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제도를 버려라 - 어떻게 시간 낭비를 끝내고 성과에 전력할 것인가
팀 베이커, 구세희 / 책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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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라는 말을 나는 매우 싫어한다. 특히 "평가"라는 단어가 상기시키는 학교에서의 줄세우기가 매우 거슬린다. 우리는 어린이집부터 직장까지 평생을 "줄세우기" 틀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나는 그 줄에서 열심히 이탈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평가제도를 버려라』는 책의 제목은 나의 구미를 확 끌어당겼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할 듯했다. 

하지만 내가 놓친 것이 있다. "글로벌 기업들의 평가제도 혁신 트렌드" 라는 언 듯 보편 띠지처럼 보이는 표지 하단에 있는 글이다. 계속 나는 학교 교육 안에서 평가제도에 대한 개혁을 말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 책은 기업 안에서 평가에 대한 개혁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지 하지만 말이다.

저자는 지금까지의 기업의 평가제도가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기업의 목적은 성과에 있는데, 현재까지 평가제도는 평가를 위한 평가제도라는 주장이다. 이런 평가제도는 군대에서 시작되었으며, 군대라는 조직과 기업이라는 조직이 생리가 다르고, 목적이 다르듯 군대가 아닌 기업에 맞는 평가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성과를 초점으로 평가제도를 개선을 위해서는 관리자의 평가가 아니라 조직원의 대화가 필요가 필요하다고 한다. "분위기 평가"를 통해 직무기술서를 역할기술서로 바꾸고, 강점과 재능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대화가 필요하며, 성장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훈련이 아닌 다차원적인 학습을 통해 혁신과 지속적인 개선을 이뤄가야 한다고 우리에게 제안한다. 

이는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떨어뜨리기 위한 평가가 아니라 "학습"을 위한 과정 속에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기업도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성장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은 더더욱 사람의 성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평생을 생존경쟁의 상징인 "줄세우기"라는 커다란 틀에서 안 그래도 작은 가슴을 부여잡고 졸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꽉 눌려진 상태에서 쥐어짜지기만 하면 무엇이 나오겠는가? 미래는 지식경제사회라고 하는데, 그래서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가기만 할 뿐 아니겠는가? 그것을 깨기 위해서는 자살이란 선택뿐이 할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은 안타깝다. 

여름이다. 숨이 턱턱 차오르는 더위가 더욱 우리를 힘들게 한다. 시원시원한 이 책의 문장은 가슴을 뚫어주었다. 안타깝고 갑갑한 현실 속에 알싸한 수박의 향취를 준다. 누가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목표를 향해 대화하며, 충분히 들으며 함께 성장해 가자고 손을 내미는 이 책은 표지부터 내부 편집까지 시원하다. 독특한 체제와 요약, 그리고 "현장에서"라는 또 다른 예의 제시 방법이 깔끔했다. 마음속에 냉수 한 잔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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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스트링
미치 앨봄 지음, 윤정숙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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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검색했다. “프랭키 프레스토를 다양한 인터넷 검색창에그저 이 소설만 나올 뿐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나오는데 프랭키 프레스토절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소설 안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약간의 짜증이 났다. “ 년 월 일”, “ 시 분등의 표현들이 계속 거슬렸다. “환상 속의 그대프랭키 프레스토를 만나기 위해서는 환상 안에 들어가야 했다. 환상이지만 진짜 현실의 인물 같았고, 그의 이야기는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가슴이 저미도록 처연했지만 벚꽃 잎이 흩날리는 따스한 봄날의 장면과 같았다. 글을 읽고 있는데, 음표를 보는 듯 했고, 이야기는 노래로 들렸다.

 

아버지가 스승이었고, 어머니가 유산인 사람. 동시에 기른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니지만 어머니이고, 기른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지만 아버지인 사람. 그는 모순이며, 동시에 현실이었다. 낳고 기름에 있어, 아이가 자람에 있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자란 그는 자신 낳지 않은 또 다른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고, 스승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이자 스승은 지독한 사람이었다. 지루함을 견디게 하였다. 진정한 갈망이 채워질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들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듣는 훈련은 음악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삶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이자 스승은 그의 삶의 중요한 가르침들을 주었다. 그의 삶은 언제나 스승의 말이 기준이었다.

