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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알라딘 특별판, 양장)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소설을 잘 읽잖아 들어보지 못한 제목이다. 리커버판을 5000부나! 찍었다니, 뭔가.
리커버 중 귀에 익은 다른 어떤 책보다 더 많은 양이다. 2000부 찍으나 5000부 찍으나 종이값이 거기서 거기라 부리는 출판사의 만용인가. 소설은 당첨운이라 기회비용을 뼈저리게 안겨주는 경우가 많아 일단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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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520쪽. 느려터지게 문자들을 탐색하고 자빠진 눈깔로 언제 다.
불경스럽지만, 자로 두께도 재봤다. 3Cm. 당장 이 무겁고 두꺼운 책을 반납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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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책상 위에서 엎어치기 메치기로 며칠을 뒹굴리다 그냥 도서관에 들고 갔다.
아, 씨발, 월요일 휴관. 그냥 열람실에 엉댕이를 부리고 읽는다.
"이 맷집이 성경 동생 같은 놈을 읽어내면 독서감각은 좀더 늘 거 아니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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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령호와 세령마을 지도가 있다는 걸 다 읽고야 알았다.
왜 못 봤지. 텍스트만으로 저 곳을 그려내느라 혼자 낑낑댔다.
어쨌든 완독. 그러나 몸이 다 힘들 지경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에서
"해피 버스데이"로 끝나기까지 머리속은 온통 어두운 밤이다.
이 봄의 선선한 바람과는 매질 자체가 다른 공간에 선 느낌.
세령호와 세령마을 일대를 아침밤으로 메우는 안개를 눈삽으로 푹 떠내면 잠시 파인 그대로 있다가 안개가 느리게 구멍을 덮으며 미끄러질 것만 같다.
세령호 안개에 어둠이 더해지면, 어둠은 그냥 빛이 물러가는 현상이 아니라 물리적인 매질 하나가 공기 중에 덧대어지는 듯하다.
끈끈하고 퍽퍽하고 무겁고 답답해서 읽다 덮고 엎어쳤다,
끝까지 읽어야한다는 의무감으로 또 읽다 덮으며 메치기를 여러 번.
결국 다 보고 책을 덮으며 복잡한 눈물이 쪼로로 흐른다.
다행히 주요 등장인물은 단촐하다.
왕년의 야구인재 현수, 생활력 강한 아내 은주, 그들의 아들 서원, 서원의 룸메이트 소설가 승환, 나르시스트 치과의사 영제, 영제의 감옥에 갇힌 하영, 그들의 예쁜 딸 세령.
누가 누군지 기억 못하는 혼란은 없다.
아내와 딸을 자기 물건 쯤으로 여기고 그들이 사람노릇이라도 할라 치면 거침없이 벌 주고 '교정'하는 영제가 대단히 나쁜 놈이긴 하지만, 이 엄청한 사건을 만들고 여러 사람의 미래를 수장시킨 현수에 대한 동정심 또한 들지 않는다.
우물에 빠진 제 아버지의 머리 위에서 죽어버리라고 발악을 했던 현수, 젖통이 큰 술집 작부였던 어머니 지니에 대한 경멸의 힘을 빌어 악착스레 살아낸 은주.
서로의 트라우마를 알아주지도 감싸주지도 못한 채, 한 곳에 있을 뿐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형식으로 '살아내는' 일상의 사람들.
왜 하필 현수는 술을 처마시고 시속 120Km로 빗길을 달렸는가.
왜 영제에게 두들겨 맞고 앞니가 빈 채 도망가던 세령을 차로 튕겨내고 제 왼손으로 그 아이의 숨을 끊었나.
영제의 복수에서 서원을 살리겠다고 댐을 개방하여 아랫마을에 잠든 사람들의 고유한 역사까지도 끝장을 내고.
영제라는 또라이가 제 세계를 제가 설계한대로 지켜야겠다고 발광을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지만, 덩치만 산만 해서 유약한 진상 짓거리를 해대는 현수를 보며 더 속이 터졌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로서는 영제보다 현수들과 더 현실에서 가까우므로.
현수가 죽어서 만회가 될 것도 없다. 승환이 집요한 취재로 써내려간 세령호 사건의 전말에 대한 소설 한 권. 서원을 쫓아다닐 무서운 트라우마의 그림자를 막았다는 것. 영제라는 감옥에서 하영이 벗어나게 됐다는 것이 그나마의 소득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두 '새끼'들이 저지른 사건의 소용돌이 안에 빨려들어가버린 그 모든 미래들은 회복되지 않겠지. 우헤헤
요 몇 달 간 뉴스를 보며 가슴에 걸렸던 고구마 고구마 고구마 위에 또 굵직한 고구마 하나를 때려넣는 것 같아서 자꾸 잠들고만 싶었다.
하잘 것 없은 보통의 일상을 덮치는 눅눅한 안개의 밤이 눈꺼풀을 누른다.
'왜 그러는 거야.... 왜.... 왜 그렇게 약하고도 악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을 수 없는 건. 정유정의 언어 때문이었다.
'슬펐다, 당황했다, 원망스러웠다, 분노했다' 따위의 단문으로 밖에 내뱉지 못하는 우리의 언어를 한참 뛰어넘는, 치밀한 관찰과 묘사 능력.
문자 기호로써 현수와 서원과 은주, 영제, 하영, 세령, 승환이 있는 안개의 밤으로, 차갑고 까만 물속으로 훅 끌어가 읽는이를 지치게 만드는 엄, 청, 난 재주.
(아, 세령과 서원의 친구 냥이 어니도 거기에 있다.)
읽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다. 이 작품이 영화가 되면, 사방으로 뻗친 날캄한 잔가지와 풍성하고 싱싱한 잎을 모두 쳐내고 덩그러니 몸통만 남은 목재로서의 나무만 남는 꼴일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