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코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았다>

 

 이상적인 가족.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편과 그의 우람한 어깨에 기대어 행복한 미소를 짓는 아내. 그들 사이에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아이들. 이런 이들만이 존재할 거라는 환상을 가진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완벽한 가족에 대한 이상은 깨졌다. 그리고 우리는 환상이 깨지는 것을 너무 많이 봤다. 유진 오닐, 에드워드 올비, 아서 밀러, 도리tm 레싱 등등. 완벽한 가족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려고 투자했던 시간만큼 이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려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들의 작업이 실제로 그런 이상이 허상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지라고 현대에 사는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봐온 우리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작가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을까 고민하지 말자. 왜냐면 예술이란 목적론에 입각해서 바라보면, 즉 작가의 의도에 맞게 그것을 읽어버리면 광고지와 비슷해져버리니까. 하나의 목적이 없다는 것,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수많은 목적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예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팔코너, 데카르트의 좌표>

 

 마약중독자에 형제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를 보기 전에 공간을 바라보자. 팔코너라는 교도소를. 이들이 여기 갇혀있는 이유가 뭘까? 죄를 지어서이다. 그런데 그들은 기존에 있던 법이라는 체계 자체를 무시하거나 파괴하거나, 어쨌든 그것들을 지키지 않았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갱생, 혹은 격리의 목적으로 가둔 곳이라면 그 곳은 좀 더 체계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팔코너가 묘사되는 부분들은 너무나 엉성하다. 일단 2가지 사실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조디의 탈출이다. 그는 감옥을 너무 쉽게 탈출한다. 그리고 두 번째가 더 월의 폭동 이후의 팔코너의 모습이다. 팔코너의 간수들은 두려움을 숨기지 못한다. 그들은 훈련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누군가의 선동이 있었다면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글을 읽는 내내 폭동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을 거라는 짐작을 계속 했다.) ‘허술’하다고 표현 할 수 있는 이런 곳에서 왜 죄수들은 탈옥하지 않는가? 무엇이 그들을 그곳에 있게 하는가? 데카르트를 가져와보자. (데카르트는 패러것이 교도소에서 유일하게 읽는 철학자이다. 왜 데카르트인가?) 그의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명제는 어떤 증거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명제이다. 그는 결국 자신이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명제를 찾고 그래서 과학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중세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그는 신을 포기해야 했으며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성에 의한 육체, 즉 감정의 통제이다. 그는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인간이 스스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을, 동물들은 그저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야 했다. 그래서 합리적 이성과 비합리적인 감정과 만나는 지점을 반드시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송과선’이다. 이는 정신(이성)과 육체(감정)이 만나 정신에 따라 육체가 통제받는 기관이다. 송과선이 바로 팔코너이다. 합리적 이성이 감정을 지배하는 곳. 팔코너에서는 모든 감정이 필요에 따라 분출되고 통제된다. 그들의 감정은 팔코너가 제한하는 이상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통제를 받으며 머물 수 있고 간수들은 그들을 안전하게 감시할 수 있다. 죄수를 통제하는 그 무엇은 폭력도, 억압도, 회개하려는 마음도 아니다. 합리적 이성이라는 이름이다. 그것들은 물론 죄수가 아닌 자들과 죄수를 분리시켜주는 것이기도 하고 죄수 스스로가 자신이 죄수라고 인식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팔코너에서 철저하게 죄수의 신분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어떤 것에 의해 통제된다. 그런 예들은 많지만, 정말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큰 사건은 패러것의 마약치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치킨이 말한다. “우릴 기니피그처럼 실험할 생각인 거야. 우리는 실험쥐라고. 예전에 후두염에 걸린 녀석이 하나 있었지. 새로운 약을 그놈한테 쓰더군. 이틀인가 사흘인가 연속으로 주사를 놨어. 하지만 의무실로 데려가기도 전에 놈은 결국 죽어버렸지.”

 

간호사가 친절하게 말한다. “우리도 자네가 언제 알아챌지 궁금했어. 자넨 거의 한 달 동안 가짜 약을 받았어. 이제 깨끗해진 거야, 친구.”

 

이 두 인물의 대사에서 차이점은? 앞의 것은 죽음을 뒤에 것은 치료를 의미한다는 것.

이 두 인물의 대사에서 공통점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무엇인가가 주입된다는 것. 즉 통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약이 치료된다는 것은 좋은 것인가? 적어도 패러것에게는 그렇지 않는 듯하다. 사실 그들에게는 그렇게 할 권한이 없다. 그들이 마약이 나쁘고 치료되어야할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떤 법적인 기준인데, 모순적이게도 패러것에게 ‘진짜’ 마약을 투여해야한다고 정한 것도 법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합리적인 어떤 것을 믿고 패러것에게 그것을 시행했고 패러것은 그것을 몰랐다. 그는 통제받는지도 모른 채로 통제받고 있었다. 이것이 팔코너가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통제하는 기준도, 통제받는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곳. 그러나 통제되는 곳.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