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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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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세 가지 단상이 떠올랐다. 우선 소년의 소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황순원의 소나기도 오버랩되며 안타깝고 먹먹했다. 소년과 소녀의 사랑은 너무나 짧기에 너무나 강렬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우리는 언제까지 그를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을까? 소년은 소녀를 찾아 다른 세계로 옮겨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소녀와 만난다. 과연 그것도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현실의 모든 걸 버린다는 것도 진정한 사랑일까?
둘째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다. 현실에서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없다.우리가 그림자를 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책에서 다른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버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나와야만 진정한 성장을 한다는 얘기일까? 쇼펜하우어는 삶을 고통이라고 했다. 우리는 행복을 꿈꾸지만 실상은 고통을 짊어지고 이 생을 사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무거운 짐도 내려놓고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그림자도 벗어놓게 되리라. 이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큰 만큼 그림자를 훌훌 벗어던지고 새로운 도시로 떠나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셋째 책 대신 꿈을 읽는 도서관이다. 현실의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이면서 가장 지적인 공간은 도서관일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순식간에 과거와 미래와 연결되고 시공간을 초월한 인류와도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아와 조우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에도 몰입할 수 있다. 미래의 도서관, 사후세계의 도서관에서는 우리는 책 대신 꿈을 읽게 되지 않을까? 작가의 상상에 깊은 공감이 되었다.
최근에 헌치백이란 소설을 아주 인상깊게 읽었다. 중증척추장애를 가진 샤카는 비장애인 여성처럼 임신과 중절을 꿈꾼다. 누군가는 샤카에게 수십가지 이유를 대며 비판과 만류를 할 것이며 누군가는 절망의 끝에서만 느끼는 공감과 지지를 보낼 것이다. 나는 샤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샤카에게 필요한 것은 사카 앞을 막고 있는 거대한 벽을 넘어 다른 도시로 당장이라도 미련없이 떠나게 할 사랑이리라. 그리고 지금의 불편한 육체는 언젠가는 미련없이 벗어버릴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저 벽 너머 도시에는 샤카를 위한 꿈을 읽는 도서관이 언제라도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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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07
레오 리오니 글 그림, 최순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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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유용한 것을 만든 이가 그것에 감탄하지 않는 한 그를 용서할 수 있다. 쓸모없는 것을 만드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에 열렬히 감탄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전혀 쓸모없다.” 프레드릭이 열심히 모아둔 햇빛, 색깔, 이야기는 사실 들쥐들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들쥐들은 프레드릭의 이야기 덕분에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행복한 감정을 느끼고 감탄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김동식의 회색인간은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 내몰렸을 때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하고 아귀처럼 먹고 지쳐 잠을 자고 아무 희망이나 기대가 없는 반복된 일상만이 반복될 뿐이다. 이럴 때 가장 빨리 도태되고 아웃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노래를 부르는 여인, 그림을 그리는 남자, 소설을 쓰는 청년처럼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들에게 돌을 던졌다. 이들이 죽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예술로 남겨주기를 원하며 예술가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그들의 몫까지 일을 떠맡았다. 예술과 문학은 어떤 상황에서도 쓸모가 있는 것이다.


물론 요즘엔 예술이 쓸모없다고 무시당하는 시대는 아니다크리스마스 즈음부터 연말연시가 되면 유명 가수들의 공연 플래카드가 도시 곳곳에 내걸린다. 공연날이 되면 도로가 마비될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다. 요즘 세상에는 인기만 있다면 가수나 소설가도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진다. 그들이 빵이나 자동차처럼 손에 만져지는 물건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을 감탄시키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에 몰두할 때 예술가들은 햇빛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힐문하지는 않는다.


