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은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평점 :
한 해를 마무리할 때면 나는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찾게 된다. 올해의 우수작을 훑는 일이 아니라 지금 한국문학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은 그 질문에 또렷하게 응답한다. 단편이라는 짧은 형식 안에서도 세계의 균열과 인간의 내면을 세밀하게 포착하며 여전히 문학이 우리 곁에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이번 대상작인 최은미의 「김춘영」은 한 인물의 삶을 통해 기억과 기록의 윤리를 탐구한다. 탄광촌에서 술집을 운영하던 여성 김춘영은 남성 중심의 노동서사에서 철저히 배제된 존재였다. 작가는 그 인물을 다시 불러내 ‘기억의 공백’을 채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이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지 않고, ‘누가 역사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묻는다는 것이다. 아카이브 문체로 구성된 문장은 냉정하면서도 묵직하고, 그 거리감이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더 깊은 몰입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나는 구술자들의 고유한 생를 사건으로 환원하려는 안의 방식에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김춘영의 구술이 사건의 증언으로 수렴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이 작업의 주체는 사건이 아니었다. 김춘영이었다. 나는 오직 김춘영의 말을 들을 것이다. 김춘영이 말하는 김춘영의 기억을 들음으로써 김춘영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한 개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해갈 것이다." p.17
황정은의 「문제없는, 하루」는 이름 그대로 문제없는 하루를 살아내려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러나 작가는 ‘문제없음’이 얼마나 위태로운 말인지 보여준다. 폭력의 흔적은 일상 속에 은밀히 숨어 있고 인물들은 그 위를 걷는다. 황정은 특유의 건조한 문체는 오히려 감정의 긴장을 높인다. 그녀는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그 무표정한 문장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하루는 정말 문제없는가?”
강화길의 「거푸집의 형태」는 돌봄노동의 굴레를 여성의 몸과 감정의 언어로 표현한다. 작가는 관계 속에서 서서히 금이 가는 감정의 구조를 ‘거푸집’이라는 은유로 묘사한다. 무너짐이 아니라 틀어짐, 고통이 아니라 지속의 피로로 이야기를 밀어붙인다. 강화길의 문장은 언제나 현실보다 조금 더 가까운 온도를 가진다. 이 작품에서도 그 온도는 뜨겁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김인숙의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는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그러나 그 속엔 인간의 욕망과 모성, 죄책감이 교차한다. 외계적 상상력을 빌려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은 김인숙 문학의 오래된 힘이다. 현실과 환상이 맞닿는 지점에서 인물은 자기 안의 타자와 마주한다. 이 작품은 욕망이 단지 본능이 아니라 ‘관계의 언어’임을 보여준다.
최진영의 「돌아오는 밤」은 상실을 다룬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인물이 남겨진 세계를 살아내는 과정을 그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시간의 결을 따라 번져나가고 슬픔이 깊어진다. 작가는 애도를 서사화하지 않고 감정의 결을 느리게 따라간다. 그 느림 속에서 진짜 슬픔이 찾아 오게 된다.
이 작품집은 단순히 좋은 작품을 모은 선집이 아니다. 지금의 한국문학이 집중하고 있는 주제와 문체의 방향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표다. 인물들은 대개 거창한 영웅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자신을 버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회 구조 속에서 흔들리 격한 감정의 균열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작가들은 그 틈새에서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듯하다.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은 다양한 질문이 담겨 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며, 어떤 세계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읽는다는 행위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책임으로 다가올 때 일상의 작은 변화가 되는 게 아닐까.
*출판서 제공 도서로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