 

그의 아내는 삶의 방향이었다. 그는 늘 그녀를 향했다. 잠시 그녀를 향하지 않았던 시간들 속에서는 방황하였다. 그녀를 향할 때에는 망설임도 없었고, 두려움과 고난도 떨쳐내며 아름다운 음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향이 유명해짐과 돈이 되었을 때에는 그 모든 것을 가졌어도 공허하였다.

 

그의 기타는 마법이었다. 그 마법은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녀를 향해 가면서도, 스승의 기준을 따를 때에도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그의 기타였다. 음악은 그의 삶을 온전히 채웠지만, 그 음악은 술, 마약 등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자신이 움켜진 그것이었다.

 

역사 속의 환상 같은 이 이야기는 내 마음을 봄날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에게도 3가닥의 마법 기타 줄을 선물하였다. “들음”, “가족”, “자아이 세 가지는 대위법처럼 내 마음 속에 계속해서 울린다. 누군가의 말을 꼼꼼히 들어야만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다. 특히 나의 가족에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말을 찬찬히 들어야 한다. 또한 나의 말도 잘 들어야 한다. 나 자신을 만나는 일을 끊임없이 해야만 한다. 나의 말을 내가 들을 때에 다른 이의 말도 잘 들릴 것이다. 아름다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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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 신학자 칼 바르트와 1906-1968의 정치
프랑크 옐레 지음, 이용주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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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했다. 책을 받아보고는 산뜻하면서 어딘가 진중한 앞표지의 물결 또는 나뭇결 같은 무늬와 깔끔한 제목이 와 닿는다. 찬찬히 돌려본다. 뒤표지 노란색이 눈에 확 띈다. 글귀를 읽어본다. 시원했다.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정부나 권력을 가진 다수 또는 소수, 단체 혹은 개인들이 다루기 편한 국가시민이 될 수가 없다라는 문장은 가렵던 내 마음의 등을 긁어 준다. 나 혼자 +아이가 아닌가 싶던 날들에 대한 위로가 몰려온다.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힐 줄 알았다. 역시나 효자손이다. 시원시원한 문장들이 속속들이 등장한다. 이토록 얇은 책에서 이렇게 수많은 문장들을 만날 줄은 몰랐다. 물론 내가 과문한 탓에 칼 바르트란 이름만 들었지, 칼 바르트의 문장들을, 그의 삶을 읽은 것은 처음이기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구호 같다고 할지 모를 바르트의 문장들이 지금 우리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또 다시 힘을 주고, 한 편으로는 채찍질 한다. 나치가 득세하고, 교회는 이에 적극 찬동하며, 고백교회는 사력을 다해 반대했던 2차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과 현재 우리나라와는 너무나도 닮았다. 권력으로 억압하고, 공포를 형성해서 소수의 피로 권력을 유지하고, 그 권력에 동조하여 기득권을 얻고, 지속하는 교회의 모습들, 그리고 그 지도자를 찬양하는 모습이 똑같다. 그 틈바구니 한 쪽에 우직하게 진리의 목소리를 내고 있음도 매한가지이다.

