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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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소설 속의 '나'는 시사잡지사에서 문화계를 이끌어갈 신진들을 인터뷰하는 코너를 맡고 있는 기자이다. 보도사진을 찍는 젊은 사진작가 권은을 인터뷰하게 되는데 두 번의 인터뷰를 통해 20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22살 때 필름 카메라를 처음 접하면서 사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관련 책을 한 권 사서 공부했는데, '사진은 빛의 예술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진이 예술의 영역에 있다는 생각도, 빛과 관련됐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서 그 문장이 새로우면서 문학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나'는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작고 추운 방에 홀로 있는 권은을 세상과 연결해주었는데 그 매개체가 바로 카메라였다. 장롱에 있던 필름 카메라를 훔쳐 권은에게 주는데 '나'는 그것이라도 팔아 돈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권은은 카메라를 팔지 않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사물에 깃든 빛을 모아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마치 두 사람을 태운 전혀 다른 두척의 배가 똑같은 섬에서, 똑같은 풍랑을 견디며 잠시 표류한 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이라는 책 속의 구절처럼 나와 권은의 이야기와 대척점에 있는 듯한 알마 마이어의 이야기 또한 흥미로웠다. 비치는 종이에 그린 똑같은 그림을 포개놓은 듯한 그들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손길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삶이었다. 

<빛의 호위>를 처음 다 읽자마자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두 번째 읽었는데 두 번째 읽었을 때가 더 좋았고 세 번까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순응이 되지 않는 순간, 겨울 햇빛이 온 거리를 내리비치는 순간을 떠오르게 하는 표지와도 잘 어울린다. 



번역의 시작 
이야기 속의 '나'는 사회생활에 염증을 느껴 모든 걸 정리하고 미국에 가서 공부하려고 하는데 대학원 등록금이 없어서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태호의 말에 적금을 해지해서 빌려준다. 회사 퇴직금이 나오면 바로 식을 올린 뒤 함께 미국으로 가자던 태호는 전화 한 통 없이 홀로 출국한다. 예스와 노, 그리고 오케이가 할 줄 아는 영어의 전부였던 나는 태호를 만나러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미국으로 간다. 미국 방문 비자 기한인 3개월 동안 빌려줬던 돈을 받기 위해 태호의 집에서 껄끄러운 동거를 하게 되는데, 태호의 아파트를 청소하던 안젤라와 친구가 된다. 안젤라는 15년 전 아르헨티나를 떠나 미국으로 밀입국하면서 잃어버린 남동생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을 하던 중 벤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툭하면 안젤라를 폭행하고 괴롭힌다. 나와 안젤라의 인생에 불쑥 들어온 남자 때문에 차근차근 쌓아오던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나와 안젤라가 만났던 뉴욕이라는 도시, 그리고 그들 인생의 순간은 회색빛을 떠올리게 했다. 



사물과의 작별 
결혼을 하지 않아 남편도, 자식도 없는 고모는 예순 살의 나이에 치매를 확진 받고 신변을 정리한다. 예금은 요양병원의 병원비로 나가게 하고, 애지중지 기르던 고양이 두 마리는 동물병원으로 보내고, 형제들과 조카들을 불러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자신의 병명을 밝히고 요양병원엔 간다고 말한다. 고모가 요양병원에서 지낸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고모에게 마지막 선물처럼 뭔가 준비를 하는데 바로 '서군'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서군은 1970년대 고모가 레코드 가게에서 일할 때 만난 남학생인데 그는 재일조선인으로 그 당시 한국으로 유학을 왔었다. 고모와 서군의 마음이 이어질 수 없었고 평생을 만날 수 없었던 이야기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자백'을 떠올리게 한다. 사물을 통해 이야기를 펼쳐가는 작가의 깊은 사유가 인상적이었다. 



산책자의 행복 
대학의 철학과 강사로 일하다 철학과가 없어지면서 생활고를 겪게 되고 동네의 편의점에서 일하게 된 한 여자가 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중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면 혹시나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일까 봐 온몸이 뻣뻣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얼굴은 바닥만 바라보게 된다. 인생의 고단함과 혹독한 변화를 대차게 겪어가며 그녀는 오늘도 산책을 한다. 
책에 수록된 순서대로 읽고 있는데 첫 번째 실린 작품이자 표제작인 <빛의 호위>와 더불어 <산책자의 행복>이 지금까지 가장 좋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등장인물들이 지고 있는 삶의 짐과 슬픔이 그대로 내 안에도 축적되는 것 같아 점점 읽는 게 힘들어진다. 


***

이 책을 읽는 동안 책 표지와 같은 회색빛이 계속 떠올랐다. 밝고 따사로운 느낌도 아닌 어두운 그늘도 아닌 그 중간쯤의 색깔이 책의 전반에서 느낄 수 있다. <빛의 호위>의 세계 속에선 회색빛과 같은 사람들을 찾아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세심한 눈길로 재해석한 작가의 시선이 참 좋았다. 문학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한 사람의 삶을 창조하고 그것을 통해 독자의 방식으로 기억한다는 건 언제나 소중한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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