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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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훌륭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스밀라라는 이누이트 족 혈통의 여인이 등장한다. 그는 수학과 과학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눈(雪)을 읽을 줄 안다. 옆집 소년 이사야의 죽음이 의뭉스럽다는 것도 눈을 읽을 줄 알기에 알아낸다. 결국 이 소설은 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의 이유를 밝혀내는 추리소설인데, 단순히 이렇게 요약하기에는 600p 가량의 이 소설이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수에 대한 매력적인 은유, 덴마크와 그린란드 사이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 선박과 빙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그러면서도 여러 사람을 만나고 정보를 수집하며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내는 (?) 추리 소설 본연의 재미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어학 시간에 이누이트 족은 눈에 대한 몇십 가지의 단어를 가지고 있다 어쩌고 하며 항상 배우곤 하는데.ㅎㅎ 이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눈에 대한 몇 십 가지 단어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인생은 어떻게 우리와 다른 것인지. 소설을 읽으면 비로소 알 수 있다.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스밀라라는 주인공이 무엇보다 매력적이고, 스밀라가 냉소적으로 판단하는 주변 인물들의 묘사도 재미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눈이 내리는 코펜하겐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리공이 끓여준 '극동의 맛' 이 나는 차를 마시고 싶어졌다.

(+) 역자가 소설리스트 필진이었던 박현주씨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역자의 말도 근사하다. 박현주씨가 번역했다는 이유로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들을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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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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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 유명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봄밤>이 실려 있는 권여선의 소설집. 문창과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의 꼭 읽어야하는 단편소설 모음 리스트에 항상 <봄밤>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왠지 내겐 꼭 읽어봐야겠다는 부채감을 안겨주던.

 

<안녕 주정뱅이>라는 제목이 알려주듯 모든 단편이 술과 관련돼 있다. 술이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건지? 소설가 본연의 임무는 관찰이라고들 하지만.. 권여선은 유독 집요하게 일상의 단면을 응시하고 세밀하게 관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핏 소설과 연관되어 있지 않아보이는 그 응시와 관찰만으로 무언가를 전하는 공력이 대단하다. 몇몇 단편에서는 <레몬>에서 느꼈던 스릴러의 기운. 서늘함도 엿보였다. 특히 악에 바친, "내 탓이 아닌데 어쩌라고" 식으로 세상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는 인물들을 너무 잘 그려내는 것 같다. 저자가 인간 그 자체를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애주가임을 고백하는 작가의 말이 웃기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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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전(傳)을범하다
이정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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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설을 입체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익히 아는 <심청전>, <춘향전>부터 다소 생소한 작품까지 두루 다룬다. 저자가 대개 비판하고 있는 건 지배 이데올로기다. 여러 판본을 넘나들며 텍스트에 드러난 지배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신랄하게 짚고, 현실사회의 문제와 연결지어 분노한다.. 난 춘향전이 역시 제일 좋다. 월매, 방자, 변사또 모두 춘향의 사랑을 방해했건만 춘향은 꿋꿋할 정도로 제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다. ( 이 이유없는 지고지순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주변인물들의 욕망과 대비되는 춘향의 욕망이 짜릿할 정도로 근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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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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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마음산책 말들 시리즈. 격하게 시리즈 모든 책을 갖고 싶다.

올해는 수전 손택을 꼭 읽겠다 다짐하고, 다짐을 지키기 위해 이 책을 샀다. 인터뷰집이니 조금 더 만만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작가를 잘 모르고 작가 인터뷰 읽으면 재미없듯, 이 책도 인터뷰어 조너선 콧이 언급하는 손택의 저작을 잘 모르니까 둘의 대화를 구경하는 느낌만 든다. 옮겨적고 싶은 근사한 문장들은 많았지만, 문장의 의미가 내 온 몸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너선 콧의 서문이 진짜 근사하다. 조너선 콧은 이렇게 썼다. “(...) 그녀는 고고하게 학자연하거나 생색내는 기색 하나 없이, 슈프림스에서 시몬 베유까지, <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 같은 영화에서 <뮤리엘>까지 광범한 주제를 신나게 넘나든다.- 손택은 흔들림 없이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양 진영 모두에 대해 충성심을 지켜왔다. 저서의 3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그녀는 직접 말했다. “내가 만일 도어스와 도스토옙스키를 놓고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근사하지.. 문헌학적 텍스트 사이를 자유롭게 종단하고 횡단하는, 정말로 내가 되고 싶은 그 어딘가다. 다음 달에는 꼭 <타인의 고통>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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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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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도서관에 꽂혀있던 이 책의 표지가 나를 따라다녔다. 이제야 이 책을 읽는다.

소설가가 자전적 이야기라고 밝힌 소설이라도 항상 작가와 작품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살펴봐야 한다고 본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픽션이니까. 막 작가한테 소설을 들이밀구 이런 이야기를 소설에다 썼으니 당신, 이러이러한 사람이군요? 짐작하는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해받는 작가들도 곤혹스러울 테다. 그런데 그러지 않기는 쉽지 않고.. 나도 (심지어 자전적 이야기라고 밝힌 소설이 아닌데도!) 텍스트를 읽고 이 작가가 이런 경험을 했구나 그냥 짐작해 버린다.

이 소설은 앞의 경우와 달리 소설 속에 사용된 여러 장치 (작가와 연을 맺었던 인물, 초기 작품의 제목이 그냥 언급된다던지) 또 작가의 말을 통해... 작가의 리얼한(?) 자전적 소설이구나 혹은 작가가 그렇게 읽히길 의도했구나 싶긴 했지만...

나는..그냥 좋았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어휘력) 중견 작가가 된 ‘나’가 공장을 다니며 외딴방에 살던 유년기를 돌아본다. 터무니없는 노동환경에서 얼토당토 않은 시급을 받으며 일했던 시절. 아무것도 몰라서 그랬을 수 있었던 시절. 마음 속 어둡게 잠겨 있어 다시 꺼내보기가 망설여지는 그 시절을 힘겹게 글로 옮긴다. 어떻게 해도 그 시절을 완벽히 복원하고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쓰고자 하는, 인물이나 이야기에 마음이 약해진다.. 또 너 소설 한 번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던 담임쌤. 누군가의 마음을 환히 밝혀주는 한 마디 덕분으로 글을 쓰게 되는 이런 이야기도 좋다. 이런 이야기는 읽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것이다..(내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는 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서 문학상이나 신춘문예 심사평만 휘휘 넘겨보는 거다. 왠지 마음이 뭉클해지며 글이 쓰고 싶어진다..)

해야 하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다들 소설을 쓰고 소설가가 되는 것이라면, 이 책은 작가가 흘러나오는 문장을 참을 수 없어서, 이 책을 완성해야지만 무언가 끝난다는 걸 알아서 썼다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진솔하고 단단하고 절실하다. 신경숙의 쏟아져 나오는 문장들, 이 빙빙 도는 느낌, 말을 마구 늘어놓는 느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이 있다는 걸 알지만 <외딴 방>은 문체 덕분으로 더 빛이 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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