게 물어볼 수 있다. 왜 공동체나 국민에 대해서 이야기를하지 않는 나라는 보통 그 구성원들이 고립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별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놓아두는 것일까? 왜 사랑, 친족관계, 형제애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는 나라들은 보통 그들의 주민의 상당 부분을 학살하게되는 것일까?

5. 우리의 말다툼에는 사랑과 자유주의의 역설이 담겨 있었다. ••• 나의 유일한 변명은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그녀는 내 이상형이라는 것 - 구두만 빼면 -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결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통 친구에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 나는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말을 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변명이었다.

19.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적어도 사랑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유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짜증의 벽들을 따라서 늘어 서 있었다. 농담 뒤에는 차이에 대한, 심지어 실망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긴장이 완화된 차이였고, 따라서 상대를 학살할 필요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11.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9.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지겹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 그렇게 이야기를 해보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14. "나"의 확인]

16.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성격의 어떤 요소들만을 집어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은 바베큐 꼬치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17. ••• 우리가 아무리 가깝다고해도 그녀는 결국 다른 인간일 뿐이었으며, 그 말이 가지는 모든 신비와 거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불가피한 거리는 우리가 결국 혼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19.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낙인이 찍히고, 성격 부여가 되고, 규정될 수밖에 없듯이,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도 우리를 바베큐 꼬치에 꿰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다만 적합하게 꿰는 사람일 뿐이다.

[14. 마음의 동요]

17. ••• 성숙이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을 만한 때에 주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16. 행복에 대한 두려움]

6. 닥터 사베드라는 ‘안헤도니아’라고 진단했다. 영국 의학협회에서는 행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갑작스러운 공포에서 생기는 것으로, 고산병과 아주 흡사하다고 규정한 병이었다. 스페인의 이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흔한 병이라고 했다. 이곳의 전원적인 풍경에 들어오게 되면 갑자기 지상에서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 눈앞의 가능성으로 대두되면서, 그런 가능성에 대응하기 위하여 격한 생리적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4. ••• 우리가 서로에게 지독한 비난을 퍼부었다는 점, 그럼에도 사실 그 비난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는 점은 우리가 서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싸웠음을 보여준다.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우리는 그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싸운 것이다. 우리의 비난에는 복잡한 이면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싫어한다. 이것은 나는 이런 식으로 너를 사랑하는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싫다는 근본적인 주장과 통한다.

15. ••• 클로이가 대표하는 행복을 받아들이는 어려움은 거기에 이르는 인과 과정이 없다는 것, 따라서 내 삶에서 그 행복을빚어낸 요소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서 온다. 클로이와 나의 관계는 마치 신들이 만들어놓은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신의 보복에 대한 원시적인 두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17. 수축]

6. •••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신비한 "나"는 가장 약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지점에 자리잡은 자아로 간주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18. 낭만적 테러리즘]

1. •••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선물로서 주어졌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15. 삐친 사람은 복잡한 존재로서, 아주 깊은 양면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도움과 관심을 달라고 울지만, 막상 그것을 주면 거부해버린다. 말없이 이해받기를 원한다.

18. 일반 테러리스트들은 건물이나 초등학생들을 폭탄으로 날려보내 이따금씩 정부의 양보를 강요할 수 있지만, 낭만적 테러리스트들은 접근방법이 근본적으로 일관되지 않기때문에 실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너한테 삐치거나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생긴다. 만일 상대가 사랑으로 보답한다면 그 즉시 그 사랑이 더럽혀진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낭만적 테러리즘은 자신의 요구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그 요구를 부정해버린다. 테러리스트는 결국 불편한 현실, 사랑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19. 선악을 넘어서]

9.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그녀가 나를 거부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 그녀가 나를 거부하면서 죄책감을 느낀 것은 사랑을 내가 이타적으로 그녀에게 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나의 선물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었다면, 클로이도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관계를 끝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자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21. 자살]

4. ••• 나의 죽음은 정상적인 것에 대한 폭력적 부정이 될 터였다. 다른 사람들은 잊지만, 나는 잊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터였다. 나는 시간의 부식으로 인해서 모난 부분이 다듬어지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나는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다. 그래야 불타버린 신경의 말초를 통해서 클로이와 관련을 맺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나의 죽음을 통해서만 내 사랑의 중요성과 불멸을 주장할 수 있었다.

7. 인간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며, 그 바람에 자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성난 개는 자살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화나게 한 사람이나 물건을 물어뜯는다. 그러나 성난 인간은 침울하게 방 안에 틀어박혔다가 말 없는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총으로 자신을 쏜다.

8. ••• 그러나 죽음이란 말 그대로 죽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상대가 그 비유를 읽어내는 것을 볼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이 아이러니였다. 나는 죽음으로 인한 무능력 때문에 적어도 세속적인 틀에서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바라보는 모습을 바라볼 기회를 박탈당하게 될 판이었다.