나는 선거를 치르기 전에, 그리고 치른 직후와 416참사 2주기 사이에 책을 다 읽었다. 참말로 참말로 매우 적절한 시기에 나는 이 책을 읽은 듯하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오기 싫었던 강남으로 이사 와서 첫 선거인데, 전현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선거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그 소식을 확인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성을 질렀다.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또 다른 눈물을 흘린다. 730, 730번의 416. 밝힌 건 아무것도 없이 속절없이 벌써 2년의 시간이 흘러간다. 이 책에 저자가 초반부에, 마지막에 다시 인용하는 시대적 사건에 대해 방관하면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아니다.” 명제가 이 땅의 교회에게 경종이 되기를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다음 목표는 선거에서의 승리가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주의적 인격을 도야하는 것이다.”라는 이 문장은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끝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출발점에 섰다. 나의 칼 바르트 읽기도 출발점에 섰다. 호기심은 있지만, 딱딱한 조직신학자의 모습으로만 어설프게 알고 있는 바르트는 효자손으로, 청량음료로 다가왔다. 이런 착한 만남으로 시작했으니, 좋은 만남이 될 터이다. 누군가가 덧씌워준 딱딱한 조직신학자, 자유주의자, 공산당 등의 선입견들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책이다. 진리를 토대로 한 사랑의 힘을 믿었던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난다. 그 제자를 만나는 일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예수의 제자들에게 꽤 유의미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정부나 권력을 가진 다수 또는 소수, 단체 혹은 개인들이 다루기 편한 국가시민"이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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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서 밤새읽는 소립자 이야기 재밌밤 시리즈
다케우치 카오루 지음, 조민정 옮김, 정성헌 감수 / 더숲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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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담겨 있는 소립자의 세계에 빠져든다면, 정말 밤새워 읽게 되겠죠? 그러나 빠지기 쉽지 않다는거~, ˝밤새읽는˝ 시리즈는 빠져들게 한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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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양희송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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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에 대학원 동기들과 양희송의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을 무려 싸인본(?)으로 나눔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바로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겨두어야지 했는데, 밀리고 밀려 버렸다. 마음속에 한켠에 묵직함 짐으로 자리 잡아 있을 무렵 가나안 성도에 대한 또 한 권의 책이 나왔다. 정재영의 교회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 가나안 성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두 권을 비교해서 보고 정리해야지 했는데, 이제야 겨우 정재영의 책을 읽게 되었다.

가나안 성도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한 책은 내가 알기로는 이 두 책이 국내에 유일하다. 기존 제도 교회에 대한 비판이 심하게 일 때와 궤를 같이하여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등장했다. 한국 제도 교회는 미국의 이머징 교회를 이단으로 몰아서 충분한 검토 없이 발로 뻥 차버린다던가, 영국의 대안 예배운동을 그 따위로 취급하며, 영국교회가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진단하였다. 나 또한 그러한 책들을 보며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새로운 운동들의 물결이 담긴 책들(: 세이비어 교회, 깊이 있는 교회등의 책들)은 나왔고, 제도 교회 틀에 매우 실망하던 나는 제도 교회에 있는 제도들, 예를 들면, 묵도, 헌금, 직분 등에 의문을 품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듣게 된 것이 가나안 성도라는 단어이다. 처음에는 웃었다. 교회쇼핑족, 또는 설교쇼핑족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꿈꿨지만, 제도 안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그저 웃어 넘겼다. 그리고 신대원에 입학하지 전부터 교회 찾기를 시작했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에 대한 갈급함이었다. 눈을 돌려 보니 같은 고민을 한 선배들은 넘쳐났고, 이미 작은 교회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양한 교회들을 보면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을 걷기 시작하고, 신대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만난 책이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인데, 그 때 함께 논의했던 동기들과 논쟁의 핵심은 ‘1인교회가 가능한가?’였다. 나는 이 책의 핵심이 ‘1인교회가 가능한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논의는 자꾸 그 쪽으로 흘러갔다. 그 후에 양희송의 책은 SNS상에서 대단한 논쟁을 불러 왔고, 다양한 교계와 학계에도 많은 논의들이 된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논의 대부분도 ‘1인교회가 가능한가?’였다.

그 화두보다 가나안 성도라는 전체 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파악이 중요할 듯 보였다. 나는 가나안 성도현상이 새로운 교회들이 출현을 예고하며 당면성을 제기하고 있고, 제도 교회, 교단들이 교회의 다양성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논의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동기 녀석 중 하나는 ‘1인교회에 대한 의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며, ‘가나안 성도현상을 병적 현상으로 치부했다. 현 제도 밖에 있는 교회에 대해 병적 현상이라는 정의를 내린 것이다. 그러면서 이미 나는 가나안 성도라고 하였다(그럴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런 논의는 양희송이 초래한 듯싶다. 책의 시작을 혼자 드리는 예배로 시작해서, 마지막을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진 김교신 등을 다루며, 1인 신앙을 가지고 산 이들의 이야기로 마쳤으니, 안 그래도 제도 교회 안에 사람들은 그런 것에 문외한 일 터인데 매우 놀라고 강렬하게 남았을 것이다. 저자가 그 강렬함을 의도했는지 몰라도, 내 생각에는 그런 연유로 ‘1인 교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그런 ‘1인 교회에 대한 뜨거운 논의들이 차츰 식어갈 때 쯤, 정재영의 책이 나왔다. 양희송의 책으로 한 번 달궈진 기독교계는 이 책에도 주목했고, 다시 ‘1인 교회에 대한 논의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처음 같지 않았고, 잠시 뜨거워질 듯하던 논의는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이내 책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지는 모양새이다.

