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무

 

두 개의 마음이 가정을 꾸리고 아빠가 되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처럼 자신에게 매몰되어 가족을 버리게 될까 봐, 방바닥에 길게 누워 검은 그림자를 만들게 될까 봐, 그게 아니면 엄마처럼 인생을 전부 자식에게 내어주고 빈껍데기가 될까 봐 어떤 관계도 맺거나 확장하고 싶지 않았다.

 

영무의 마음도 배신이나 상처, 어느 쪽으로도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 뜨거움이라면 탁자 위에 놓인 죽쪽의 온도가 훨씬 높았다.

 

 

영무엄마

 

거기 표시한 사람들한테 전화 좀 돌려라. 엄마가 보고 싶어 한다고.

난 수목장 했으면 싶으니까 그렇게 알고.

옷과 구두, 물건 중에서 쓸 만한 건 챙겨두었으니 여진에게 줘라.

방은 얼른 빼서 병원비에 보태라.

수첩 뒤쪽에 보면 돈 받을 거랑 갚을 것도 적어뒀다.

보험회사는 저번에 명함 받아뒀지?

다른 건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여진

 

그날부터(미용실 언니에게 들킨 날) 석현은 미용실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어떤 연락이나 변명도 없었다. 벚꽃 놀이 가자고 약속한 날에도 물론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다음 여진은 메시지를 보냈다. 옷 챙겨 놓았으니 편할 때 들러서 가져가라. 그리고도 한참 후의 어느날 밤 석현이 나타났다. 지나가는데... 불이 켜져 있어서요. 어.... 옷 챙겨 놨는데 잠깐만....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 ...... 머리 많이 길었네. 다듬어 줄까?  다 됐어. 고마워요. 그리고 헤어짐.

 

여진은 쇼핑백을 건넸다. 이걸 찾으러 온 게 아니고 이걸 가져가라고 부른 게 아니더라도 이제는 주고받아야만 했다..... 이별의 순간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소정

 

아빠의 죽음을 불행의 시작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불행의 여러 가지 모습 중 하나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애(진수)에게 가난은 정형화된 개념이라 개별적이고 다양한 궁핍은 답이 딱 떨어지지 않는 난해한 문제와 같았다.

 

처음에는 메시지 따위로 끝내는 진수에게 화도 나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깔끔한 이별을 위해선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게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았다. 소정은 상대를 아프게 하기 위한 말을 찾거나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대신, 구인구직 사이트에 접속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게 가장 자기다운 행동이고 그곳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도피처라고 생각했다.

 

 

진수 이해하기.

 

소정을 사랑했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자라온 환경의 차이가 있어서 삐걱거리는 부분이 생긴 거다. 모질지 못한 성격 때문에 딱 잘라 헤어지자 말하지 못하는 중에 새로운 사람도 만났고 (좀 부담스런 그애하고는 달리 상큼하고 발랄한)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자기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작은 파국 같은 걸 바라고 있었는지도. 쿵~~ 맞닥뜨리고 난 후, 난감하고 미안하지만 수습이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과 어울리고 부모님 마음에도 흡족하며 부담스럽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괜찮은 처지의 애인이 마음 편하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 아닌가.

 

 

석현 이해하기.

 

석현은 뭐였을까. 오는 여자 막지 않는다? 공짜로 섹스할 수 있는 기회니 그러지 않을 이유가 뭔가? 처음엔 충동적이었으나 점차 진실한 사랑을 느껴서? 젊을 땐 도둑질 빼고는 뭐든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들키고 난 다음 석현이 연락을 뚝 끊은 것은? 아마 처음엔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고.....아무 연락도 하지 않으면서 미안하기도 했을 터이다. 시간이 지난 다음엔 그렇게 끝내기를 잘했다 싶었으리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다. 결혼할 것도 아니고 평생 단물을 뽑아 먹을 수도 없고 언젠가는 몸을 탐하는 즐거움도 사라져 스르르 멀어지거나 정식으로 상처주면서 헤어지거나였을 텐데 아직 헤어져야겠다 마음 같은 걸 먹기도 전에 쿵~~ 사건이 벌어져서 다행인 것이다. 어찌 보면 석현은 착한 아이다. 유부녀니까 관계를 빌미로 협박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조용하고 깔끔하게 이별하는 거 보면. 세월이 지나 문득문득 좋은 마음으로 돌아보기도 할 거다. 헤어졌으므로 좋았던, 그리고 겪어서 더 좋았던 시간.

 

 

 

베인 상처 위에 붙일 수 있는 밴드같은 소설 (이승우의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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