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1
가라타니 고진 지음, 박유하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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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박유하 옮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 1997)

풍문으로만 듣던 그리고 부분적인 모습으로만 보았던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이제야 읽어 보았다. 제목 그대로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기원이 은폐하고 있는 기원 형성의 과정을 들춰보임으로써 그 은폐의 정치적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책이다.

첫 장인 [풍경의 발견]이란 우리가 자명한 것이라 여기는 기원의 비자명성, 즉 그것이 형성과정으로서의 역사성을 갖고 있음을 밝히기 위한 일종의 키워드라 할 수 있다. 풍경이 풍경으로 발견된 것이 메이지 20년대의 구니키다 돗포에 의해서라는 고진의 지적은 근대가 표상하는 주체의 개념을 통해 풍경을 풍경으로 객체화 할 수 있게되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런 주체-객체의 발명이야말로 서구 근대의 발견이며 이것이 문학속에 어떻게 자리잡는가를 밝혀내는 것이 곧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탐사하는 것이된다. 풍경의 발견은 내면의 발견으로 이어지는데, 표현할 수 있는 내면의 발견이란 곧 근대적 자아의 발견과 맞닿아 있다. 근대적 자아로서의 내면은 선험적인 무엇이 아니라 근대적 제도에 의해 발명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선험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언문일치'라는 장치에 의한 환각작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때 언문일치란 단순히 말에 글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형상(한자)을 억압함으로써 제3의 새로운 문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설명된다.

풍견과 내면의 발견을 통한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형성은 [고백이라는 제도]와 [병이라는 의미], [아동의 발견], [구성력]의 보완을 통해 보다 분명한 역사를 갖게된다. 이러한 개념들은 자원적 원인을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하는 균질적인 논리를 내장하고 있다.

고진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속에 은폐된 정치적 의도를 드러내고 나쓰메 소세키를 그러한 기원을 거부한 작가로 높이 평가한다. 또 [구성력에 대하여]에서는 사소설이 중심을 갖지 않는 다원적인 것으로 보고 서구 소설의 [나]가 균질적인 것인데 반해 사소설의 [나]가 비균질적임을 들어 사소설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 작업이 니체/푸코의 계보학에 방법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통해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옹호하면서도 일본에 수입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왜곡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의 방법론을 본뜬 우리 학계의 연구들이 얼마만한 이론적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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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동양문화산책 4
사라 알란 지음, 오만종 옮김 / 예문서원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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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알란 지음, 오만종 옮김, <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1999, 예문서원

은유는 인간사유의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사라 알란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고대 중국 사상의 바탕에 흐르는 은유는 자연에 대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물'에 관한 사유는 뿌리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유가를 노자는 도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유가와 도가는 중국의 전통적인 개념구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그래서 물에는 모든 원리까지 나타난다. 그래서 유가와 도가에서는 물의 원리를 통해서 인간세계의 원리까지 탐구했다. 도가에서 말하는 無爲의 이미지는 물의 이미지와 동일하다. 물은 의도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곳에 생명을 주고, 만인이 싫어하는 낮은 곳까지 거처한다. 여기에서 물은 도와 동등한 개념이며 최고의 善이다. 『說文解字』에서 물은 표준이다라고 설명한다. 표준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표준에까지 이르는 개념이다. 물이 고요할 때 수평을 이루는데, 그것이 목수에게 필요한 水準器의 모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물은 땅으로부터 솟아 나와 끊임없이 흘러나가서 빈곳을 채우고 다시 앞으로 흘러가 바다로 들어간다. 이러한 특성을 공자가 찬미했다. 맹자에서는 이것을 비가 내려서 이룬 도랑물과 비교한다. 도랑물은 금방 말라버리기 때문에, 이러한 성질은 타고난 능력보다 과분한 명성으로 비유된다.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데에도 물의 속성이 이용된다. 고자는 인간의 본성은 솟아오르는 샘물과 같다고 했다. 어느 쪽으로 수로를 만드느냐에 따라 그 방향으로 흘러가듯이 인간의 본성도 善과 惡 중에 어느 쪽으로도 치우쳐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인간의 본성이 같다고 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록 유도할 수는 있지만, 아래로 흘러가는 본성을 막을 수 없듯이 인간의 본성도 여전히 선하다는 것이다. 물을 부드럽고 약하지만, 가장 단단한 것을 닳게 할 수 있다.