문화와 예술과 스포츠가 거대한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현대에 색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프레드릭에 대한 새삼스러운 인정과 평가가 굳이 필요할까? 요즘 청소년들은 묵묵히 노동하는 들쥐들보다 상상과 창의성으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프레드릭을 당연히 더 추앙하지 않을까?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서 개미를 모범으로, 베짱이를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은 유효기간이 지난 옛이야기가 아닐까? 시대의 변화로 이제는 베짱이가 개미보다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변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프레드릭은 의미가 있는 그림책이다. 최근 수능에서 이과가 문과를 초토화시켰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문사철로 대표되는 문과는 문송합니다라는 자조섞인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사회에서 별 쓸모없다는 인식으로 자리매김했다취업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 바쁜 세상에 얇고 넓은 지식이 유튜브에 넘쳐나는데 그걸 왜 대학까지 가서 전공해야 하느냐는 인식이 있는 듯 하다.

 의대와 취업에 유리한 학과가 아니면 아이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성적에 맞춰 억지로 진학한다 하더라도 대충 졸업만 할 뿐 취업에 필요한 공부를 하느라 자기 전공에 몰두하는 이는 많지 않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정말 관심과 재능이 있어 그쪽 길로 정한 소수의 사람이나 그 과목 교사가 되어 취업하려는 실용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나 열심히 배울 뿐이다.

 

김현은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란 질문에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라고 말했다. 문학은 총도 아니고 칼도 아니기에 누구도 해치지 않고 빵이나 아파트도 아니기에 문학을 둘러싸고 아귀다툼이 벌어지지도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의 인생밖에 살 수 없는 숙명을 가진 인간에게 여러 삶을 경험하게 해 주고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무엇이 올바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합당한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프레드릭은 한 번 보고 말 어린이용 그림책이 아니다. 나는 프레드릭을 수시로 펼쳐본다. 프레드릭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당장 쓸모가 없더라도 당장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무언가 의미가 있을거야. 나중에는 도움이 될 거야. 좋은 음식, 좋은 차. 좋은 집에서 느끼는 행복감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눈에 보이는 쓸모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빠름과 효율이 중요한 시대에 노인이나 장애인을 배려하고 그들의 속도에 맞추는 데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나중에 더 큰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거다.

