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나는 루카스를 만났다
케빈 브룩스 지음, 서애경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외딴 섬 홀, 섬 동쪽은 원초적이고 거친 풍경이 펼쳐진다. 영원히 변치않는 갈색 개펄과 개펄 너머로 뒤틀린 나무숲이 있는 바위섬의 어둠. 그 바위섬은 거무스름한 갈색과 유령같은 으스스한 녹색이 뒤섞인 캄캄한 세계. 개펄은 햇볕에 뜨겁게 달아올라 공기조차 멎게 하는 칙칙한 빛을 내뿜으렴 무시무시하게 아른거리는..언뜻보면 질척한 갈색 개흙이 넓게 펼쳐진 벌판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조금 불쾌하고 조금 지저분한 곳이지만 개펄은 그 이상인 곳이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디뎌도 숨 막히는 수렁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치명적인 곳. 그래서 그토록 위험한 곳이다.  그 개펄 옆으로 길게 뻗어 있는 야트막한 해변에서 순수한 흰빛 후광의 소년을 만났다.  

 그 짧은 순간에 열다섯 케이틀린의 마음은 아빠 무릎에 앉아서 옛날 그림책에 나오는 천사그림을 들여다 보고 있는 다섯살짜리 계집애로 돌아간 듯 편안했다. 그 애의 눈빛은 청량하고 정직한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빛이며 치아는 우유처럼 하얗고 피부는 햇볕에 살짝 그을려 이마에 송긍송글 맺힌 땀방울이 숨이 턱 막히는 기분! 갑자기 나 자신이 벙어리가 된 거 같고 오로지 눈은 그를 바라보며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리고 서 있는 기분이다. 바로 그 소년이 루카스다. 케이틀린과 산책나온 '디퍼'마저 보통때와 다르게 그 앞에서 훈련이 잘된 조용하고 복종을 잘하는 개처럼 굴 정도로 모든 게 신비로운 소년이다.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조용하고 분명하고 정확하고 귀에 거슬리는 거없이 나긋하고 편안하고 화려하지 않으며 허식이 없었다. 외모는 꽤 어려보지만 그의 행동은 서투르지 않고 오만하지도 않고 남의 눈을 의식하지도 않으며 겉멋을 부리지도 유혹적이지도 않았다. 싫으면 그만! 케이틀린이 여지껏 만나 본 그 어떤 남자애들하고는 달랐다. 마치 머리는 구름 속에 있고 발은 땅 위로 둥둥 떠 있고 배 속이 너무 팔딱거려서 참을 수가 없고 모든 것이 밝고 깨끗해 보이고 모든 것이 새것 같은 냄새를 풍기며 신선한 공기가 살갗을 찌릿찌릿하게 하고 살아 있는 것 같은 온갖 느낌을 갖게 한다. 생각하면 괜시리 웃음이 나고 본인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그를 처음으로 만난 뒤, 케이틀린은 루카스를 다시 만나길 원했다. 단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가 아닌 둘만의 만남을 순수하게 지키고 싶은 마음에 자신과, 루카스, 디퍼 셋만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바람도 잠시, 보트대회가 열리던 바위섬 근처에서  여자아이가 물이 빠지는 사고가 일어났고 아무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루카스는 바다로 뛰어들어 아이의 목슴을 구했다. 그런데 군중은 루카스가 꼬마 애를 구하려고 바다로 뛰어드는 것을 봤지만  아이 엄마의 끓어오르는 분노가 군중의 마음에 의혹의 불씨를 당겨놓았다. '음, 저 남자애가 틀림없이 무슨 몹쓸 짓을 했어. 그러지 않다면 왜 애엄마가 저렇게 치를 떨겠어? 재 눈 좀봐. 겁먹은 눈을 좀 봐. 두려워하고 있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면 왜 겁을 내겠어? 그래 틀림없이 뭔가 몹쓸 짓을 했어...'  

 그가 단지 이곳 섬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라서. 아무도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르는 떠돌이라서 군중은 진실을 알고 있지만 진실은 곧 잊혀질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루카스가 바위쪽으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 자리를 피하는 순간, 상황은 더 악화되고 죄를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 순간을 군중은 그것을 간파한 듯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더 큰 목소리로 죄없는 루카스를 절벽 기슭의 바위들 틈까지 내몰았다. 그렇게 사람들은 잘 모르거나 잘 맞지 않는 사람을 싫어하고 또 그런 사람을 보면 겁을 먹고 (공포는 공포를 먹고) 힘이 더 커져서 그들은 타인의 고통에서 쾌락을 얻으려 했다. 특히 위협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타인한테는 더욱 더...자신들과 다르고 자신들이 모르는 사람이기때문에,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때문에 그것이 그들을 기분 나쁘게 했다. 바로 루카스가 그런 위협적인 존재였다.    

 옳든 그르든 자신들의 가장 큰 쾌감을 위해 현재 가장 기분 나쁜 일을 제거하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때문에 이미 일은 벌어지고 있으며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그를 섬에서 몰아내려는 사람들의 편견과 증오, 질시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마저 루카스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자신에게 닥쳐오는 최악의 상황을 모두 받아들인다.  '지금 있는 그대로 만족하라. 변하려고 하지 말라. 네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갈망하지도 말라...' 결국 섬에서 자꾸만 벌어지는 추하고 끔찍한 일들에 휘말려 별처럼 순수한 소년, 루카스는 누군가의 안타까운 외침에도 영원한 침묵 아래로 가라앉듯 사라져갔다. 그럼에도 다신 루카스를 만날 순 없어도 루카스의 얼굴은 절대로 변하지 않듯 한 소녀의 기억 속에 루카스는 고요하고 평화롭고 아름답도록 슬픈 얼굴 그대로다.  

 그러면서 날마다 바다 냄새를 맡으며 갯가로 부드럽게 밀려오는 파도소리, 공기 속을 떠도는 바람소리, 살랑이는 모래소리, 바닷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개울, 산골짜기, 숲, 물을 그 모든 것이 어떻게 돌고 돌면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지 생각할 것이다. 인생은 한번 쓴 모든 것을 다시 쓰고 뭇 생명은 앞세대 생명들이 내보낸 화학물질에 의존하여 살아가며 하나의 끝은 다른 하나의 시작이 된다는 생각, 소녀는 루카스를 떠나보내고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자꾸 마음 속에 떠올랐다. '난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더 많은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냥 거기 있었다. 내 마음 저 안쪽에서 자기들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둥둥 떠다녔다. 내가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루카스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