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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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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인 황정은 작가의 <웃는 남자>를 비롯해서 본심에 오른 작가들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평소에 좋아하고 신간이 나오면 항상 챙겨 읽었던 작가들의 이름이 보여서 더 반가웠던 책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문학상을 통해 많은 작가들의 훌륭한 소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출판사의 취지에 따라 한국문학을 널리 알리자는 의미에서 출간 후 1년 동안 55백 원이라는 믿기지 않는 가격으로 이 책을 만날 수 있어서 이렇게 좋은 소설들을 값싸게 얻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다.

 

<웃는 남자>에 실린 7명 작가 중에서 윤성희 작가만 제외하고 다른 작가들의 소설은 예전부터 많이 읽었는데, 윤성희 작가의 <베개를 베다>를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중에 이번에 윤성희 작가의 글을 처음으로 읽을 수 있어서 한국문학을 널리 알리자는 의미에 부합하게 된 바람직한 예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책에 실린 순서대로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가장 좋았던 작품은 황정은 작가의 <웃는 남자>였고 개인적으로 윤성희 작가의 <여름방학>, 이기호 작가의 <최미진은 어디로>, 그리고 편혜영 작가의 <개의 밤>이 좋았다.

 

웃는 남자 - 황정은

서울의 낡고 퇴락한 곳을 전전하며 살고 있는 두 주인공의 삶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한국 사회가 겪은 아픔과 진통을 글 속에 녹였는데, 오래되고 황폐해진 낙원상가처럼 한국 현대사의 병폐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속에 무거운 추가 덜컹 내려앉은 것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예전에 읽었던 황정은 작가의 소설도 그러했지만 작가의 소설에선 언제나 쓸쓸함과 서늘함이 느껴진다. 직접적으로 거칠고 강경한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 더 마음속에 오래 남고 그 그림자가 오래 머물다 간 느낌이다.

 

 

이기호- 최미진은 어디로

외장하드를 사려고 중고나라에 접속했다가 자신의 책을 팔고 있는 판매자를 발견한 작가가 호기심 반, 씁쓸한 마음 반으로 그 판매자를 직접 만나 자신의 중고책을 사기로 한다. 그냥 중고책이면 위로가 됐을까? 팔고 있는 책에 달린 코멘트를 읽고 작가는 여러 가지 생각에 복잡해진다.

 

49. 이기호/병맛 소설, 갈수록 더 한심해지는, 꼴에 저자 사인본(4천 원-그룹1, 그룹2에서 다섯 권 구매 시 무료 증정)

 

병맛소설로도 모자라 갈수록 더 한심해질 뿐만 아니라 저자 사인본이란다... 게다가 다섯 권 구매하면 1권 서비스 책까지 얹어주는 너그러운 쿨매인데, 판매자는 이 책을 빨리 팔아 해치우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기호 작가,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일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아슬아슬한 현실과 상상의 헷갈림이 이 글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이기호 작가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위트까지 더해졌지만 직업 작가로서 살아가는 헛헛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너무 궁금해서 작가에게 직접 겪은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다! 설마 아니겠지?

 

