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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평전 - 경험하고, 생각하고, 사랑하라
사만다 로즈 힐 지음, 전혜란 옮김, 김만권 감수 / 혜다 / 2022년 9월
평점 :
절판
<한나 아렌트 평전>은 태어나면서 부터 죽음까지 시간의 순서로 서술하면서 일화소개 및 시간의 순서에 맞게 저작들을 중심으로 학문이나 사상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유명한 다른 작가인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을 바로 읽어 보며 이 책에서 가장 난해하며 현재도 진행중인 <전체주의의 기원>,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따라서 어려운 말이 나오는 악의 평범성이나 용서와 화해등 사적인 상황과 공정인 상황을 분석한 내용을 따라서 여행 해 보고자 한다.
<그림자>, <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 < 전체주의의 기원>, < 아모르 문디>, < 과거와 미래 사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혁명론>등 저서를 따라서 한나 아렌트의 일대기를 추척하고 설명하는 식으로 책은 구성되어 있었다. 통상 평전이면 저서는 덤이고 일대기가 주를 이루는 것이 많은데 이 책은 남긴 저서들을 각 시대별로 흐름에 맞춰 분석하면서 하고자 하는 말을 추적하는 책이다. 다른 책보다 <전체주의의 기원>,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작품은 아직도 진행중인 논란의 책인듯 하여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을 참고로 추후에 따로 구입하여 보고자 하는 마음이 든다.
<전체주의의 기원> 서문에서 한나는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유감스러운 사릴 중 하나는, 유대인의 문제가 정치적 문제임을 적군은 알았으나
정작 유대인 친구들(유대인 자신들)은 몰랐다는것이다.
책속에서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으면 이에 항의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는 이를 " 권리를 가질 권리"로 공식했다. 한나는 유대인 전선을 원했고, 여러 국가에 흩어져 사는유대인들의 연대를 바랐다. (157쪽)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 다르며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근본적 특징을 말하며, 사유하는 방법, 즉 행동을 멈추고 최근의 경험과 내마음속 두려움, 욕망을 바탕으로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을뿐이다. 젊을때 읽었던 철학책이나 사상서 처럼 난해한 책이기는 하다. 저서와 일화를 따라서 하는 여행이다 보니 전체적인 줄거리라 단편적으로 흐르는 부분도 있고, 저서의 내용을 이해를 위한 방편으로 이곳 저곳에 분산시켜 이해력을 높이려 한것은 알겠지만 혼란스러움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나는 독자들이 반대유대의 역사를 읽으면서 현대의 반유대주의가 제국주의
및 인종차별주의와 어떻게 결부되는지 바라 보기를 원했다.
인종 편견은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고, 열강들은 이 이데올로기를 무기화해서 땅을 빼앗고 자본과 노동을
착취하는 정치적 폭력의 도구로 삼았다. 인종편견은 인종차별주의로 변모했고, 인종차별주의는
자신을 향한 인종차별적 언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될 정도로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다.
한나는 전체주의는 권위주의나 폭정, 파시즘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개개인을 철저히 개별화하고
자발성을 없애는데 기초 한다고 주장 했다. 공포를 도구로 이용하고 강제수용소를 짓는 행위야 말로 가장
잘 보여 주는 요소들이다. 한나는 강제 수용소와 절멸수용소가 무서운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 어쩌다 살아 남는다 해도,수감자들은 죽음으로 세상과 단절되는 것보다 더한 단절을 얻는다. 공포가 망각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한나는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의 공유를 구분하고 각자 개별화되고 자발성이 없는 공포앞에서는 무력하고 함께 하지 못하기에 타인과 개인을 분리하고 분리된 개개인은 다른 모두가 적이되는 경험을 하게 하기 때문에 한나는 전체주의를 비판한다.
전체주의가 사람을 고립되고 외로운 개인으로 만드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체계적으로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공포가 확산될 때 힘을 얻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마주했을때
분별있게 판단하거나 생각하지 못하면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가 없다.
전체주의가 개개인의 사유능력과 사회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기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공적 공간에 맞춰서 사적인 공간은 파괴되고 없어진다. 개인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고립되고 외로움에 처하면 그 무엇이 가짜이고 진짜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지적하였다. 한나의 외로움은 사유의 필수 조건인 고독의 공간을 파괴하기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전체와 분리된 개인이 존재하지만 전체에 묻혀 개인은 철저히 고립되고 개인의 공간은 공적인 공간에 모든 것을 잃어 버린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무섭고 잔인한것은 알지만 인용문을 보면 정말 소름끼치게 무섭다. 우리의 삶이 개인적인 공간과 사적인 정신까지 통제하기에 모든 것이 저 문장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무섭기도 하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직도 논쟁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이제는 고인이 되었기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한계인지 그 명확성을 판단할 수 없지만 평전을 쓴 저자는 그 논란의 근거를 찾아 간다. 유대인의 정체성은 인정하고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민족과 국가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면을 보였던 한나 아렌트이지만 논쟁이 진행중이라는 것에는 공감한다. 예전 다큐멘터리 영화로 같은 내용을 본 기억이 생각난다. 그 다큐멘터리에서 아이히만은 정정당당했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큰소리 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책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내용을 이해 할 수 잇는 것보다 혼란스러운 모습이 보이기는 한다.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문제를 인간의 사유와 결부하여 풀어내려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한나가 하고 싶었던 말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판결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재판 자체는 기록을 제공하고 개인에게 증언 기회를 주려는 목적에서 이용되었다.
