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의 겉과 속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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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삶을 압도하는 것은 대중문화이다. 그 대중문화는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자본은 대중문화를 통해 우리 삶을 교묘하게 간섭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논객으로 알려진 저자 강준만은 바로 이런 대중문화의 속성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중문화를 무조건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충고를 들려준다. 대중문화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수용한다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제 대중문화는 새로은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광고와 영화 신문 잡지 텔레비젼 인터넷 이동통신 등은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그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삶은 미개한 것으로 간주된다. 부추김과 떠밀림으로 사람들은 시대에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살아간다. 대중문화는 속도감있게 전개되는 변주곡이다. 그럼으로써 잠시만 대중문화에 신경으 쓰지 않는다면 금방 대중문화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들은 정치니 사상이니 공공의 복리니 하는 거대하고 심미적이고 깊이있는 성찰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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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읽기 혁명 - 왜 지금 언론개혁인가?
손석춘 지음 / 한겨레출판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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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포함한 매스미디어를 통한 언론은 인류사의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개인적 삶이 공동체적 삶으로 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에서 매스미디어의 등장은 혁명적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매스 미디어를 두고 공동체적 삶을 통한 진정한 삶의 해방에 대한 지평을 마련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대한 회의와 언론의 개혁을 통해 그러한 회의를 극복해 보려는 의지에서 손석춘의 글은 쓰여졌다.

한겨레신문의 여론 매체부장으로 있는 손석춘은 송건호, 김중배, 리영희의 계보를 잇고 있는 진보적 언론인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의 글들은 철저한 대중 지향성을 보여주는데, 족벌.재벌언론의 폐해를 고발하고 신문사의 소유구조를 비판함으로써 편집권의 독립과 건전한 언론구조를 정착시키기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언론개혁의 주체가 언론 노동자들 자신이어야 함을 역설하고 수구적인 보수세력들의 반동적 행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던진다.

언론을 움직이는 것은 언론 수용자들이 아니라 정치권력과 자본이다. 이 명백한 부조리에 대해 우리 지식인들은 어떻게 대항하고 있는가! 대항은 커녕, 언론에 기생하면서 자신의 기득권에 안주하고 지적 헤게모니를 유지하는데 급급한 것이 오늘날 대다수 한국 지식인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완전히 저버릴 수 없는 것은 양심적이고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힘겨운 투쟁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데에 있다. 그들의 투쟁이 지성보다는 의지와 감성에 치우치고 있다는 현실적 한계는 분명하지만 우리 사회의 비판적 담론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없는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논리를 찾아내고, 억압적 현실의 그림자를 걷어내려는 다부진 의지가 절실하다. 희망을 잃지말고 절대적 신념을 견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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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란 무엇인가 - 성공회대 NGO총서 1 NGO NPO 시리즈
김동춘 외 지음 / 아르케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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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비정부 기구가 있어온건 오래전의 일이지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하게된건 최근의 일이다.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NGO의 위상과 자리매김을 재고하게한 전환적 계기가 된었다. 이런 사회적 여건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NGO단체들의 선구적 실천이 지속되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은 NGO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정립이다.

대학에 NGO관련 학과가 생겨나고 있음은 바람직한 현상이고 각종 학술 세미나에서 NGO의 위상과 역할 그리고 실천논리에대한 다각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고무적이다.

'NGO란 무엇인가'는 바로 그러한 바람직한 노력의 연장선에서 국내에서는 최초로 NGO대학원 석사과정 개설한 성공회 대학교의 'NGO총서'의 한권이다.

김동춘, 조희연 교수는 진보적인 사회학을 추구하는 지식인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분들이다. 새로운 전환기의 논리로서 '시민사회'의 한 장을 이루는 NGO에 대한 학문적 천착도 그들의 진보적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든다. 시대의 부침에 따라 변절해가는 지식인들이 유독 많은 곳이 우리나라가 아니던가?

기업부문과 정부부문과는 또다른 영역인 이른바 제3섹터라 불리는 NGO는 시민사회의 '다원적 갈등과 연대, 헤게모니 투쟁'을 통해 정치 권력인 국가(정부)와 경제 분야의 자본주의적 권력을 행사하는 시장의 논리에 다원적으로 참여할 수있는 민주적 공공기구이다.

비정부 기구는 인권, 환경, 여성, 구호 등의 공익적 사안들을 카테고리로 하면서 자기이익을 배제한 자발적인 성격을 가진다. 요즘은 전세계적인 글로벌NGO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UN과의 협조와 세계 각국의 NGO들과 연대를 통해 건전한 인류애를 발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60년대 이후 군부독재의 억압적인 정치상황으로 인해 민중민주, 민족 해방등의 반체제적 민중운동이 주류를 이루다가 87년의 6월항쟁을 기점(조희연 교수의 3단계구분론을 참조)으로 시민사회의 다원화된 운동으로 분화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러한 과정은 역사전개에 있어 민중의 기대치를 어느정도 반영한 긍정적인 변모라고 할 수 있다.