양보하여 다투지 않지만, 결국엔 승리하기 때문에 노자는 최상의 선을 물과 같다고 하였다. 물은 어떤 용기에 담기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이러한 특성은 사람의 융통성이나 유연성을 뜻한다. 반면에 순자는 통치자를 용기에 비교해서 백성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치자에게 있다고 본다. 물이 고요할 때는 맑으며, 수평이 된다. 때문에 법의 공평성과 정당성과 동일시된다. 또 투명하면서 방대한 양의 물은 성인의 지혜로도 비유되었다. 이렇게 물은 많은 대상들의 뿌리은유로 사용되고 있다.

『孟子』에서는 道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王道를 따르면 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백성들이 그에게로 향해간다고 말한다. 道라는 것은 仁이 孝와 悌에 의해 실행되어질 때 생기는 것이다.『論語』에서는 '세계는 오랫동안 도가 없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무질서한 상태를 의미한다. 유가에서는 도가 있을 때 천하는 질서 있게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道家에서의 도라는 것은 하늘이나 땅,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 나타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이다. 때문에 도를 물과 비교한다. 곧 만물을 위한 수로가 도이다. 그래서 도가 있다 혹은 도가 없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도는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도의 자연적 질서를 한정짓는 것이라고 본다. 儒家에서는 도의 자연적 질서를 강조하였고, 도가는 도의 무정형성을 강조하지만 둘 다 물의 속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의 속성은 자연의 원리와 인간생활의 원리를 모두 지니고 있다. 물은 고대 중국의 사유체제에서 저변에 깔려있는 너무나도 큰 뿌리은유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중국의 '물'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그 여러 가지 속성들로 인해 중국의 뿌리은유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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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문의 사명 - 인문학연구총서 1
조동일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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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인문학문의 사명>, 1997, 서울대학교출판부

인문학문이 위기에 직면한 이유는 우리들의 사고, 현실, 역사를 총괄해서 점검하여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일을 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이런 (시비학, 수입학, 자립학)에서 벗어나서 창조학을 해야한다. 국학을 세계화하는 것이 창조학이다. 이는 다른 여러 학문들의 결함을 시정해 줄 수 있다.

또 우리가 세계적인 범위의 일반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그 핵심이 바로 生克論이다. 생성과 극복, 조화와 갈등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이론이다. 이치의 근본을 모두 포괄적으로 논의해서 따지는 학문적 전통을 지녔기 때문에 모든 싸움을 인정하면서 화합을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학문은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 학문은 진실을 탐구하는데 그치지 말고 그 결과로 사회를 규제할 수 있고 가치의 평가기준을 삼을 수 있어야 한다. 학문끼리 충돌하는 이유는 그들을 다루는 상위학문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 정립이 필요하다. 바로 비교연구가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대단위 연구가 이루어졌다거나 그러한 계획조차도 없다. 대학은 교수에게 연구하는 여건도 마련해주지 못하고, 학생들에게도 공부할 환경을 제시하지 못한다. '학부제'를 실시해서 불균형을 초래하고, 얄팍하게 연구논문의 평가를 한답시고 교수의 연구를 방해하고 있다.

인문은 인간의 총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周易>에서 유래한 것이다. 天文은 日月星辰이고 地文은 山川草木이고 人文을 詩書禮樂이다. 이 때의 文은 紋과 같은 글자로 밖으로 드러나는 기본원리라고 볼 수 있다. 유럽문명권의 제 1세계에서는 인문학문을 사회학문, 자연학문과 대등하게 여기지만, 총체적인 이해는 부족하다. 제 2세계에서는 인문학문을 사회학문에 포함시키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인문의 전통을 되찾고 자연학문, 사회학문, 인문학문이 天 ,地 ,人에서 유래한 것을 확인해야한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발전에 동참하지 못해서는 세계화시대의 학문을 할 수 없다. 세계화 시대에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려면 먼저 민족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다른 나라와의 비교연구를 해야하는데, 이는 바로 인문학문이 할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인문학문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 분발해야한다. 우리 것만을 아는 것으로 세계적 문화총론을 마련할 수 없다. 우리 것과 남의 것을 제대로 알아서 비교연구가 가능해야하고, 인문학문과 사회학문, 자연학문의 연계가 가능할 때에 비로소 세계적으로 가치있는 이론이 나오는 것이다.

