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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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철. 예술가이자 작가, 미술원 교수였던 분.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현대지성, 2025)책을 읽자마자 폭풍 검색하여 이 분의 모든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 책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 단어 하나까지 모든 문장이 나에게 스며들었다. 군더더기, 중언부언 전혀 없고 어렵지 않는, 산뜻하고 깔끔한 문장들의 향연. 다채롭고 신선하면서도 과함이 없고 아주 매끈하다. 간결하고 밀도 높은 문장 안에 부담스럽지 않게 음미할만한 내용이 알맞게 놓여 있어 배려받는 느낌도 든다. 적당하게? 지적 예술적 생활적 자극을 받아, 읽는 내내 은은하게 행복했다.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을까. 30년 넘게 예술 활동을 하시면서 부단히 읽고 썼을 게 분명하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은 생활 속 여러 사물 안에 담긴 속성을 작가 특유의 감성과 통찰을 담아낸 책이다. 너무나도 익숙한 사물에 대한 재조명은 또다른 차원에서 일상과의 창조적인 연결 고리를 만들어낸다. 얼마나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고 탐색했을까. 문장 마다 탐복했지만 어쩌면 나는 작가의 삶의 태도와 사유의 흐름에 매혹되었는지도 모른다. 화려하고 빛나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기보다 작고 소소하고 보잘 것 없는 사물에 집중하여 예리한 시선이 담긴 단단한 사유를 살포시 흘려 둔다. 강요하지도 않고 강조하지 않는 그의 태도도 너무 좋다. 


"잠은 매일 작은 용량으로 복용하는 죽음이다.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삶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는 달콤한 마법의 외출이다. 수면제 과다 복용이 전통적인 자살법이듯, 잠은 삶과 죽음 사이를 잇는 가장 가까운 통로다. 매일 밤 우리는 이 작은 죽음의 품에 안겨서 얼룩진 낮의 악몽을 씻어내고 하얗게 빛나는 이마를 들어 새날을 맞이한다. 기적이 따로 없다." (p.173)


이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하얗게 빛나는" 나의 이마를 쓰윽 문질러본다. 기적 같은 하루을 엳어주는 잠의 효능을 적확한 문장으로 직시하니 순간 내 인생이 또렷해진다. 사소한 물건 하나에 담긴 통찰이 나에게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다독이는 듯하다. 이런 문장들이 이 책에는 백 개가 넘는다. 여기에 다 적지 못하는 게 아쉽고 또 아쉬울 따름이다. 너무 과한 칭찬은 반감을 일으킬 수도 있기에 여기서 그만해야겠다. 내가 읽은 책 중에 유일하게 밑줄도 플래그 하나 없다. 어떤 문장을 선택해야할지 몰라서. 모두가 밑줄이여서. (너무 과한가^^;)


나는 이 책을 읽고 그림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림자 같은 어둡고 음침한, 눈에도 띄지 않으며 누구도 알아봐주지 않는 것들에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것의 역할과 의미 따위가 무슨 대수인가. 당장 눈에 보이고 쫓아가야할 것들이 천지인데. 하지만 그림자가 나의 일부이며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며 "나를 생생한 실체로 떠오르게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실제로 그리는 것은 석고상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이다. 밝은 회색에서 가장 짚은 어둠 사이로 풍부한 음영의 스펙트럼을 섬세하게 구분해 묘사함으로써 화면 위에서 석고상이 생생한 실체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국어사전에서 꽃을 설명하는 글에는 꽃이라는 말이 들어갈 수 없다. 꽃 주위의, 꽃이 아닌 모든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꽃이 저절로 드러나게 해야하는 것이다... 사물의 뒷모습을 말하는 것은 사물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회색의 다채로움을 말하는 것이다."(p.4-5)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안규철. 이분의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 그 회색의 다채로움을 더 경험하다보면 나도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도서제공, 솔직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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