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욕 - K-콘텐츠로 한국 욕 새로 보기
홍수경 지음 / 이응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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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NEW욕 #홍수경 #이응 #이응출판사

욕은 어떻게 우리의 감정을 대신 말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욕을 듣고, 때로는 직접 내뱉어요. 그런데 같은 욕이 어떤 자리에서는 웃음이 되고, 어떤 자리에서는 깊은 상처가 되죠. 친밀함을 확인하는 말이 되기도 하고, 잔인한 공격이 되기도 하고요.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해요. 한국어의 욕설과 비속어, 혐오 표현을 영화와 드라마 대사에 연결해서 살펴보는데, 욕설 사전도 교양서도 아니에요. 욕이라는 가장 노골적인 언어로 한국인의 감정과 욕망, 사회의 변화를 읽어 내는 인문학적 탐구에 가까워요.

저자는 욕을 불만감을 드러내는 욕, 모욕감을 주는 욕, 혐오감을 표출하는 욕으로 나눠요. 버스를 놓치고 혼잣말로 내뱉는 욕에는 공격할 상대가 없어요. 짜증과 좌절만 있을 뿐이죠. 반면 누군가에게 직접 퍼붓는 욕에는 상대의 자존심을 꺾고 내 우위를 확인하려는 의도가 섞여 있어요. 거기서 더 나아가면 특정 성별이나 세대, 집단을 통째로 깎아내리는 혐오가 되고요.

욕에는 분노만 있는 게 아니라 무기력, 질투, 수치심, 허세, 열등감까지 담겨요. 격렬한 감정 앞에서 오히려 말을 잃을 때, 그 감정을 몇 글자로 압축하는 게 욕의 힘인지도 몰라요. 다만 감정을 생생하게 드러낸다고 해서 상대에게 상처 줄 권리까지 정당화되지는 않아요.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영화와 드라마로 욕을 풀어낸다는 점이에요. 기생충, 불한당, 응답하라 1988, 나의 아저씨 같은 작품이 욕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읽혀요.
읽고 나면 욕이 나오는 순간에 인물의 관계와 권력, 살아온 환경이 한꺼번에 드러난다는 걸 깨닫게 돼요. 더 글로리의 모욕적인 언어는 학교폭력의 잔혹함을 보여 주는 수단이고, 오래 함께한 사람들 사이의 투박한 말투는 친밀함의 표시죠. 결국 중요한 건 단어 자체보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관계에서 말하느냐예요.

'지랄'이라는 말에는 평가의 문제가 숨어 있어요.
상대의 행동을 지랄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말한 사람은 그 행동이 비이성적이라고 판단하는 위치에 서거든요. 누군가에게는 절박한 항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란으로 보일 수 있고, 욕은 반론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상대를 부정적인 이미지에 가둬 버려요.
언어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해요. '미쳤다'는 예전엔 비난이었지만 지금은 '미친 실력', '미친 집중력'처럼 칭찬으로도 쓰이죠. 물론 그게 특정인을 향한 정신질환 비하까지 정당화하는 건 아니에요.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혐오를 표출하는 욕이에요. '아줌마'는 원래 평범한 호칭인데, 말하는 사람의 편견이 실리면 모욕이 돼요. '충'이라는 접미사는 사람을 벌레에 빗대어 존재를 낮추는 비인간화의 방식이고요. 한 사람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과 집단 전체를 혐오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인데, 온라인에서는 그 경계가 쉽게 무너져요. 반대로 '따까리'에서는 뜻밖의 따뜻함을 발견해요.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는 이 말을 통해, 누구나 다른 사람의 삶을 떠받치며 살아간다는 연대의 시선을 보여 줘요.

법적으로 보면 모욕죄(형법 제311조)는 욕설이 쓰였다는 사실만으로 성립하지 않아요. 발언의 상황과 관계, 공연성, 표현의 경멸 정도를 함께 따지고,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의 균형도 고려하죠. 그래도 법이 모든 말의 상처를 해결해 주지는 못해요. 처벌되지 않는 말도 오래 남는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저자가 영화 기자로 일하다 뉴욕으로 건너가 한국의 욕을 다시 바라봤다는 점도 흥미로워요.
한국어 욕을 영어 단어 하나로 옮기면 계층 관계, 분노의 강도, 친밀함과 조롱의 미묘한 차이가 얼마나 살아남을까요?
번역하기 어려운 건 욕이 아니라 감정이에요.

