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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그녕 ㅣ marmmo fiction
류현재 지음 / 마름모 / 2026년 1월
평점 :
#빼그녕 #류현재 #마름모
<빼그녕>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표지에 한 소녀의 뒷모습. 아마도 제목의 그녀일 것 같다. 맞다, 백은영. 자신의 이름을 빼그녕이라고 써서 가족들은 그녀가 글자도 못쓰는 미숙한 아이로 봤지만 사실 그녀는 본 것 들은 것을 그대로 기억하는 천재소녀이다. 7살 소녀가 마을 사람들의 위선과 편견에 대항하여 뼈때리는 말을 쏟아놓는다. 어린 아이가 뭣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무시하다가 큰 코를 다친다. 통쾌하다. 이 소녀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춘입'과 '경철' 같은 사람이 진정 어른이다.
하얀 배꽃이 흩날리는 평화로운 송백리 마을에 의문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외지인 '샘 기술자'의 실종과 경철 부모의 갑작스러운 독살 사건, 그리고 한밤중 춘입과 경철이 배밭에 무언가를 파묻는 장면을 목격한 빼그녕의 기억이 얽히며 긴장이 고조된다. 망각하려는 어른들과 절대 잊지 못하는 아이의 기억력이 충돌하며 깊게 파묻혀 있던 마을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난다. 순박해 보이는 시골 공동체 이면에 도사린 이데올로기 갈등과 배타적 폭력을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집단적 이기심이 어떻게 '춘입'과 같은 약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지 빼그녕의 순수한 시선을 통해 폭로한다.
"둘이 야학인가 뭔가 거기서 마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니께 법대생이 손 그렇게 전에 만났겄지." "근데 무슨 공순이가 데모를 하다 경찰서엘 가? 데모는 대학생들이나 하는 거 아녀?""으휴, 넌 테레비도 안 보냐? 공장에서 뭐 종이에 써 들어고 소리치는 여자들 못 봤어? 경찰이 들어가도 차라리 죽이라고 버틴대잖어. 순 빨갱이들!" "그런 여자가 왜 여기까지 와 그렇게 살아냐?" "그러게 말이여. 혼자 배밭 일 다 하고 삼시 세끼 면장 네 밥 지극정성으로 차려주고, 세상에 선녀도 그런 선녀가 어딨었어?" "그러니께 그게 다 꿍꿍이가 있어서 그랬던 거여. 재산을 빼돌릴라 그랬던가." "재산은 무슨. 경찰에 붙잡혔을 때 춘입이 달랑 쌍가락지 그거 하나 가지고 있었댜..." p.163
"그리고 지금처럼 잘 커야 돼. 넌 내 친구니까. 특별한 내 친구 빼그녕." 춘입이 그렇게 말하니까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뻐근했다. 가슴 속 검은 풍선에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프랑크를 안 죽였으니 춘입도 내 친구야." "정말?" "응, 춘입이 빨갱이라도 상관없어." 춘입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다 배꽃처럼 하얀 미소를 지었다. 그 하얀 꽃 위로 비가 내리듯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고마워. 빼그녕." p.201
춘입의 노동력에 해택을 봤던 마을 사람들은 노동운동을 했던 그녀를 빨갱이라며 손가락질한다. 살인죄까지 뒤집어쓰고 감옥에 있는 그녀를 향해 돈 때문이라고 함부로 판단한다. 반면에 빼그녕은 자신과 친구가 되어준 춘입에게 빨갱이라도 상관없었다고 한다. 춘입을 위해 법정에서 증언까지 한 빼그녕은 끝까지 그녀의 친구로 남는다.
송백리의 어른들이 춘입의 헌신적인 노동력은 취하면서도 그녀의 과거를 두고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을 때, 빼그녕은 집단이 강요하는 이념 대신 자신이 겪은 다정한 기억을 신뢰한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프레임에 갇혀 한 인간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는 폭력 속에서, 일곱 살 소녀의 또렷한 기억력은 역설적으로 그 어떤 어른의 말보다 단단한 도덕적 기준이 된다. 춘입이 빨갱이라도 상관없다는 빼그녕의 선언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혐오의 시대를 건너는 유일한 구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