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책 웅진 세계그림책 1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허은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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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면 이상한 가족사진 같은 그림이 있다. 엄마가 아빠와 남자 아이 둘을 업고 있는 그림이다.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이고, 아빠와 아이들은 만족스런 표정이다. 나는 이 표지를 보며 앙시앙 레짐 풍자화를 떠올렸다. 농민이 곡괭이에 간신히 의지해 허리가 90도로 꺾인 채 서 있다. 그의 등 뒤로는 성직자와 귀족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업혀 있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이익을 누리는 것을 표현하는 데 이 두 그림보다 효과적인 그림은 없을 것이다. 앙시앙 레짐 풍자화 밑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이런 장난질이 곧 끝난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피곳 부인 가족이 사는 집은 아주 멋지다. 정원, 차고, 차도 멋지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아빠와 아이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피곳 부인이라는 태양이 사라지면 그 모든 것들이 어둠에 휩싸인다는 사실이다. 엄마와 아내는 물이고 공기다. 아무리 멋지고 중요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물과 공기가 없다면 아무 소용없다.
피곳 부인이 참다 못해 집을 떠나고 남편과 아이들은 돼지로 변한다. "너희들은 돼지야!"라는 선언은 엄마와 아내의 가사노동을 당연시하고 도와주지 않는 가족들에 대한 분노와 비난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의 엄마, 아빠는 주인 없는 음식을 함부로 먹었다가 돼지로 변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도 잔혹한 독재자 나폴레옹은 돼지다. 우리는 왜 이렇게 돼지를 탐욕의 상징으로 단정지을까? 실제로 돼지는 우리의 오해와 편견과 달리 그렇게 더럽지도 멍청하지도 않다. 심지어 체지방률로 보면 그렇게 뚱뚱하지도 않고 둔한 동물도 아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좁은 우리에 갇혀 지내다 보니 여러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돼지가 [돼지책]을 보면 억울해 하지 않을까?
가끔 일부 몰지각한 남편들은 갑자기 필요한 물건이 집에 없을 때 아내에게 "집에서 놀면서 좀 사다 놓지 않고 뭐 했냐?"라고 말한다. 또 퇴근 후 집에 와서 다친 아이를 보면 "집에서 놀면서 아이 좀 잘 보지 않고 뭐했냐?"란 망언을 내뱉을 때도 있다. 전업주부는 일단 집에서 논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남편이 퇴근 후 편하게 지내다 재충전 후 회사에 간다면 그건 아내의 가사노동 덕분이다. 아이들이 집에서 마음 편히 쉬다가 학교나 학원에서 에너지를 쓸 수 있다면 그건 엄마의 돌봄과 희생 덕분이다.
하지만 [돼지책]에서 보듯이 남편과 아이들은 아내와 엄마의 가사노동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공기나 물처럼 공짜로 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19세기 중반 영국 런던에 해나 컬윅이라는 여자가 살았다. 그녀는 어떤 변호사의 하녀로 일하며 그의 청혼을 19년이나 거절한다. 그녀가 만약 변호사의 아내가 되면 그 순간부터는 무보수로 가사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왜 그런 손해보는 장사를 해야 하는가? 만약 여자들이 냉철하게 가사노동의 가치를 협상테이블에 올려놓는다면 남자들은 식은땀이 흐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여자가 사회에서 소득활동을 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019년 맞벌이 가구 가사노동분담 통계를 보면 남편은 54분인 반면 아내는 3시간 7분으로 나온다. 무거운 가구나 화분을 옮기는 등의 완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가사노동에는 여자의 섬세한 손길이 더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무조건 집안일을 반씩 나눠 해야 한다는획일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아내나 엄마의 가사노동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가족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까, 아내나 엄마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진정성있는 마음과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모딜리아니가 19살의 잔느를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을 때 잔느는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는지 물었다. 모딜리아니는 잔느의 영혼을 알고 표현할 수 있을 때 눈동자를 그리겠다고 답했다. [돼지책]에서도 피곳 부인이 혼자서 공짜노동의 멍에를 지고 있을 때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남편과 아이들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뉘우쳤을 때 엄마의 눈동자가 보인다. 엄마는 영혼을 찾은 것이다. 우리는 악마로부터만 영혼을 빼앗기는 것은 아니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 나의 영혼을 빼앗을 수도 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짐작조차 못한다. 피곳 부인처럼 사라져야만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반드시 요리는 엄마가 하고, 차는 아빠가 고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상황에 맞춰 하면 된다. 그 대신 다른 사람은 고마워해야 하고 도와야 한다. 엄마의, 아내의 소중하고 헌신적인 가사노동에 무임승차해서 누리기만 하는 사람은 돼지가 아니다. 그건 돼지에 대한 모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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