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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양희송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작년 초에 대학원 동기들과 양희송의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을 무려 싸인본(?)으로 나눔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바로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겨두어야지 했는데, 밀리고 밀려 버렸다. 마음속에 한켠에 묵직함 짐으로 자리 잡아 있을 무렵 가나안 성도에 대한 또 한 권의 책이 나왔다. 정재영의 『교회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 가나안 성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두 권을 비교해서 보고 정리해야지 했는데, 이제야 겨우 정재영의 책을 읽게 되었다.
가나안 성도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한 책은 내가 알기로는 이 두 책이 국내에 유일하다. 기존 제도 교회에 대한 비판이 심하게 일 때와 궤를 같이하여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등장했다. 한국 제도 교회는 미국의 ‘이머징 교회’를 이단으로 몰아서 충분한 검토 없이 발로 뻥 차버린다던가, 영국의 ‘대안 예배’운동을 ‘그 따위’로 취급하며, 영국교회가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진단하였다. 나 또한 그러한 책들을 보며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새로운 운동들의 물결이 담긴 책들(예: 『세이비어 교회』, 『깊이 있는 교회』 등의 책들)은 나왔고, 제도 교회 틀에 매우 실망하던 나는 제도 교회에 있는 제도들, 예를 들면, 묵도, 헌금, 직분 등에 의문을 품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듣게 된 것이 ‘가나안 성도’라는 단어이다. 처음에는 웃었다. 교회쇼핑족, 또는 설교쇼핑족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꿈꿨지만, 제도 안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그저 웃어 넘겼다. 그리고 신대원에 입학하지 전부터 교회 찾기를 시작했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에 대한 갈급함이었다. 눈을 돌려 보니 같은 고민을 한 선배들은 넘쳐났고, 이미 작은 교회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양한 교회들을 보면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을 걷기 시작하고, 신대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만난 책이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인데, 그 때 함께 논의했던 동기들과 논쟁의 핵심은 ‘1인교회가 가능한가?’였다. 나는 이 책의 핵심이 ‘1인교회가 가능한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논의는 자꾸 그 쪽으로 흘러갔다. 그 후에 양희송의 책은 SNS상에서 대단한 논쟁을 불러 왔고, 다양한 교계와 학계에도 많은 논의들이 된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논의 대부분도 ‘1인교회가 가능한가?’였다.
그 화두보다 ‘가나안 성도’라는 전체 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파악이 중요할 듯 보였다. 나는 ‘가나안 성도’ 현상이 새로운 교회들이 출현을 예고하며 당면성을 제기하고 있고, 제도 교회, 교단들이 교회의 다양성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논의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동기 녀석 중 하나는 ‘1인교회’에 대한 의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며, ‘가나안 성도’ 현상을 병적 현상으로 치부했다. 현 제도 밖에 있는 교회에 대해 ‘병적 현상’이라는 정의를 내린 것이다. 그러면서 이미 나는 ‘가나안 성도’라고 하였다(그럴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런 논의는 양희송이 초래한 듯싶다. 책의 시작을 혼자 드리는 예배로 시작해서, 마지막을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진 김교신 등을 다루며, 1인 신앙을 가지고 산 이들의 이야기로 마쳤으니, 안 그래도 제도 교회 안에 사람들은 그런 것에 문외한 일 터인데 매우 놀라고 강렬하게 남았을 것이다. 저자가 그 강렬함을 의도했는지 몰라도, 내 생각에는 그런 연유로 ‘1인 교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그런 ‘1인 교회’에 대한 뜨거운 논의들이 차츰 식어갈 때 쯤, 정재영의 책이 나왔다. 양희송의 책으로 한 번 달궈진 기독교계는 이 책에도 주목했고, 다시 ‘1인 교회’에 대한 논의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처음 같지 않았고, 잠시 뜨거워질 듯하던 논의는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이내 책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지는 모양새이다.
그래도 내 개인으로는 지속된 관심이 있었고, 기어이 책을 샀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책을 다 탐독하였다. 음……. 아쉽다. 나의 눈에는 꼰대의 시선이 포착되었다. 저자가 아니라고 하면 나야 뭐 ‘그러냐’ 그러겠지만, 나에게 이미 가나안 성도라고 하던 동기의 생각과 비슷해 보였다. 가나안 성도에 대해서 ‘병적 현상’으로 정의 내린 동기의 생각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는 지점들은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는 결론이다. 이미 ‘제도 교회로 돌아온다’는 생각은 ‘제도 교회’를 정으로 생각하고 ‘가나안 성도’를 반으로 생각함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생각이 매우 거슬린다. 예배가 무엇인가? 한국 교회가 열광한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나의 견해로는 참 좋은 책이다. 성공주의, 목적의식 등의 요소들을 빼면, 교회에 대한 것을 잘 정리한 책이라는 생각이 있다.)이라는 책에서도 예배는 하나님과 1대1의 만남이며, 대화이며, 적극적인 사랑의 나눔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담론을 수용했다면, 그리고 개인 묵상을 강력하게 권장한다면 ‘1인 예배’가 가능하다고 인정한 것이 아닌가? ‘1인 교회’에 대한 논의에 대해 많은 이들이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담론들을 살펴봐야 하지만, 그렇지 않기에 ‘1인 예배’와 ‘1인 교회’를 혼동해서 생각하고 비판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교회는 나가고 안 나가고 하는 곳인가? 아님 우리가, 내가 교회가 되어야 하나? 나는 내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형상이라는 단어와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는 인간의 언어 속에서 구별되는 것이지 이미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우리고, 우리가 나이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이라는 영원, 무한이란 전체에 접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교회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순간 나는 이미 우주적 교회에 들어간다. ‘교회됨’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지, ‘1인 예배’, ‘1인 교회’가 가능한지 안 한지 논의할 시점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다양한 교회들이 새롭게 출현해야 하고, 그것을 전체가 어떻게 수용하느냐의 담론이다. 정재영은 함께 연구한 양희송이 먼저 책을 냈음을 소개한다. 그리고 양희송은 신학 담론을 가지고 책을 썼다고 말하며, 자신은 종교사회학의 관점에서 쓴다고 저작의도를 밝힌다. 나는 종교사회학에 대한 엄정한 정의는 잘 모르겠다. 현상에 대한 연구조사를 통계를 통해서 하는 것인가 보다 한다.
정재영의 책이 꼼꼼한 분석과 다양한 조사를 통해 구체적인 현상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지만(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시사점을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들 가운데, 조사 문항 가운데 제도 교회의 꼰대 시선이 담겨있다고 느꼈다(목회에 도움을 주려는 듯, 묵회에 대한 조언들이 많이 담겨 있다). 오히려 화끈하게 불을 지핀 양희송의 거친 말투가 좋다. 내가 신대원에서 공부한 탓일까? 양희송의 질문들이 와 닿는다.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다양한 오해를 구분지어서 제시함도 좋았고, ‘1인 예배’와 ‘1인 교회’(이걸 제기했나 싶다. ‘단독자들’이란 부분에서 소개하고는 있지만, 글쎄 난 잘 모르겠다.)에 대한 치열한 논의를 불러일으킬 만큼 문제제기가 좋다.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담론에 대한 토의가 필요하니까. 어쩌면 나는 내 스스로 결론을 낸 상태에서 책을 보았기에 더 그런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