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 할아버지는 젊을 때 전쟁에 참가하였다가 다리를 다쳤다. p.19

할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하다. 그러나 일을 나간다. p.24


네로 할아버지는 정직해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우유 배달을 맡겼다.

그러나 일이 힘든만큼 보수는 많지 않았다. 두 식구는 한번도 배불리

먹은 적이 없었다. P.26


 네로는 아주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끼니를 굶는 고통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건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네로는 이를 악물었다. 우유 배달을 멈출 수 없었다. p.46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기고 싶은 네로의 마음은 꿈일 뿐이었다.

끼니를 거르는 때가 허다했으니  배고픔을 견뎌 내는 일이 더 급했으니까. p.57


 두 폭의 그림은 루벤스의 대표작이었다. 그 그림엔 휘장이 늘 처져 있었다. 많은 돈을 내지 않으면 그림을 볼 수 없었다. p.61

 

나의 그림 솜씨는 알로아 아버지의 재산에 비길 수 없는 숭고한 거야. 나는 반드시 훌륭한 화가가 되고 만다. 그래서 할아버지께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털옷을 사 드려야지. 초상화도 훌륭하게 그려 드리고. 파트라슈에겐 금목걸이도 해 주어야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거야. '이 개는 내가 가난했을 때 단 하나의 친구였습니다.' 하얀 대리석으로 궁전 같은 집을 지어야지. 또 훌륭한 뜻을 품고 있는 소년들도 도와 줄 거야. 나처럼 가난한 소년들. 그 소년들은 내게 존경과 감사를 보내겠지. p.82~83


사람들은 지금 네로에게 모두 베풀어 주려 한다. 네로가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네로와 파트라슈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진실되게 살았다.

조용히 눈을 감는 순간에도 둘은 꼭 끌어안았다.


플랜더스의 개 / 위다 원작 / 이향원 글.그림/ 도서출판 산하


복실복실 하얀 털의 더 없이 착해만 보이는 커다란 개 파트라슈. 그리고 힘들지만 꿋꿋하게 살았던 네로, 볼 빨간 알로아의 빨간 망토가 이뻤던 나의 유년 시절의 애니 '플랜더스의 개'.

하얗게 눈 덮인 언덕과 더 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이국적인 느낌의 풍차가 부럽기도 하고 파트라슈의 품이 너무도 따스할 것 같아 나도 한번 안겨보았으면 하고 소망했던 아름답고 이쁜 이야기. 그러다 성인이 되어서 아이를 위해 도서출판 산하의 "플랜더스의 개'를 구입하고 나도 옛추억을 그리워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러다 급기야는 펑펑 쏟아졌다. 이 이야기가 이토록 잔혹했던가? 그리고 최근 "플랜 다스의 계" 소식에 번뜩 다시 한번 책을 꺼내어 읽었다. 또 다시 눈물이 흐른다. 이제는 이미 아는 이야기...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또 다시 눈물이 난다.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선하게 살았던 네로는 계속 일을 했지만 배불리 먹을 수도 추위를 피할 집을 구할 수도 없었다. 원래 가난했으므로.... 그래도 네로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도 했다. 하지만 모든 불행의 조합으로 네로는 그렇게 죽는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채로... 그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루벤스의 그림을 몰래 숨어들어가 돈을 내지 않고 본 거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다만 그 그림을 볼때 달빛이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그래도 네로는 파트라슈와 함께여서 행복하게 죽었다고 한다. 너무 하지 않은가. 어찌 이럴수가.

하지만 이 이야기가 정말로 슬픈 이유는 네로에게서 이땅의 청년들의 고달픈 삶이 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고달퍼질 내 아이의 삶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음악을 좋아한다. 하지만 음악을 전공할 수는 없다.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치뤄야 하는 그 비용을 우린 감당할 자신이 없다. 게다가 그 음악으로 밥을 먹고 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아들을 어루고 달래었다.

음악은 네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네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자. 대신에 네가 음악으로 뜻을 이룰때까지 버티어 줄 수 있는 다른 공부를 좀 해보자. 우선 먹고 살 수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살아야 음악도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아들은 그닥 의미 없어 보이는 그 공부를 한다. 내신을 위해 밤 새워 시험 공부도 하고 고등학생에게 과하다 싶게 요구되는 수행 평가도 열심히 하고 온갖 대회에도 열심히 참가한다. 팀별 발표 수업과 잡다한 과제들도 성의껏 준비한다. 그러고도 수능 성적도 필요하기 때문에 수능을 위한 공부도 한다. 놀지도 못하고 보고픈 영화 한 편 맘 편히 보지 못하고... 심지어 화장실 가는 시간, 밥 먹는 시간도 줄여서 공부해야 한다는 부모의 훈계에 묵묵히 응한다.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쏟아지는 요구 사항에 그저 순응한다. 그래야 대학을 갈 수 있으므로.  그럼에도 아들의 성적은 늘 부족하다. 아들보다 더 열심하는 아이들이 있기에... 그래서 아이들은 앞서가는 친구의 불행이 때로는 반갑다. 경쟁자의 주춤거림은 나에게 기회를 줄 수 있기에. 대학은 좋은 인성도 요구한다. 팀워크가 중요하다고도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선함으로 위장을 한다. 그렇게 위선을 배운다. 우리 부부는 때로는 아이의 이기심에 놀라기도 한다. 그래서 꾸중을 한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건 우리들이다. 이 사회이다.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상대가 살면 나는 죽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평화보다는 전쟁을 먼저 배우는 셈이다. 그렇게 힘겹게 대학엘 가면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지잡대란 말이 듣기 싫어 죽을똥말똥 인서울을 했건만 또 다른 차별이 존재한다. 알고 보니 어차피 안되는 게임이었다. 그냥 가난했던 이들은 앞으로도 그렇게 그냥 가난하게 될 것이다. 아주 드물게 벗어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건 정말 확률적으로 아주 드문 일이다. 내가 게을렀던 탓이야 라고 돌리기에는 너무도 억울하더란 말이다.

그렇게 나는 네로의 죽음에서 이 땅의 불쌍한 청년들을 보았다. 노량진의 가슴 답답하게 하는 청년들의 몸부림이 마구 마음을 후빈다. 


삶이 고달픈 것은 비단 청년들만의 일은 아니다. 그 고달픈 청년들 뒤에는 고달픈 부모들이 있다. 

나 역시 열심히 살았다. 시간을 허투로 쓰지 않았고 돈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게으르지도 않다.

열심히 공부도 한다. 꿈도 있었다. 하지만 나와 남편의 부모는 가난했고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우리는 빚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줄곧 쉬지 않고 일했지만 아직 그 빚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양가의 부모님들은 이미 연로하셔서 우리는 그들의 노년도 감당해야 한다. 쉰을 넘긴 남편과 쉰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리는 나의 꿈은 이제 지금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아질거라는 기대가 아닌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일까? 모두가 인간다울 수 있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토피아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우린 모두 게을러서, 실력이 없어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복권이라도 구입해서 행운에 기대어야만 하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