따로 감상평을 적진 않았지만 가정폭력과 황혼 이혼을 다룬 김숨 작가의 <이혼>도 인상적이었다. 오랫동안 정신적인 학대와 폭력을 겪은 엄마는 성인이 된 딸의 도움을 받아 이혼을 하려고 하지만 40년 동안 당한 폭력으로 자아와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조차 상실한 여성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평소에 내가 너무 좋아하는 편혜영 작가의 <개의 밤> 역시 완성도 높은 편혜영 작가다운 소설이라 이 책을 읽기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 작가의 새로운 소설을 만난다는 설렘과 처음 접하는 작가의 소설 세계를 알아가는 재미는 책과 독서가 주는 큰 즐거움이다. 올가을에는 한국 작가의 신간이 많이 쏟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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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스페셜 에디션)
박민규 지음 / 예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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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박민규 작가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재미있게 읽고 전혀 관심 없던 야구를 보기 시작했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더블>까지 읽었는데 그 이후 작가의 활동도 뜸했던 탓인지 다른 소설은 읽지 못했다. 그러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리커버 에디션이 나와서 다시 읽게 됐는데 너무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줄거리가 전혀 기억나지 않아 두 번째 읽는 것인데도 처음 읽는 것 같았다. (지겹지 않고 좋은 건가?) 게다가 사실 원래 책 표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리커버 에디션은 핑크색의 하드커버의 여심 저격하는 표지라 눈에 들어왔다. 인터넷 서점 구매율이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높다고 하니 여성의 취향에 맞는 표지가 책 판매에는 더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오로지 집에서 푹 자고 맘껏 먹고 읽고 싶은데 쌓아만 두었던 책들 읽고 완결되면 보려고 참았던 <비밀의 숲> 보려는 계획으로 일주일간의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다. 여름휴가의 첫 번째 책으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었는데 8년 전에 읽었던 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똑같은 책을 대하는 '' 자신이 많이 달라졌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무명의 배우였던 주인공 ''의 아버지는 고정적인 경제활동 없이 집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서 연기 연습을 하고 때때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때, 어머니는 식당에 나가 일을 하며 가장 역할을 했다. 빠듯한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연기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턱없이 비싼 비디오를 사온다거나 느닷없이 춤이나 노래를 배우러 다닐 때 어머니는 현실을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미남이었던 아버지에 비해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릴 만큼 어머니는 펑퍼짐하고 아버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박색이었다. 그러다 아주 우연한 기회로 아버지는 인기 스타가 되었고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탤런트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티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지닌 ''는 열아홉 살이 되어 백화점에 취직하면서 '그녀'를 만나게 된다.

 

입사할 때부터 봐왔지만 아무도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 일을 잘하는 것과 상관없이 점점 더 지하로 내려가 일을 하게 되고 동료가 아닌 연인으로서 함께 걷는다면 떨어져 걷거나 부끄러워 얼굴을 돌린다에 월급을 걸 정도로 추하고 못생긴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어울릴 것 같진 않았던 나와 그녀가 퇴근 후에 함께 치킨과 맥주를 먹고 가끔 영화도 보며 가까워지고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그녀의 외모에서 비롯되는 낮은 자존감과 현실의 벽으로 인해 헤어지게 되고 결국 재회하게 되지만 비극적인 사고를 맞이하는 극적인 스토리와 더불어 생각지 못했던 결말과 반전으로 이야기는 쉼 없이 달려간다.

 

이 책의 화자인 ''의 이야기가 촘촘히 전개됨과 동시에 ''의 생각과 감정이 설명되고 묘사되는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작가의 생각으로 읽히게 되는데 아마도 '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실감 나게 쓰는 작가의 능력인 것 같다. 이렇게 느껴지는 것은 생동감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너무 작가의 말 같아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내 입장에선 장점으로만 다가오진 않는다.

 