이 책을 읽는다고 욕을 더 잘하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대신 누군가의 욕을 들으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해 보고, 내가 말을 내뱉기 전에 상대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잠깐 고민하게 될 거예요. 욕을 알면 언어가 보이고, 언어를 알면 사람이 보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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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읽는 사람은 다르게 말한다 - 공감과 이해를 경쟁력으로 만드는 대화의 기술
비치키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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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감정을읽는사람은다르게말한다 #비치기 #교보문고 #북다방1기

AI가 정중한 사과 문장을 순식간에 만들어 주는 시대다. 표현은 매끄럽고 예의도 충분하지만, 그런 문장을 읽다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문장을 잘 쓰는 것과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은 얼마나 가까운 일일까.

비치키의 <감정을 읽는 사람은 다르게 말한다>는 이 질문을 사람 사이의 대화로 가져온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상대의 말을 얼마나 정확히 알아들었는지, 그 말을 꺼내기까지의 마음에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 자연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친구가 승진 소식을 전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직급이나 연봉을 물을 수도 있고, 기분이 어땠는지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친구가 오랫동안 기다린 인정을 받고 벅찬 마음으로 왔다면, 먼저 받아 주어야 할 것은 순전한 기쁨이다. 무엇에 먼저 반응하느냐에 따라 상대가 느끼는 관계의 온도가 달라진다.

우리는 대화 중에 서둘러 원인을 찾고, 잘잘못을 가리고,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래야 도움이 됐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에게는 마음이 충분히 전해졌다는 감각이 먼저 필요할 때가 많다.
조언이 옳아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오래 남은 건 대화의 여백이다.
누군가 힘든 일을 털어놓으면 우리는 쉽게 내 경험을 꺼낸다. 혼자가 아니라고 위로하고 싶어서 이겠지만, 어느새 내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곤 한다. 상대는 아직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는데 말이다.
내 경험을 말한 뒤에는 잠시 멈추고 상대가 무엇을 덧붙이는지 기다려야 한다. 말이 끊겼다고 급히 다른 말로 채우지 않는 것, 그 기다림에는 더 이야기해도 괜찮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럴 때 침묵은 어색함이 아니라 마음을 정리하고 용기를 모으는 시간이다.

상대가 다른 의견을 편하게 말할 수 있게 여유를 주라는 대목도 인상 깊었다.
고개를 끄덕였다고 반드시 동의한 건 아니다. 관계가 불편해질까 봐, 혹은 말하는 사람의 지위가 부담스러워서 이견을 삼켰을 수 있다. “혹시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나요?”라고 물었다면 정말 다른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견이 나오자마자 반박하면 그 질문은 형식적인 절차가 되어 버린다.

‘감정을 읽는다’는 말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표정 하나로 속마음을 알아맞힐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건 위험하다. 잠깐의 망설임은 반대의 신호일 수도 있지만, 피곤하거나 생각을 정리하는 중일 수도 있다.
그래서 관찰과 함께 확인이 필요하다.
내가 알아챈 게 맞는지 조심스럽게 묻고, 상대가 설명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갈등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기준과 경험이 달라서, 내게 당연한 일이 상대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그 차이를 곧바로 옳고 그름으로 몰아가면 대화는 굳어 버린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을 때 비로소 서로의 판단이 만들어진 배경이 보인다.
물론 이해한다고 해서 모든 의견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면서 내 경계를 말하려면 ‘나’를 주어로 말하는 방식이 유용하다. 상대의 성격을 단정하지 않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내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설명한 뒤, 앞으로 바라는 행동을 덧붙이면 대화는 함께 조정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다만 AI 시대에 관한 책의 메시지는 조금 신중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AI도 공감하는 듯한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인간의 가치를 ‘AI는 못 하는 말’에서만 찾기는 어렵다.
내가 더 주목한 건 관계를 이어 가는 사람의 책임이다.
건넨 말을 기억하고, 그 말대로 행동하고, 오해가 생기면 다시 설명하고 사과하는 일.
신뢰는 그런 시간 속에서 쌓인다.

책을 덮고 떠올린 실천할 일.
답부터 서둘러 내놓지 않기, 내가 이해한 마음이 맞는지 한 번 더 묻기, 다른 의견이 나와도 대화 이어 가기, 친한 사이라고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

다음 대화에서는 “그래서 어떻게 됐어?” 대신 “그때 마음은 어땠어?”라고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려 보고 싶다.

이제는 그 짧은 기다림 속에서 익숙한 사람에게도 내가 아직 듣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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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ㅣ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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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은 아버지를 찾는 아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페터 데바우어가 아버지의 정체를 알아낸다고 해서 귀향이 끝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더 어려운 질문이 시작된다. 그토록 찾던 아버지가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부모에게서 질문만 물려받는 걸까, 아니면 그들의 답과 잘못까지 물려받는 걸까.

