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미나의 병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27
하비에르 세르카스 지음, 김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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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사건을 덮자는 권유를 듣게 된다. 이쯤 되면 시비를 가리는 것은 ‘따지는’ 것이 되고 성가신 일이 되는 것이다. 스페인도 그러했다. 내전과 독재, 왕정 복고라는 현대사를 거친 그들은 과거사를 정리하고 청산하기 보다는 학살 등의 문제를 덮기로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들이 지쳤기 때문이리라. 공화정을 핍박하고 학살했던 이들은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며 공화정을 수호했던 이들의 영광 역시 그러했다. 이를 ‘민주화 이행기’라 한다.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살라미나의 병사들』은 내전과 독재, 이행기를 거친 90년대의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상흔이 남은 역사를 더듬어 진정한 영웅을 찾아내는 기록이다.

 

소설은 세르카스 본인의 목소리로 진행되는데 역사와 실존인물들을 바탕으로 하며 작가의 삶 또한 함께 진행되는 메타픽션이다. 20대 후반 첫 소설을 출판한 후로 이렇다 할 작품이 없는 작가는 곧 마흔이 된다. 하는 수 없이 신문사로 복직하고 라파엘 산체스 페를로시오를 인터뷰하는데, 그의 아버지 라파엘 산체스 마사스가 내전 중 총살 현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공화파 병사가 마사스를 살려줬다는 것이다. 이 기이한 이야기를 제외한 적당한 기사를 써 낸 세르카스는 얼마 후 독자들의 생각이 담긴 편지를 받는다. 그 중 눈길을 끈 것은, 다른 생존자가 있다는 편지였다. 기자는 이 독자에게 연락하고, 마사스의 일화에 등장한 ‘숲속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인 피게라스의 아들을 만나게 된다.

 

라파엘 산체스 마사스는 나쁘지 않은 문인이라는게 당대의 평가였지만 내전을 일으킨 열렬 팔랑헤 당원이기도 했다. 흥미를 느낀 작가는 1939년 1월 30일, 마사스가 총살현장에서 달아난 전후 며칠을 더듬어 간다. 세르카스는 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프랑코 체제와 마사스의 작품을 다룬 학자와 교수, 그의 지인들을 만난다. 결정적인 증언을 한 이들은 마사스를 숨겨주었던 마리아 퍼레, 안젤라츠, 피게라스였다. 특히 피게라스는 마사스가 남긴 수첩(일기와 같은 기록)을 제공함으로써 시간적 순서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작가는 기억과 증거(수첩)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면밀히 살핀다. 1부는 사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며 2부는 마사스의 삶의 궤적이라 할 수 있다. 3부는 글을 완성했지만 부족한 부분, 그 한 조각을 찾지 못해 작품을 포기하려 하는 세르카스의 이야기이다.

 

원래의 목표는 총살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산체스 마사스의 전기를 쓰되, 그의 인물됨을 재평가하는 것이었다. 그가 대표했던 팔랑헤주의, 당을 이끌었던 소수의 미친 동기(자기집단의 특권과 안위를 위한 이기심으로 파시즘을 추앙)에 대한 평가를 제기하고자 한 것이다. 글쓰기를 중단하고 다시 신문기자로 돌아간 세르카스는 로베르토 볼라뇨를 인터뷰한다. 칠레의 그 작가가 맞다. 볼라뇨가 생각하는 영웅관, 그리고 그가 젊은 시절 캠핑장에서 만난 미라예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세르카스는 미라예스라는 인물이 자신이 잃어버린 조각이라 직감하고 그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세르카스가 미라예스를 등장시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산체스 마사스를 살려준 그 무명용사가 미라예스라 생각했기 때문에?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볼라뇨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 ‘영웅관’을 보자면 이 소설은 ‘망각 협정’과 그 수혜자들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스페인 사회에는 내전에서 승리한 자들의 목소리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산체스 마사스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공화파 병사의 아량으로 살아남은 그는, 붓으로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내전에 참전하게 했고 프랑코가 파시즘을 이용, 스페인을 독재하게 도와준 인물이나 마찬가지다. 내전 종료 후, 프랑코에 맞서지도 않고 동조하지도 않은 채 칩거하며 문예활동에만 몰두했다. 마사스는 팔랑헤의 상징으로 평안한 삶을 살다 죽었다. 그와 대척점에 위치한 미라예스의 삶은 어떠했던가. 그가 지금 스페인이 아닌, 타국에 홀로 남은 모습마저 묘하게 우리 현대사와 오버랩된다...

 

현 스페인 사회는 미라예스로 상징되는, ‘망각 협정’의 결과 의도적으로 잊혀진 무명용사들에 빚을 지고 있다. 미라예스의 ‘기억’에 대한 술회는 민주화에 대한 용사들의 공적을 떠올리지 않는 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현재 우리 삶과 사회를 돌아볼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영웅의 행동에는 거의 언제나 뭔가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있습니다. 뭔가 자기 본성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지요. 게다가 사람은 평생토록 기품있는 사람이 될 수는 있으나, 지속적으로 숭고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웅은 단지 예의적으로 어느 한 순간만 영웅인 것입니다. (193쪽)

 

그들을 아직 기억하는 이유는 비록 그들이 죽은지 60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미라예스가 그들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 매달려 있는 건지도 모른다. 완전히 죽지 않기 위해서. (266쪽)


비록 이 엿 같은 나라는 아주 하찮은 마을의 아주 하찮은 거리 그 어디에도 미라예스의 이름을 붙이지 않을지라도, 내가 그의 이야기를 전하는 한 미라예스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 살아 있게 될 것이고,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한 가르시아 세게스 형제―주안과 렐라―, 미겔 카르도스, 가비 발드리치, 피포 카날, 고르도 오데나, 산티 브루가다, 조르디 구다욜 역시, 비록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죽고, 죽고, 죽고, 죽어 있었지만, 계속 살아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나는 미라예스와 그들 모두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피게라스 형제와 안젤라츠에 대해서도, 마리아 퍼레와 나의 아버지, 그리고 볼라뇨의 젊은 라틴 아메리카 친구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리라.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체스 마사스와, 마지막 순간 문명을 구원한 그 소수의 병사들에 대해서도 말하리라. 그 소수의 병사들에 산체스 마사스는 끼일 자격이 없지만 미라예스는 자격이 있다. 또한 생각하기도 힘든 그 순간들에 대해, 전 문명이 한 사람에게 달려 있던 그 순간들에 대해, 그 사람에 대해, 그리고 문명이 그 사람에게 지고 있는 부채에 대해 이야기하리라.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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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5 1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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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5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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