증거와 법 위반을 증명하는 증언을 통해 개인의 행동들을 심리하는 것이 재판의 목적이라면
아이히만의 재판은 실패했다.아이히만은 엄밀히 말해서 법도 위반하지 않았다.
그저 생기지 말았어야 할 법을 따랐던 것 뿐이다.
인용문속에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집단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것만이 그의 죄라는 것이다. 아이히만에게는 타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상상하는 능력인 포괄적 상상력이 결여 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238쪽) 집단에게 필요한 모든 조건을 수행하면서 개인이 분별력있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개인적인 영역의 사유가 부족하다는 것이 핵심이라 생각한다. 다큐멘터리 아이히만 영화를 보면 분노가 일어나고 정당성을 외치는 모습에서 정말 할말을 잃어버리는 개인이 되는 상황에서 한나 아렌트는 집단에 빠져 생각과 분별력을 잃어버린 개인의 광대같은 모습에 그저 한탄을 할 뿐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유대인이나 아이히만이나 존재한다는 악의 힘인지, 선의 힘인지만 구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율이 일기는 한다.
전체주의 이전의 도적적 판단 범주는 전체주의가 등장하면서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에 한나의 판단으로는,
아이히만은 사회의 규범적 도덕질서를 위한한 것이 아니다. 한나는 개인의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더욱더
구분하면서 유럽에서 개인의 판단이 전반적으로 어떻게 불가능해 졌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선에서 어떻게
모두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사상가가 아니라는 생각에는 많은 이견이 있을 것이다. 법적문제와 도덕적 문제를 구분하며 행동에 대한 책임과 판단력의 정당성에 대한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정말 무섭게 다가 오는 문장을 인용해 보고 싶다.
법적 문제와 도덕적 문제의 구분은 한나가 사유와 판단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빅에 중요했다.
엄밀히 나치 정권 아래 자행된 모든 일은 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아이히만은 일반적으로 기소될 만큼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한 행동은
명백히 잘못이엇다. 잘못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법적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문제이다.
이해를 하면서도 유대인이라는 민족과 악의 축이었던 사람의 관계를 서술한것을 보면 정당하지 못했던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이 정말 흥미롭다. 이렇게 생각해본것이 휴먼카인드라는 책에서도 비슷하게 전개 되었지만 학자로서 그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훌륭하였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잘못이라고 전혀 없는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아이히만처럼 모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한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담한 자들과 저항을 선택한 자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답은 사유였다.
가담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스스로 사유라는 것을 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가치 체계를 가졌거나,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전체주의의 이전 판단 척도를 여전히 따랐기 때문이다.
쟁점의 논쟁은 한나가 유대인을 대표하는 학자이고 대변하려는 존재로 인식가능하지만 유대인 단체가 보기에는 오히려 자신들을 공격하는 대상이 한나 아렌트라는 생각으로 이견과 부정적인 생각으로 한나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나는 비평가들이 대부분 이 책을 읽지 않았다고 썼다. 이들이 거부한 건 책의 내용이 아니라
한나의 반어적 어조였다. 가장 최악인 것은 한나가 틀렸음을 입증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이 책에서 한나가 주장하는바는 살펴 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중략>
한나가 깨달았듯이 공적 영역에서 내 경험과 관련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진실을 말하는 자들은 집단적 경멸의 대상으로서 언제나 정치 영역의 바깥에 서 있다.
정의는 언젠가는 승리한다는 명제는 유효하다. 법적인 잘못이든 도덕적인 잘못이든 그것을 입증하고 개인의 잘못과 집단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되풀이 되지 않게 하려면 정말 그 당시 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독일은 잘못을 인정하고 늘 반성하는 정치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당시의 먼지를 털어 버리려 노력하고 있다. 집단에 가려진 개인의 잘못이거나 개인의 잘못이 집단의 잘못으로 인식되는 그 당시의 모든 상황을 비춰보면 증명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책 내용의 중간 중간 인용문의 내용처럼 반어법적이고 논리적이고 사상적이고 학문적인 방법으로 입증하려고 하니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 당시 악의 축이었던 대상들에게 " 그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는 악엿다"나 그냥 육두문자는 아니지만 나쁘다는 표현을 학술적으로 풀어 냈다면 논란의 대상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과 집단 및 개인의 생각과 분별력, 판단력 및 그에 따른 행동에 대한 잘잘못을 인정하고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사회가 해야 할일과 국가가 해야 할일, 개인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명제로서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사유"는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국가나 사회는 준거로서 행동의 기준을 바로 정하고 개인은 준수를 통하여 사회성을 길러야 하기에 그 준거를 만드는 집단의 깊은 사유에 의한 사회와 국가를 올바르게 유지하기 위한 법과 질서체제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개인은 당연히 준법정신으로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책인듯 하다.
학술적인 부분이 많이 포함된 책이라 조금은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개인적인 일화를 통하여 개인적인 감정과 화해를 이해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고, 공적인 부분에서 공적사고와 공적인 공간에서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를 제시하고 홀로된 개인이 아니라 함께하는 개인들의 공감대를 엮어내는 공론의 책으로 정말 적합 한듯하다.
< 이 리뷰는 출판사로 부터 책을 제공받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