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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평점 :
SF 소설을 읽는다는 건 결국, 낯선 행성에서 나를 마주하는 일이다. 해도연의 소설집 『진공붕괴』는 바로 그런 독서의 경험을 준다. 우주과학자로서의 탄탄한 지식 위에 인간의 윤리, 감정, 존재에 대한 고전적인 질문을 절묘하게 직조한 작품이다. “지구는 사라진다. 태양도 사라진다. 이 빌어먹을 행성을 떠나야 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공허하고도 압축된 진공 속에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인간의 모순과 본능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검은 절벽〉의 라미는 성간 우주선에서 사고를 겪고, 어둡고 조용한 공간에 고립된다. “지구도 달도 태양도 보이지 않는다”는 그의 절망은 단지 물리적 위치의 상실이 아니다. 관계와 신뢰의 상실, 존재의 근거가 무너지는 순간의 감각이다. 인공지능 ‘러브조이’와 나누는 차가운 대화 속에서, 인간이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작품은 그 어떤 감정도 절제된 문장에 봉합해, 오히려 더욱 깊은 불안을 침투시킨다.
〈텅 빈 거품〉은 유토피아에 대한 매혹과 회의를 동시에 품고 있다. “유토피아는 거대한 기만일 뿐이야.” 조슈의 이 말은 낙원의 실체를 뼛속까지 흔든다. 멸망을 앞둔 세계에서 인간은 유한한 행복을 누릴 것인가, 끝없는 불확실성에 몸을 던질 것인가. 상미의 선택 앞에 독자도 멈춰 서서 고민에 빠진다. 작가는 판타지에 기대지 않고, 극한의 윤리적 질문만으로 긴장을 조율한다. 그 안에서 우리의 현실은 유토피아보다 더 허약한 이상이 아닐까.
『진공붕괴』의 중심에는 끊임없이 변형되는 자아가 놓여 있다. 〈마리 멜리에스〉의 마리는 복제된 인공 뇌로 탄생한 존재다. 그녀는 묻는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탄소 결정체 덩어리에 의식이 깃들 수 있나요?” 인간성의 본질은 어디에 있을까? 기억인가, 감정인가, 혹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인가. 이 까다로운 질문 앞에 작가는 피하지 않고 파고든다. 과학이 다다른 지점에서 마주하는 철학, 그리고 그 철학을 감싸는 문학적 사유가 빛난다.
시간마저 조작할 수 있다면, 사랑도 구원될 수 있을까. 〈콜러스 신드롬〉의 재호는 잃어버린 딸을 되찾기 위해 무한 루프 속을 헤맨다. 그러나 유슬은 말한다. “네가 이 세상에서 나를 몇 번이고 지워도 난 매번 같은 유슬이야.” 존재를 반복적으로 소환하려는 사랑은, 결국 집착과 폭력으로 변질된다. 이는 SF의 외형을 입고 있지만, 사랑에 관한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작가는 외계의 존재조차 인간 내면의 거울로 활용한다.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에서 묘사된 “촉수로 둘러싸인 입”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결국 인간이 저지른 탐욕과 조작의 상징이다. 인간이 외계를 정복한다고 믿을 때, 실은 가장 낯선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외계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 내부의 결핍이 아닐까.
마지막 〈안녕, 아킬레우스〉에서 타임루프를 반복하는 남자는 한 가지를 걱정한다. “이 완벽한 하루를 내일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피하려는 그의 욕망은, 결국 죽음보다 반복을 택하게 만든다. 작가는 완벽한 시간이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진짜 삶은 불완전한 내일에 있다는 사실을 은근하지만 뼈아프게 보여준다.
『진공붕괴』는 단단하게 닫힌 우주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지를, 그러나 그 깨짐 속에서도 여전히 질문을 멈추지 않는 존재임을 일깨운다. 이토록 아름답고 끔찍한 이야기들을 지나고 나면, 독자는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앞에 선 자신이 더는 이전과 같지 않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출판사 제공 도서로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