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달리는 완벽한 방법 - 보통의 행복, 보통의 자유를 향해 달린 어느 페미니스트의 기록
카트리나 멘지스 파이크 지음, 정미화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중고등학교 시절 1년에 한 번 체력측정하는 날이 있었는데 평소에 운동을 싫어했기 때문에 별로 반갑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승부욕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하찮은 내 기록을 도대체 뭐에 쓰려는 건지 쓸데없다는 생각도 들고 특히 오래달리기를 할 땐 아프다는 핑계로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 끝까지 달리다 보면 극한으로 몰리는 체력적, 정신적 고난에 울고 싶었다. 여전히 달리기뿐만 아니라 가벼운 조깅도 꺼려하기 때문에 마라톤을 하면서 정서적인 치유를 경험했던 작가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더 집중해서 <그녀가 달리는 완벽한 방법>을 읽었다. 

갑작스럽게 비행기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스무 살이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운 삶의 무게였다. 학업과 여행으로 20대를 보내지만 마음 깊은 곳에 우울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꼬박 1년을 세계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 스포츠센터에 가서 러닝머신 위에서 뛰는 것으로 저자의 마라톤 인생이 시작된다. 

우울하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운동이 어떻게 영향이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험하는 것처럼 저자는 달리기에 매달린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10년 동안 그녀의 인생엔 상실감만 있었는데 달리기를 하고 마라톤에 참가하면서 차츰 인생의 새로운 문을 열고 밝은 곳으로 들어간다. 

마라톤에 참가하면서 '여성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이고 얼마나 어렵게 쟁취된 것인지 알게 된다. 
여성은 1960년 로마 올림픽부터 800미터 이상 육상 종목에 참가할 수 있었고 1984년 LA 올림픽부터 마라톤 종목에 참가할 수 있었다. 1800년대가 아니라 1900년대라는 사실에 내가 잘못 읽은 건 줄 알았다. 

왁싱 하지 않은 여성의 겨드랑이 털, 브래지어를 거부하는 가슴, 남성과의 동등한 급여, 폭력으로부터 벗어난 삶, 생식권을 보장받기 위해 애쓰는 것만이 페미니즘이 아니라 그저 달리는 것, 남성과 동등하게 육상과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것조차 간절하게 쟁취하고 획득해야 하는 산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여성은 마라톤 훈련을 위해서든 건강을 위해서든 성추행에 대한 두려움 없이 공원에서 달릴 수 있는 자유를 갈구한다는 것을 이 사회는 알고 있을까? 난 달리기는 즐기지 않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반려견과 산책을 하는데 매일 가는 공원이라도 주변에서 누군가 갑자기 나타날까 봐 신경이 곤두서있고 차 안에 있어도 항상 문을 잠그는 게 습관이 되어 있고 공원에 모르는 남자가 있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도 종종 있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너만 오버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살인사건 피해자의 90% 이상이 여성이고 사람 많은 번화가인 강남역에서 아무 이유 없이 여성이 살해되는 게 지금 한국 사회 현실 아닌가? 항상 불안에 떨고 긴장하고 마음 편하게 산책할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회에서 여성이 달리기를 한다는 건 단순히 달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살고 있는 호주에서도 멜버른의 한 공원에서 마사 부코티치라는 젊은 여성이 칼레 찔려 사망한 채 발견된 사건도 있었다. 

저자는 달리기를 하며 우울에서 벗어났던 자신의 이야기와 여성이 달리기를 함으로써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자신의 경험을 페미니즘 이슈와 연결해 전개한 내용도 흥미로웠고 같은 여성으로서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덮는 순간엔 '난 내일 자유롭게 아무 위험 없이 산책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이 끝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