[22. 예수 콤플렉스]

1. 고뇌에 괜찮은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런 비참한 상황을 나 자신이 특별하다는 증거[아무리 부당한 증거라고 하더라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달리 왜 내가 이런 엄청난 괴로움을 겪도록 선택되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증거, 따라서 어쩌면 그들보다 낫다는 증거가 된다.

9. ••• 중요한 것은 예수가 착하고 완전히 의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배반당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신약성서가 비애감을 주는 것은 그것이 내 사랑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모든 덕을 갖추었지만 그럼에도 오해받은 존재의 슬픈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인물은 모든 사람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사람들은 그 관대한 메시지를 그의 면전에 내던져버렸다.

12. 예수 콤플렉스는 마르크스주의의 정반대편에 자리잡고 있다.

[24. 사랑의 교훈]

4. 일부 지혜로운 사상가들은 고개를 끄덕여서 사랑을 승인해주었지만, 그들은 신중하게도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구분해놓았다. 마치 의사들이 마요네즈를 먹지 말라고 하면서도, 콜레스테롤이 낮은 재료로 만든 것은 먹어도 좋다고 하는 것과 같다.

5. 성숙한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으로 나눌 수도 있다. 성숙한 사랑의 철학은 거의 모든 면에서 미성숙한 사랑보다 바람직하며, 그 특징은 각 개인의 선과 악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다. 성숙한 사랑은 절제로 가득하며, 이상화에 저항하며, 질투, 마조히즘, 강박에서 자유로우며, 성적 차원을 갖춘 우정의 한 형태이며, 유쾌하고, 평화롭고, 상호적이다. [어쩌면 이래서 욕망이 무엇인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이 고통 없는 상태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는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미성숙한 사랑은 ••• [절대적이기 때문에] 미성숙한 사랑의 논리적 절정은 상징적이든 현실적이든 죽음이다.

13. ••• 낭만적 비극과 낭만적 실증주의 사이의 대립이다. 그것은 지혜와 지혜의 대립물 사이의 대립인데, 지혜의 대립물이란 지혜를 모르는 것[이것은 고치기가 쉽다]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아는 것에 따라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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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강남
주원규 지음 / 네오픽션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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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냥저냥 이야기다. 어떤 주제나 깊은 사유를 하기엔 부족하다. 흡인력은 있는데 그냥 빠르게 읽고 넘기는 책. 작가가 드라마집필을 한 사람이라는데 느낌이 소설가보다는 드라마, 영화 시나리오 작가같은 느낌이 든다.

2.
[버닝썬]사건과 거의 흡사해서 이 뉴스가 일어나기 전에 봤다면 이 무슨 별나라 이야기인가 했겠지만 진짜 일어난 일이라는 걸 아는 지금은 ‘버닝썬’이라는 사건에 상상력을 불어넣는 내용이다. 다만 전혀 감도 못잡겠는 스너프 비디오라는 것과 여러 강간 내용들은 내가 이 사회를 아직 모르는 순수를 넘어 멍청한 인간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3.
그러고보니 어떤 목사가 자기가 데리고 있던 여자 가출청소년들이 없어져 강남의 뒷골목?을 많이 캐고 다녔고 버닝썬 사건을 먼저 알게 되어 책으로 출간했다는 정보를 어디선가 봤는데 이분 인가보다. 페북에서 봤나 했는데 이에 대한 감상들이 어디 목사가 글을 써서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다 뭐 이런 내용들이 있었는데 글이 만화방에서 볼 거 같은 한국 연애소설 느낌이 나지만 그렇다고 아주 못쓰는 건 아니었는데 참 sns댓글을 믿으면 안되겠다는 생각?

4.
내용은 변호사가 설계자라는 점에서 임성순의 [컨설턴트]가 생각났다. 이 점에서도 참신하지 못했는데.. 뭐 이런 설정도 현실성 없다고 욕 먹더라.. 나는 그냥 소설 설정으로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만 주인공들의 감정과 의식의 흐름을 전혀 못따라가겠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고 내가 이런 류의 책을 안좋아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전형적인 책 처음 쓰는, 과도한 상징과 자신만 아는 센치함을 담고 독자보다 자신에게 거더 심취한 그런 작가의 글이다.

5 그래도 끝까지 읽었다는 점에서 별을 두개 주려고 했는데 다른 별 두개 책에게 미안해서 별 하나로..

p.7
밤이 오히려 더 밝은 곳. 그렇다고 밤인 사실을 수기려 하지 않는 곳.
대치동 447번지에 위치한 38층 고층아파트 침실에서 내려다 본 강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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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124
이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매리엄과 전쟁 영웅들인 비랑가나(Biranganas, 용감한 여성‘이라는 뜻으로 방글라데시의 건국 총리인 셰이크무지부르 라흐만 총리에 의해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에서 여성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강간 생존자들에게 붙여진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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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인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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