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에서 공유가 연기하는 인물은 왕년의 북한 최정예 특수요원이지만 지금은 대리운전을 하며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다. 당연히 운동할 시간도 없고 식사도 엉망이고 수면 부족이다. 다시 말해 그가 영화 속 몸매를 유지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안다. 영화는 무엇보다 판타지다. 늘 사실에 충실할 필요는 없다. 적당히 과장하고 미화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몸의 의미는 '그냥 영화적 판타지'라고 넘길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지 오래다. 영화적 맥락을 무시하고 오로지 공유의 몸만 보자. 이런 몸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시간과 돈이다. 공유의 관상용 몸은 저 두 가지가 넉넉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사치품이다.

 

두 사람을 비교해보라. 고리오(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의 등장인물)는 사랑하는 딸들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미리 퍼주었고 결국 가난에 시달리다 홀로 죽었으며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하지만 춘화(영화 써니의 등장인물)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재산을 움켜쥐고 있었고 죽은 뒤에야 선심 쓰듯 몇몇 가난한 친구에게 재산 일부를 유산으로 남겼다. 감동한 그들은 결코 죽은 친구를 잊지 않을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하면 되지 않을까. 이해는 그 다음에 편할 때 해도 된다. 이해는 인정만큼 절실하지 않다.

 

나는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책을 내겠다고 계약서를 썼을 때 출판사에서 제시한 가제는 '취향은 존중해주시죠?'였다. 어떻게든 막아볼 생각이고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저 명령어가 이치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면 그건 "(될 수 있는 한) 이웃의 취미를 방해하지 말라" 정도가 될 것이다. 모양 빠지게 '될 수 있는 한'이 붙는 이유는 그 이웃의 취미가 연쇄살인이나 영아 납치 감금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취향이 취미로 슬쩍 바뀐 것은 취미 쪽이 더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취향을 어떻게 '방해'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존중'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갖다 쓰면 글 자체가 흐리멍덩해지고 내가 하려는 말과도 맞지 않는다. 나는 내 취향이 존중받기를 원치 않는다. 취미 생활을 방해받지 않는 것만도 충분하다.

 

이 책의 제목은 <가능한 꿈의 공간들>이다. 취향은 존중해주시죠?도 될 수 있는 한 이웃의 취미를 방해하지 말라도 아니고 그 사이 어떤 지점도 아니다. 좀 멀리 왔다. 가능한 꿈의 공간들은 듀나를 전혀 알지 못했던 내(를 포함한 사람들)가 제목만으로 책을 집어들 정도로 확 끌리는 제목은 아니다. 될 수 있는 한 이웃의 취미를 방해하지 말라였으면 제목 특이하네 하면서 집어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에세이의 내용과 어울리는 건 가능한 꿈의 공간들일지 모르지만, 나는 듀나가 길게 뽑은 그 제목이 계속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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