특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선 못생긴 여자였던 어머니, 못생긴 여자였던 그녀인 그들의 암울한 삶은 '못생김'에서 비롯됐다는 전제가 너무 불편했다. 얼굴이 예쁜 여자는 상처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상처를 받더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상처를 가진 못생긴 여자는 살아가는 일 자체가 힘들다는 구절, 못생긴 여자는 항상 어둡고 자신감 없고 사회에서 차별받는 존재로 그린 점, 예쁜 여자는 자신의 미모를 무기로 이용해서 살아가는 그런 종류의 사람으로 묘사한 점을 읽으면서 외모를 향한 작가의 시선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이 사회가 외모지상주의의 단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못생긴 여자는 으레 그럴 거라는 확신에 찬 어조와 그와 더불어 예쁜 여자에 대한 묘사도 그 미모를 이용하는 속물적인 존재로 그린 것엔 동의할 수 없다. 그럼 못생긴 남자는? 이란 의문이 들고 못생긴 여자는 용서할 수 없고 못생긴 남자는 괜찮다는 말인가? 삐딱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작가의 말에서 '인류는 단 한 번도 못생긴 여자를 사랑해주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이 책을 읽고 못생긴 여성에 대한, 추함에 대한 작가의 차별적인 생각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소설과 그 소설을 쓴 작가의 적당한 거리감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야기의 재미와 상관없이 읽는 게 불편했다면 프로불편러인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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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일요일들 - 여름의 기억 빛의 편지
정혜윤 지음 / 로고폴리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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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출간된 <인생의 일요일들>까지 정혜윤 작가의 책을 8권이나 읽었다. 한 작가의 책을 8권이나 읽었다는 건 그 작가의 확실한 팬이라는 것이고 작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혜윤 작가의 글 쓰는 영역은 꽤나 넓어서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뜨거운 독서생활에서 나오는 책 이야기, 런던, 스페인 여행기, 사회에서 알아주기를 바라며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절대 평범하지 않다. 나는 이것이 작가만의 특별한 감수성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일요일 아침. 우리는 익숙한 이불, 냄새, 온기, 사랑하는 가족의 촉감, 창밖으로 들리는 희미한 거리 소음, 눈꺼풀 위로 일렁이는 햇빛, 읽다가 접어둔 책, 마시다 만 컵, 편안함을 주는 사물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때 발가락만 꼼지락거리면서, 반쯤은 꿈결 속에 있는 것처럼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을래. 깨우지 마!" 혹은 정반대로 낯선 곳에서, 익숙한 것과 멀리 떨어져서 전보다 훨씬 고독해진 상태일 때 이와 똑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우리가 영혼 안으로 받아들인 무엇인가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 "아, 참 좋다. 이렇게 조금만 더 있으면 좋겠어." 
(인생의 일요일들 p.7)


아무도 없는 일요일 오전(울 집 강아지 여름이 빼고) 늦잠자고 일어나서 간단히 밥을 먹고 혹시 금방 배고파질까 봐 복숭아 한 알까지 먹고 샤워하는 동안 커피를 내리고 젤 큰 유리컵에 얼음 꽉꽉 채워 넣은 뒤에 커피를 부어 아이스커피를 만들었다. 막 씻고 나와 순간 뽀얗게 보이는 얼굴에 팩을 올리고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인생의 일요일들>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위의 구절을 읽으면서 지금 나의 시간과 같은 느낌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집은 산골에 있어서 거리 소음 대신 새소리가 거슬리지 않을 만큼 들리는 것이 딱 하나 다른 점이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더라도 다양한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감정과 깨달음이 있기에 때론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가' 가느냐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리스를 여행한 이야기를 특정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 것인데, 책을 읽는 동안 편지를 받는 사람은 나로 느껴진다. 여행에서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곳을 다녔는지,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지 이런 흔한 소회가 아니라 여행을 하는 현재 속에서 내 생각의 흐름대로 편지를 쓴 것 같아서 아무 곳에 나 앉아서 저 멀리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옆에 앉아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어떤 때는 뭔가에 발이 걸려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좋은 일 같아요. 그때 강제로라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니까요. 오늘 저는 생각이 많습니다.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카는 과연 도착할 수 있을지 고뇌에 들끓게 하는 목적지지만 그렇다고 장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타카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마술에도 걸리지 않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늘 그리워하면서 바라보고 움직이는 '방향'이에요. 
다른 세상이 아니라 '다른 삶'이라는 생각이 지금으로선 제게 '이타카'예요. 그냥 놔두고 죽으면 후회할, 고쳐야 할 단점은 너무나 많아요. 사소하게나마 시작할 수 있는 일도 그런 단점만큼이나 많아요. 이 생각이 없다면 저는 일요일을 풍요롭게 보내고도 월요일 아침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할 거예요. 
(인생의 일요일들 p.212)


단점 많고 고민 많은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앞이 아닌 다른 방향을 잠깐 보고 '다른 삶'을 생각하며 나의 '이타카'를 찾고 있다. 언제쯤 찾을 수 있을지, 언제쯤 도착할 수 있을지 끝없는 생각으로 채운 일요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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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달리는 완벽한 방법 - 보통의 행복, 보통의 자유를 향해 달린 어느 페미니스트의 기록
카트리나 멘지스 파이크 지음, 정미화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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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시절 1년에 한 번 체력측정하는 날이 있었는데 평소에 운동을 싫어했기 때문에 별로 반갑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승부욕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하찮은 내 기록을 도대체 뭐에 쓰려는 건지 쓸데없다는 생각도 들고 특히 오래달리기를 할 땐 아프다는 핑계로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 끝까지 달리다 보면 극한으로 몰리는 체력적, 정신적 고난에 울고 싶었다. 여전히 달리기뿐만 아니라 가벼운 조깅도 꺼려하기 때문에 마라톤을 하면서 정서적인 치유를 경험했던 작가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더 집중해서 <그녀가 달리는 완벽한 방법>을 읽었다. 