필자가 지적했듯이 학부제는 학문의 총체적인 연계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잘 나가는 과 밀어주고 돈 안 되는 과 없애는 제도일 뿐이다. 그러면서 통폐합은 학생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없애는 것뿐이라고 적당히 둘러댄다. 복수전공이라는 혜택을 주는 양 으스대면서, 학문의 정통성을 위협하고 있다. 학생들은 외우기 위해 학교에 오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수업 량은 깊이를 떨어지게 하고 넓이도 추구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흔히들 현대는 깊이가 아닌 넓이를 추구하는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깊이가 없는 넓이는 허상일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의 변화를 위해서는 더욱 매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학문이 세계적인 총론을 마련하는 주체가 되기 위하여 꾸준히 학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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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소설 형성사 - 자본이 이상을 몰아내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6
김창현 지음 / 책세상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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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 한일 소설 형성사 - 자본이 이상을 몰아내다, 책세상, 2002.

책세상 문고에서 나온 책으로, 얇은 문고본이다. 얇다고해서 어렵잖게 생각했는데, 이럭저럭 시간을 보내다보니 작은 문고본 하나에도 허덕이고 있는게 아닌가...

소설은 서사문학의 대표 장르로, 근대에 와서 각광을 받았다. 근대야말로 산문정신의 표출이 두드러지는 시기로, 소설의 흥행은 말할 것도 없다. 저자는 소설의 형성문제를 다루면서 조선과 일본의 근대를 비교하고 있다. 그 전제에는 일본 근대의 성공을 비판하며, 조선 근대의 실패를 변호하고 있는 저자의 목소리가 깔려있다.

근대란 무엇인가, 그 출발을 대표하는 것이 산업화와 르네상스이다. 산업화는 생산양식의 변혁과 관련된 것이므로 종속 변수가 크다. 르네상스를 '인본주의'의 부흥이라 말하지만 이것 역시 '근대'를 신성화하려는 신화만들기에 불과하다. 르네상스기의 유럽은 아직 근대가 아니었으며, 인본주의는 고래로 있어온 인간의 이상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자신들의 근대를 합리화하고자 내새운 '근세'를 비판하고, 일본의 근대는 물질적인 측면에서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에도시대에 거리를 칼을 들고 누비던 부시들에게 순응적 태도를 고착화한 농민들. 상인 계층으로 부를 획득했음에도 화려한 향락만을 즐긴 조닌계급의 한계 속에서 '서양베끼기'가 펼쳐졌다는 것이다. 반면 유학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온 국가에 체득화된 조선에서는 이처럼 무조건적인 순응이 있을 수 없었고, 논리적으로 맞는지를 검토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서양이 아무리 신식문물을 자랑한다하여도, 문화적으로까지 그들을 동경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때문에 일본의 소설들은 향락과 방탕이 일색인 것들이 대부분으로 흥미만을 추구한 반면, 조선의 소설들은 흥미를 추구하면서도, 유학이데올로기를 재확인 하고자 했으며 이와 더불어 논리적 검토까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 글의 마지막에, 생기없고 자동적인 일본의 젊은이들보다는 무언가 살아있는 듯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 어떻냐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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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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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

이 책에 드러나 있는 연암의 모습은 진정 유쾌하다. 저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연암은 友道를 즐기며, 유머와 패러독스를 통하여 유목적 여정을 드러낸 인물이다. 언어와 세계의 불일치를 뛰어 넘기 위하여, 연암이 선택한 것은 상투성으로부터의 탈주이다. 주체의 끊임없는 변이를 추구하는 '탈주체화'의 여정을 걷고 있다.

고전비평은 저자가 내놓은 새로운 작업의 명칭이다. 비평이라는 것에 대해 잘은 알지 못하겠으나, 저자가 바라본 시각에서 텍스트를 평가하는 것만이 비평은 아닌 듯 하다. 고전이 고전으로밖에 남지 않은 이유는, 텍스트의 진부함과 텍스트속의 진리가 고정화된 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텍스트의 다양한 면모를 파악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텍스트에 의미부여의 시각을 투여하여 그 반사된 빛으로 나온 것이 그 텍스트의 것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고전연구자들은 저자의 저술내용을 보며, 연암을 자기식으로만 재단해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텍스트의 진면목, 즉 연암의 다양한 면모와 그 녹아있는 진실을 철저히 파헤친 것이 아니라 연암의 테두리, 겉모양을 훑고 지나갔다고 비난한다. 여기에 고전의 딜레마가 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텍스트를 파헤쳐놓으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적당한 포장과 그럴듯한 언술을 펼쳐놓으면 주목을 받지만 동시에 비난을 감수해야한다.

연암의 모습은 이 책에서 말하는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아닐 것이다. 저자는 자기나름의 연암을 재구성해놓은 것이다. 그게 어떻다는 건가. 땅에 곤두박질 치더라도 날개짓을 하는 새끼새를 날개짓조차 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팽귄이 비웃을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이건 좀...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럼 당신이 다시 해봐라. 그러면 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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