그래도 내 개인으로는 지속된 관심이 있었고, 기어이 책을 샀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책을 다 탐독하였다. ……. 아쉽다. 나의 눈에는 꼰대의 시선이 포착되었다. 저자가 아니라고 하면 나야 뭐 그러냐그러겠지만, 나에게 이미 가나안 성도라고 하던 동기의 생각과 비슷해 보였다. 가나안 성도에 대해서 병적 현상으로 정의 내린 동기의 생각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는 지점들은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는 결론이다. 이미 제도 교회로 돌아온다는 생각은 제도 교회를 정으로 생각하고 가나안 성도를 반으로 생각함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생각이 매우 거슬린다. 예배가 무엇인가? 한국 교회가 열광한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나의 견해로는 참 좋은 책이다. 성공주의, 목적의식 등의 요소들을 빼면, 교회에 대한 것을 잘 정리한 책이라는 생각이 있다.)이라는 책에서도 예배는 하나님과 11의 만남이며, 대화이며, 적극적인 사랑의 나눔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담론을 수용했다면, 그리고 개인 묵상을 강력하게 권장한다면 ‘1인 예배가 가능하다고 인정한 것이 아닌가? ‘1인 교회에 대한 논의에 대해 많은 이들이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담론들을 살펴봐야 하지만, 그렇지 않기에 ‘1인 예배‘1인 교회를 혼동해서 생각하고 비판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교회는 나가고 안 나가고 하는 곳인가? 아님 우리가, 내가 교회가 되어야 하나? 나는 내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형상이라는 단어와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는 인간의 언어 속에서 구별되는 것이지 이미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우리고, 우리가 나이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이라는 영원, 무한이란 전체에 접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교회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순간 나는 이미 우주적 교회에 들어간다. ‘교회됨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지, ‘1인 예배’, ‘1인 교회가 가능한지 안 한지 논의할 시점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다양한 교회들이 새롭게 출현해야 하고, 그것을 전체가 어떻게 수용하느냐의 담론이다. 정재영은 함께 연구한 양희송이 먼저 책을 냈음을 소개한다. 그리고 양희송은 신학 담론을 가지고 책을 썼다고 말하며, 자신은 종교사회학의 관점에서 쓴다고 저작의도를 밝힌다. 나는 종교사회학에 대한 엄정한 정의는 잘 모르겠다. 현상에 대한 연구조사를 통계를 통해서 하는 것인가 보다 한다.

정재영의 책이 꼼꼼한 분석과 다양한 조사를 통해 구체적인 현상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지만(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시사점을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들 가운데, 조사 문항 가운데 제도 교회의 꼰대 시선이 담겨있다고 느꼈다(목회에 도움을 주려는 듯, 묵회에 대한 조언들이 많이 담겨 있다). 오히려 화끈하게 불을 지핀 양희송의 거친 말투가 좋다. 내가 신대원에서 공부한 탓일까? 양희송의 질문들이 와 닿는다.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다양한 오해를 구분지어서 제시함도 좋았고, ‘1인 예배‘1인 교회’(이걸 제기했나 싶다. ‘단독자들이란 부분에서 소개하고는 있지만, 글쎄 난 잘 모르겠다.)에 대한 치열한 논의를 불러일으킬 만큼 문제제기가 좋다.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담론에 대한 토의가 필요하니까. 어쩌면 나는 내 스스로 결론을 낸 상태에서 책을 보았기에 더 그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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