아버지 없이 자란 페터는 스위스 조부모 집에서 미완성 소설 원고를 발견한다.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돌아온 병사가 아내 곁에 이미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이야기인데, 정작 결말 부분이 사라져 있다. 이 사라진 결말은 아버지가 부재한 페터의 삶과 닮았다.
그는 소설의 결말, 원고를 쓴 작가, 자신의 아버지를 차례로 추적하지만 결국 세 탐색은 하나로 합쳐진다.

이 소설의 바탕에는 <오뒷세이아>가 있다.
텔레마코스가 오디세우스를 찾듯 페터도 아버지를 좇는다. 다만 텔레마코스의 아버지는 집을 되찾는 영웅이지만, 페터의 아버지는 판단해야 할 역사다.
요한 데바우어는 나치 시대엔 전체주의를 뒷받침하는 글을 쓰고, 전후엔 새 이름과 세련된 이론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며 살아남은 인물이다. 그의 지성과 매력은 페터에게 거부감과 경탄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악한 사상이 꼭 조잡한 얼굴로 나타나는 건 아니고, 지적 정교함이 도덕적 정당성을 보장하지도 않는다는 게 여기서 드러난다.

이 문제는 이미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예고된다. 할아버지는 오심이 때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말하고, 은밀한 방법으로만 할 수 있는 올바른 일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네 아비도 그렇게 물었었지"라고 덧붙인다.
아버지는 실제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질문의 형태로 아들의 삶에 들어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같은 질문을 했다고 같은 답에 도달해야 하는 건 아니다. 질문은 물려받아도 판단까지 상속되진 않는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침묵하는데, 이는 아들을 보호하려는 선택이면서 동시에 아들의 알 권리를 대신 결정해버린 통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페터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군다. 불안과 욕망을 설명하기보다 혼자 견디고, 위기가 오면 대화 대신 떠난다. 베로니카의 아들 막스에게는 자신이 못 받은 부성애를 주려 하고, 그와 함께 오디세우스 영화를 보다가 어릴 적 읽은 소설이 <오뒷세이아>의 변형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정작 페터가 돌아가야 할 곳을 보여주는 이는 바바라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동안 페터는 원고에 대한 집착을 잊는다. 하지만 실종됐던 그녀의 남편이 돌아오자 페터는 싸우지 않고 물러난다. 미완성 원고 속 상황을 그대로 반복하는 셈이다. 훗날 다시 만나지만, 아버지의 정체를 알게 된 페터는 또 바바라를 떠나 미국으로 향한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찾으려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을 버리는 것이다.

바바라는 기다림에 충실했던 페넬로페가 아니다.
그녀는 페터의 혈통과 상관없이 그를 받아들이면서도, 요한 데바우어의 사상만큼은 분명히 악이라고 판단한다. 모든 게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아버지의 논리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바바라에게 돌아간다는 건 연애의 완성이 아니라, 과거의 미스터리보다 현재의 관계를, 떠날 자유보다 머물 책임을 선택하는 일이다.

<귀향>은 아버지를 닮는 것과 아버지처럼 사는 것을 구분한다.
페터가 아버지와 달라지는 길은 핏줄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자기 안에 아버지와 닮은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다른 결정을 내리는 데 있다. 좋은 결과가 처음의 부당함을 지우지는 않고, 선한 목적이 기만의 도덕적 비용을 없애지도 않는다.
작가는 결과와 해석만으로는 제거되지 않는 책임을 끝까지 남겨둔다.

결국 이 소설의 마지막 질문은 "아버지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아버지와 닮은 질문을 가진 나는 어떤 답을 선택할 것인가"다.
페터의 진짜 귀향은 아버지의 신원을 확인하는 순간이 아니라, 물려받은 질문을 자기 책임 아래 다시 판단하고 누군가(바바라)의 곁에 머무르기로 선택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귀향이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자리에서 새로운 결말을 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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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일의 만화 그리스로마 신화 1 - 신들의 우화
이우일 지음, 이준석 감수 / 비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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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일의그리스로마신화 #만화_그리스로마신화 #성인용 #비채 #도서협찬_서평단

들어는 보았는가?!
그리스로마신화 삼대장?!
그중 1인인 '이우일 만화가' 작품되시겠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그중 1인_비채 피셜)

설마설마하면서 봤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정!"이다.
시리즈 중 첫번째만 읽었음에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아직도 새로울게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이 책 한번 읽어보라 권한다.

메두사가 묻는다.
"괴물과 영웅은 누가 구분하는거지?"
알고보니 피해자 아닌가 싶다.
죽어서도 페르세우스의 정적 제거수단이 되고, 끝내는 아테나 여신의 방패 장식품이 된다.
자. 다시 묻는다.
"괴물과 영웅은 누가...?"