갑작스럽게 비행기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스무 살이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운 삶의 무게였다. 학업과 여행으로 20대를 보내지만 마음 깊은 곳에 우울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꼬박 1년을 세계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 스포츠센터에 가서 러닝머신 위에서 뛰는 것으로 저자의 마라톤 인생이 시작된다. 

우울하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운동이 어떻게 영향이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험하는 것처럼 저자는 달리기에 매달린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10년 동안 그녀의 인생엔 상실감만 있었는데 달리기를 하고 마라톤에 참가하면서 차츰 인생의 새로운 문을 열고 밝은 곳으로 들어간다. 

마라톤에 참가하면서 '여성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이고 얼마나 어렵게 쟁취된 것인지 알게 된다. 
여성은 1960년 로마 올림픽부터 800미터 이상 육상 종목에 참가할 수 있었고 1984년 LA 올림픽부터 마라톤 종목에 참가할 수 있었다. 1800년대가 아니라 1900년대라는 사실에 내가 잘못 읽은 건 줄 알았다. 

왁싱 하지 않은 여성의 겨드랑이 털, 브래지어를 거부하는 가슴, 남성과의 동등한 급여, 폭력으로부터 벗어난 삶, 생식권을 보장받기 위해 애쓰는 것만이 페미니즘이 아니라 그저 달리는 것, 남성과 동등하게 육상과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것조차 간절하게 쟁취하고 획득해야 하는 산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여성은 마라톤 훈련을 위해서든 건강을 위해서든 성추행에 대한 두려움 없이 공원에서 달릴 수 있는 자유를 갈구한다는 것을 이 사회는 알고 있을까? 난 달리기는 즐기지 않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반려견과 산책을 하는데 매일 가는 공원이라도 주변에서 누군가 갑자기 나타날까 봐 신경이 곤두서있고 차 안에 있어도 항상 문을 잠그는 게 습관이 되어 있고 공원에 모르는 남자가 있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도 종종 있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너만 오버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살인사건 피해자의 90% 이상이 여성이고 사람 많은 번화가인 강남역에서 아무 이유 없이 여성이 살해되는 게 지금 한국 사회 현실 아닌가? 항상 불안에 떨고 긴장하고 마음 편하게 산책할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회에서 여성이 달리기를 한다는 건 단순히 달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살고 있는 호주에서도 멜버른의 한 공원에서 마사 부코티치라는 젊은 여성이 칼레 찔려 사망한 채 발견된 사건도 있었다. 

저자는 달리기를 하며 우울에서 벗어났던 자신의 이야기와 여성이 달리기를 함으로써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자신의 경험을 페미니즘 이슈와 연결해 전개한 내용도 흥미로웠고 같은 여성으로서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덮는 순간엔 '난 내일 자유롭게 아무 위험 없이 산책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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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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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소설 속의 '나'는 시사잡지사에서 문화계를 이끌어갈 신진들을 인터뷰하는 코너를 맡고 있는 기자이다. 보도사진을 찍는 젊은 사진작가 권은을 인터뷰하게 되는데 두 번의 인터뷰를 통해 20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22살 때 필름 카메라를 처음 접하면서 사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관련 책을 한 권 사서 공부했는데, '사진은 빛의 예술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진이 예술의 영역에 있다는 생각도, 빛과 관련됐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서 그 문장이 새로우면서 문학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나'는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작고 추운 방에 홀로 있는 권은을 세상과 연결해주었는데 그 매개체가 바로 카메라였다. 장롱에 있던 필름 카메라를 훔쳐 권은에게 주는데 '나'는 그것이라도 팔아 돈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권은은 카메라를 팔지 않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사물에 깃든 빛을 모아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마치 두 사람을 태운 전혀 다른 두척의 배가 똑같은 섬에서, 똑같은 풍랑을 견디며 잠시 표류한 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이라는 책 속의 구절처럼 나와 권은의 이야기와 대척점에 있는 듯한 알마 마이어의 이야기 또한 흥미로웠다. 비치는 종이에 그린 똑같은 그림을 포개놓은 듯한 그들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손길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삶이었다. 