89년에 설립된 경실련은 기존의 민중해방 운동의 과격성 혹은 경직성을 비판하면서 한국NGO의 세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중산층의 논리를 대변하는 경실련의 한계는 그 후 참여연대와 같은 좀더 다층적이고 포괄적인 NGO들응 생겨나게 했다.
NGO들의 이러한 성장은 독재정권에 맞섰던 민중의 투쟁이 없었더라면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이제 건전한 시민사회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적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인간 해방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파트너로서 인정할 수 있어야 겠고, 재정적인 튼실함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는 건전한 공적 집단으로서 NGO의 자리매김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그리고 세계의 NGO들로부터 배우고 익힌다든가 연대를 하는것도 좋은 일이지만 우리 나름의 특수성과 창조적 자주성을 따지고 둘어서 우리 나름의 NGO문화를 창안해 낼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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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분단체제
백낙청 지음 / 창비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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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에는 '사상계'를 잇는 지성사의 대표적 잡지인 '창작과 비평'을 창간했고, 70년대에는 '민족문학론'을 부르짖던 백낙청 교수가 이제는 '분단체제론'이라는 거대하지만 적실한 담론을 천착하고 있다.

문학권력에 대한 논의에서 백낙청과 창작과 비평이 여러 논자들로부터 타당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백낙청의 행보는 정체되거나 변질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기보다는 민족의 세계화 내지는 세계의 민족화라는 문제를 끊질기게 탐색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대의 추이에 따라 또는 전단계 논리의 극복을 위해 새로운 단계의 논리로 적절한 관심이동을 보여주었다.

백낙청의 변질을 지적하는 인격적 비판은 소모적이다. 적실하고 생산적인 비평이 되기위해서는 그가 내 놓는 담론에 대한 합당한 논의를 이끌 수 있는 비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백낙청이 제기한 '분단체제론'은 한국의 분단현실을 열국체제를 상부구조로하고 있는 '세계체제'의 하위체제로서 '상호대결하면서도 묘하게 공생하는 남북의 기득권세력들과, 기본적으로 반민주적이고 비자주적인 이 범한반도적 체제에 억눌리는 남북의 민중들을 <모순의 대립항>으로 보'(202쪽)는 거시적 담론이다.

백낙청은 남북의 분단상황을 단순한 이념대립 혹은 국가간의 대립으로 보는 기존의 분단현실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세계체제의 일부로서 남과 북은 완전한 국가라고 할 수 없고, 한 나라이면서 두 나라이고 두 나라 이면서 한 나라인 현실적 상황을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남과 북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분단체제라는 매개항을 거쳐 세계체제의 작동에 참여함으로써 국가로서의 뚜렷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데, IMF사태 도한 그러한 논리에 따라 분단체제 안에서는 경제성장 또한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현실을 옭아매고 있는 분단체제는 민중의 주체적인 주도로 극복되어야 하는데, 분단체제의 극복은 세계체제의 변혁에 이바지하게 된다. 이는 민족문학이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한 문학이면서 세계문학의 기여한다는 '민족문학론'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세계적 시각에서 분단체제를 고찰함으로써 분단현실을 구조적으로 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리고 분단체제론은 영성, 환경, 인권 등의 다른 문제적 담론과 연대가 가능하고, 또한 근대극복론, 민족문학론과돞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

또 한가지 백낙청 교수가 제안하는 것으로 '다국적 민족 공동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해외 교포들까지를 포함한 남과 북의 동포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세계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분단체제를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백낙청의 담론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이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면서 다른 담론들과 조화롭게 연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완결이 아닌 생성의 담론으로서 계속 논의되고 다듬어지면서 그때그때의 현실에 다라 적절한 변화도 기대할 수 있는 탄력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백낙청 교수의 진보적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나는 나대로 '분단체제 극복운동의 일상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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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스틱스 - 또는 21세기의 역사적 선택들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백영경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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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의 조어 '유토피스틱스'는 토마스 모어가 창안한 '유토피아'를 비판하고 성립한 개념이다. '유토피아'란 것은 말 뜻 그대로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허무하고 공상적인 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유토피스틱스'는 처음부터 공상적인 이상을 설정하지 않고, 그러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지적 가능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세계체제론'으로 잘 알려진 월러스틴은 백낙청과 창작과 비평에 의해 국내에서는 널리 소개되어 있는데,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월러스틴은 이 책에서 근대세계의 혁명들(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등)은 환멸만을 낳았으며, 오늘날의 현실은 '어려운 이행기, 또는 지상의 생지옥'이라고 규정하면서 '가능한 역사적 대안의 탐구'로서 '유토피스틱스'를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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