자기만의 소신과 신념을 가진 프레드릭과 그런 프레드릭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다른 들쥐들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프레드릭이 영웅이 되고 하나의 성공 아이콘이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프레드릭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다른 들쥐들에게 도움을 줬고 다른 들쥐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프레드릭도 물론 다른 들쥐들의 노동으로 일군 음식을 먹고 생존할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상상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가수나 화가의 아름다운 작품이 농부의 피땀어린 농작물보다 모자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뛰어넘는다고 할 수도 없다. 인간에게는 물질과 정신 둘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프레드릭>은 참 예쁘고 따뜻한 책이다. 몸을 움직여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들쥐들과 생각으로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프레드릭은 서로를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한다. 고마워하고 감탄하고 도와준다.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고 이 책은 말한다.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다. <프레드릭>은 우리는 결국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될 거라는 따뜻한 희망과 위로를 전해주는 그림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프레드릭이지만 프레드릭에게 진심어린 박수와 시인이란 영예를 안겨주는 들쥐들의 마음도 그들이 땀흘려 생산해낸 식량만큼이나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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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책 웅진 세계그림책 1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허은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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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면 이상한 가족사진 같은 그림이 있다. 엄마가 아빠와 남자 아이 둘을 업고 있는 그림이다.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이고, 아빠와 아이들은 만족스런 표정이다. 나는 이 표지를 보며 앙시앙 레짐 풍자화를 떠올렸다. 농민이 곡괭이에 간신히 의지해 허리가 90도로 꺾인 채 서 있다. 그의 등 뒤로는 성직자와 귀족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업혀 있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이익을 누리는 것을 표현하는 데 이 두 그림보다 효과적인 그림은 없을 것이다. 앙시앙 레짐 풍자화 밑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이런 장난질이 곧 끝난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피곳 부인 가족이 사는 집은 아주 멋지다. 정원, 차고, 차도 멋지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아빠와 아이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피곳 부인이라는 태양이 사라지면 그 모든 것들이 어둠에 휩싸인다는 사실이다. 엄마와 아내는 물이고 공기다. 아무리 멋지고 중요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물과 공기가 없다면 아무 소용없다.
피곳 부인이 참다 못해 집을 떠나고 남편과 아이들은 돼지로 변한다. "너희들은 돼지야!"라는 선언은 엄마와 아내의 가사노동을 당연시하고 도와주지 않는 가족들에 대한 분노와 비난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의 엄마, 아빠는 주인 없는 음식을 함부로 먹었다가 돼지로 변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도 잔혹한 독재자 나폴레옹은 돼지다. 우리는 왜 이렇게 돼지를 탐욕의 상징으로 단정지을까? 실제로 돼지는 우리의 오해와 편견과 달리 그렇게 더럽지도 멍청하지도 않다. 심지어 체지방률로 보면 그렇게 뚱뚱하지도 않고 둔한 동물도 아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좁은 우리에 갇혀 지내다 보니 여러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돼지가 [돼지책]을 보면 억울해 하지 않을까?
가끔 일부 몰지각한 남편들은 갑자기 필요한 물건이 집에 없을 때 아내에게 "집에서 놀면서 좀 사다 놓지 않고 뭐 했냐?"라고 말한다. 또 퇴근 후 집에 와서 다친 아이를 보면 "집에서 놀면서 아이 좀 잘 보지 않고 뭐했냐?"란 망언을 내뱉을 때도 있다. 전업주부는 일단 집에서 논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남편이 퇴근 후 편하게 지내다 재충전 후 회사에 간다면 그건 아내의 가사노동 덕분이다. 아이들이 집에서 마음 편히 쉬다가 학교나 학원에서 에너지를 쓸 수 있다면 그건 엄마의 돌봄과 희생 덕분이다.
하지만 [돼지책]에서 보듯이 남편과 아이들은 아내와 엄마의 가사노동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공기나 물처럼 공짜로 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19세기 중반 영국 런던에 해나 컬윅이라는 여자가 살았다. 그녀는 어떤 변호사의 하녀로 일하며 그의 청혼을 19년이나 거절한다. 그녀가 만약 변호사의 아내가 되면 그 순간부터는 무보수로 가사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왜 그런 손해보는 장사를 해야 하는가? 만약 여자들이 냉철하게 가사노동의 가치를 협상테이블에 올려놓는다면 남자들은 식은땀이 흐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여자가 사회에서 소득활동을 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019년 맞벌이 가구 가사노동분담 통계를 보면 남편은 54분인 반면 아내는 3시간 7분으로 나온다. 무거운 가구나 화분을 옮기는 등의 완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가사노동에는 여자의 섬세한 손길이 더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무조건 집안일을 반씩 나눠 해야 한다는획일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아내나 엄마의 가사노동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가족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까, 아내나 엄마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진정성있는 마음과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모딜리아니가 19살의 잔느를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을 때 잔느는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는지 물었다. 모딜리아니는 잔느의 영혼을 알고 표현할 수 있을 때 눈동자를 그리겠다고 답했다. [돼지책]에서도 피곳 부인이 혼자서 공짜노동의 멍에를 지고 있을 때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남편과 아이들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뉘우쳤을 때 엄마의 눈동자가 보인다. 엄마는 영혼을 찾은 것이다. 우리는 악마로부터만 영혼을 빼앗기는 것은 아니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 나의 영혼을 빼앗을 수도 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짐작조차 못한다. 피곳 부인처럼 사라져야만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반드시 요리는 엄마가 하고, 차는 아빠가 고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상황에 맞춰 하면 된다. 그 대신 다른 사람은 고마워해야 하고 도와야 한다. 엄마의, 아내의 소중하고 헌신적인 가사노동에 무임승차해서 누리기만 하는 사람은 돼지가 아니다. 그건 돼지에 대한 모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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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브라질 산타 루시아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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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고 부드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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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궁극 : 서평 잘 쓰는 법 - 읽는 독서에서 쓰는 독서로 더행의 독서의 궁극 시리즈 1
조현행 지음 / 생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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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궁극은 정신적 성장인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의 종착지가 서평쓰기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두껍지는 않지만 알찬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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