<빛의 호위>를 처음 다 읽자마자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두 번째 읽었는데 두 번째 읽었을 때가 더 좋았고 세 번까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순응이 되지 않는 순간, 겨울 햇빛이 온 거리를 내리비치는 순간을 떠오르게 하는 표지와도 잘 어울린다. 



번역의 시작 
이야기 속의 '나'는 사회생활에 염증을 느껴 모든 걸 정리하고 미국에 가서 공부하려고 하는데 대학원 등록금이 없어서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태호의 말에 적금을 해지해서 빌려준다. 회사 퇴직금이 나오면 바로 식을 올린 뒤 함께 미국으로 가자던 태호는 전화 한 통 없이 홀로 출국한다. 예스와 노, 그리고 오케이가 할 줄 아는 영어의 전부였던 나는 태호를 만나러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미국으로 간다. 미국 방문 비자 기한인 3개월 동안 빌려줬던 돈을 받기 위해 태호의 집에서 껄끄러운 동거를 하게 되는데, 태호의 아파트를 청소하던 안젤라와 친구가 된다. 안젤라는 15년 전 아르헨티나를 떠나 미국으로 밀입국하면서 잃어버린 남동생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을 하던 중 벤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툭하면 안젤라를 폭행하고 괴롭힌다. 나와 안젤라의 인생에 불쑥 들어온 남자 때문에 차근차근 쌓아오던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나와 안젤라가 만났던 뉴욕이라는 도시, 그리고 그들 인생의 순간은 회색빛을 떠올리게 했다. 



사물과의 작별 
결혼을 하지 않아 남편도, 자식도 없는 고모는 예순 살의 나이에 치매를 확진 받고 신변을 정리한다. 예금은 요양병원의 병원비로 나가게 하고, 애지중지 기르던 고양이 두 마리는 동물병원으로 보내고, 형제들과 조카들을 불러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자신의 병명을 밝히고 요양병원엔 간다고 말한다. 고모가 요양병원에서 지낸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고모에게 마지막 선물처럼 뭔가 준비를 하는데 바로 '서군'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서군은 1970년대 고모가 레코드 가게에서 일할 때 만난 남학생인데 그는 재일조선인으로 그 당시 한국으로 유학을 왔었다. 고모와 서군의 마음이 이어질 수 없었고 평생을 만날 수 없었던 이야기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자백'을 떠올리게 한다. 사물을 통해 이야기를 펼쳐가는 작가의 깊은 사유가 인상적이었다. 



산책자의 행복 
대학의 철학과 강사로 일하다 철학과가 없어지면서 생활고를 겪게 되고 동네의 편의점에서 일하게 된 한 여자가 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중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면 혹시나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일까 봐 온몸이 뻣뻣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얼굴은 바닥만 바라보게 된다. 인생의 고단함과 혹독한 변화를 대차게 겪어가며 그녀는 오늘도 산책을 한다. 
책에 수록된 순서대로 읽고 있는데 첫 번째 실린 작품이자 표제작인 <빛의 호위>와 더불어 <산책자의 행복>이 지금까지 가장 좋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등장인물들이 지고 있는 삶의 짐과 슬픔이 그대로 내 안에도 축적되는 것 같아 점점 읽는 게 힘들어진다. 


***

이 책을 읽는 동안 책 표지와 같은 회색빛이 계속 떠올랐다. 밝고 따사로운 느낌도 아닌 어두운 그늘도 아닌 그 중간쯤의 색깔이 책의 전반에서 느낄 수 있다. <빛의 호위>의 세계 속에선 회색빛과 같은 사람들을 찾아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세심한 눈길로 재해석한 작가의 시선이 참 좋았다. 문학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한 사람의 삶을 창조하고 그것을 통해 독자의 방식으로 기억한다는 건 언제나 소중한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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