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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ㅣ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1947년, 긴자거리의 유명한 보석점 ‘천은당’에 완장을 찬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근처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며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방약을 마시도록 한다. 청산가리. 남자는 유유히 금품을 털어 달아난다. 작품 초반부에 작중화자를 통해 소개되는 이 ‘천은당 사건’을 접할 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될까. 이렇게 단순한 속임수에 13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속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치고 올라올 듯 하다. 그만큼 무리수가 있어보인다. 하지만 이 소설이 1948년 ‘제국은행 사건’이라는 실화를 모티브로 한다는 걸 알고 있고, 당시가 전후 상황임을 다시한번 깨닫고 난 후엔 사정이 다르다. 이 소설에 무척이나 여러번 언급되는 ‘기묘한’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할 만큼 어쩔 수 없는 오싹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아마 그것은 어떤 속임수이든, 뻔하든 교묘하든 간에 속이고자 하는 사람이 능숙하게 해내기만 한면 못할 게 무어랴? 하는 무법한 생각 때문인듯.
하지만, 잠깐, 천은당사건에 놀라고 있을 틈이 없다. 천은당 사건은 화자인 탐정 코스케의 주목을 끈 일련의 사건들의 도화선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전후 몰락해가는 귀족 계급의 혼란상과 맞물려 츠바키 자작가의 음울한 사건들이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다.
의뢰인의 방문으로 사건을 쫓게되는 탐정 코스케의 행적을 따라 열심히 두뇌 싸움을 벌여도 곳곳에서 이에 무색하게 밝혀지는 반전들.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솓는다. 츠바키 자작가의 사람들이 자작의 사후에도 그의 생존을 의심하게 만드는 범인은? 자작을 죽음으로 까지 몰아넣은 수치라는 게? 화자인 코스케와 독자인 내가 동시에 이런 물음들을 쫓다보면 손에 쌓이는 실마리의 양만큼 어느새 사건은 종반부에 다다라 있다. 이 책은 탐정,의뢰인이 나오고 탐정의 시각에서 사건을 쫓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의 후기를 쓴다는 게 단순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라 이쯤으로 접고 책을 덮으며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아쉬움도 조금 토로해 보려한다.
뚜렷한 캐릭터를 가진 탐정에게 의뢰인이 사건조사를 맡기면서 시작되는 추리소설 이라든지,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단골소재인 일가의 음울한 사건들은 이젠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이야기 이다. 거기에 탐정 코스케의 역할이 열심히 사건의 뒤만을 쫓고 조금 늦은 감 있게 실마리를 풀어가는 중반부에 독자로서는 긴장감이 조금 떨어지는 면이 있다. 이미 완결된 사건이 아닌 진행될 수밖에 없고 진행되어야만 하는 사건의 특성상 중간에 위험한 앞지르기를 하거나, 너 범인이지! 할 수 없는 탓이리라. 박진감이 떨어졌다고 자그맣게 투덜거려 본다.
하지만 종반부에 들어 긴장감은 다시금 팽팽히 날이선다. 그와 더불어 사건이 종결된 마당에 알 수 없는 ‘화’한 감을 남겨놓는 것은, 그래도 무더운 여름날 재밌고 맛깔나게 읽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다. ‘화’라고 표현한 그것을 ‘연민’이라 고쳐야 겠다.
마지막은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에 대해. 제목이기도 하고 작품 전체에 음울한 배경을 부여하는 죽은 자작의 플롯곡. 이 곡을 빼놓고서는 후기를 마무리 할 수 가 없다.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에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이 곡은 사건의 어두운 면모만큼 작품전체의 검디검은 분위기를 지배한다. 이 책을 읽으려는 분들께 “이 곡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는 말을 처음부터 잊지 않고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권해본다.
참, 출판사 홈피에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플룻곡을 올려 놨다 하니 사건이 벌어지는 부분을 떠올리며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라면서 나는 아직 들어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