오이디푸스왕 이야기.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스스로 눈을 멀게 한 이후 아들들의 왕위 다툼과 크레온의 후일담은 처음 접한 듯 생경하고,
자신이 묻힌 곳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해달라는 오이디푸스의 부탁을 들어준 테세우스. 둘의 교감 역시 이참에 알고 간다.

동생의 주검을 수습한 안티고네(오이디푸스의 큰딸)가 크레온에게 묻는다.
인간의 포고령이 우선인가? 신들의 불문율이 우선인가?

삽화에 글자 몇자를 얹었을 뿐인데 왜 이케 먹먹하지?
이러면 헤라클레스, 오뒷세우스도 읽지 않을 수가... 없...

덧) 사심없이 시작해서 사심으로 끝맺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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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 사과
박솔뫼 외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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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박솔뫼 #이효석문학상수상작품집 #사과 #북다방1기


함께 있다는 말의 무게

박솔뫼의 <사과>를 읽으며 오래 남은 것은 사건보다 창밖을 바라보는 애리의 자리였다. 차는 어딘가로 향하지만 애리는 그 풍경 속을 직접 걷는 자신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선호와 가까워지는 동안에도 둘은 같은 것을 같은 모습으로 보지 않는다. 선호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애리의 감각을, 애리가 끝내 설명하거나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잠시 나란히 있을 수 있고, 그 시간이 끝난 뒤에도 함께 있었던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어 실린 <비둘기 옮기기>는 이 책을 읽는 방법까지 돌아보게 한다. 화자는 비둘기를 고양이로 바꾸지 못한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비둘기를 아주 조금 다르게 본다.

여섯 편을 읽고 난 뒤 내게도 그런 변화가 남았다. 익숙한 말로 분류하던 사람과의 관계가 전처럼 보이지 않았다.

성혜령의 <하악>에서 자인은 장애가 있는 동생 태인을 돌본다. 가족이라면 기꺼이 책임져야 한다는 믿음은 너무도 당연시되기에 거절하기도 어렵다. 자인이 느끼는 피로와 분리되고 싶은 마음을 읽으며,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는 말 앞에서 정작 돌보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자주 지워지는지 생각해본다. 자인을 쉽게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그가 타인을 구분하고 배제하는 방식을 알아보면서도 자신 역시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임솔아의 <나의 빈 묘에>에서는 묘가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 묻게 된다. 지윤과 윤미는 반려견 조아를 기억하고 다시 찾아갈 수 있는 따뜻한 곳에 묻어주고 싶어 한다. 묘는 죽은 뒤의 자리를 미리 정하는 공간만은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누구와 삶을 나누고, 누가 나를 기억하며 찾아올 것인지에 관한 자리이기도 하다. 조아에게도 그런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두 사람의 마음이 전해졌다.

장희원의 <영주>는 훨씬 불편한 방식으로 '곁에 있음'을 요구한다. 영주는 과거 자신의 고통을 지켜봤던 우진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목격해 달라고 한다. 우진이 끝내 말을 잃고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끼는 결말은 단순한 복수의 성공으로만 읽히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도 지나쳤던 사람이 뒤늦게 그 고통을 자신의 문장으로 다룰 수 있는가. 이 소설은 목격과 책임 사이에 놓인 긴 시간을 독자가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정기현의 <그거 점 된다>는 몸에 생긴 점과 허물을 통해 남들이 정한 모습대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을 기묘하고도 경쾌하게 뒤집는다. 희정이 점을 없애려 애쓸 때와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될 때, 같은 몸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황시운의 <일일업무 보고서>에서는 그 몸의 문제가 다시 일상의 구체적인 시간으로 돌아온다. 세진에게 먹고 일하고 몸을 돌보는 일은 매일의 판단과 노동이다. 도움을 받는 일에도 나중에 치를 값이 있을 수 있다는 세진의 생각은 그의 독립심을 추상적인 미덕이 아니라 살아온 경험으로 이해하게 한다. 아무 마음도 갖지 않겠다는 다짐과 달리, 내일을 생각하게 되는 세진의 마음 또한 오래 남는다.

이 작품집의 인물들은 저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돌보고, 기억하고, 목격한다.
그러나 어느 관계도 '우리'라는 말 하나로 간단히 묶이지 않는다. 함께 있는 동안에도 서로 다른 풍경을 보고, 사랑과 돌봄 안에서도 각자의 삶은 저마다의 무게를 가진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비둘기가 아주 조금 고양이처럼 보였다는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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