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 히틀러에게 저항한 학생들, 백장미단 이야기 러셀 프리드먼의 역사 교양서 2
러셀 프리드먼 지음, 강미경 옮김 / 두레아이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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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기였던 1933년에 수상 자리에 올랐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 전승국, 즉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이 주도해 맺은 평화 조약(베르사유 조약)은 독일 국민에게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었다. 이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무장을 해제하고 일정 지역을 포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몰고 온 모든 형태의 파괴와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1930년대에 독일에서 자라난 청소년치고 히틀러 청소년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청소년이 거의 없었고, 그 점에서는 숄 씨네 집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1935년 9월,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시행되면서 유대 인들은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유대 인과 터놓고 지내던 독일인들은 이제 의심을 받았다.

 

 1937년 가을, 게슈타포는 불법 청소년 단체 d.j.1.11 회원들과 그 동조자들을 잡아들이는 대대적인 단속 작업에 들어갔다. 독일 전역에서 체포된 청소년들은 슈투트가르트의 게슈타포 본부로 끌려갔다. 그중에는 당시 열다섯 살이던 한스의 남동생 베르너, 그리고 잉게와 조피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군대가 폴란드로 진격해 들어가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이틀 뒤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지만 폴란드 인들을 구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고 말았다. 폴란드는 나치의 속전속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한 달 만에 항복했다.

 

 1942년 6월 말, 반나치 전단이 뮌헨 지역 우편함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제목은 '백장미단의 전단'이었다.

 

 그해 여름, 백장미단의 전단은 잇달아 세 차례 더 나왔다. 7월 말에 이르자 비밀 활동에 가담한 학생은 열두 명으로 늘어났다. 히틀러와 나치를 공격하는 이들의 전단은 독일 도시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뮌헨의 건축가 만프레트 아이케마이어가 외진 곳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을 백장미단 모임 장소로 빌려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자칫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는데도 그는 학생들이 작업실 지하에서 전단을 인쇄하고 복사용기를 보관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 주었다.

 

 1942년 6월과 7월에 걸쳐 전단이 잇달아 모습을 드러낼 무렵 독일 군대는 소련 깊숙이 진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1943년 2월 3일,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러시아 군대에 포위된 채 엄청난 수의 사상자를 내고 결국 항복했다. 독일군 42만 명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9만 명이었다.

 

 1943년 2월 18일 목요일 아침, 한스와 조피는 프란츠요제프가 13번지에 있는 하숙집을 나와 몇 블록 떨어진 대학교로 출발했다. 한스는 전단 약 1만 5천 장을 빽빽이 채워 넣은 커다란 옷가방을, 조피는 몇 백 장을 넣은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1943년 2월 22일 월요일 오전 10시, 그러니까 처음 체포되고 나서 나흘째 되는 날 조피와 한스, 크리스토프는 뮌헨 유스티츠 궁에서 열린 이른바 인민 법정에 출두했다. 이 특별 법정은 정의를 집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치 체제의 적들을 근절하기 위해 설치된 법정이었다. 그날 아침 법정 안은 미리 초대받은 나치 당 간부, 돌격대원, 군인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피고들의 가족이나 친구는 재판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판결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잠시 휴정이 있고 나서 오후 1시 30분, 프라이슬러 판사는 피고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셋 다 단두대형을 선고받았다. 히틀러에 반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 오후 4시, 한스와 조피, 크리스토프는 차례차례 교도소 사무실로 불려 갔다. 수석 검사가 커다란 탁자에 앉아 사형 선고문을 낭독하는 동안 그들은 그 앞에서 있었다. 선처는 기대할 수 없을 듯했다. 처형은 정확히 오후 5시에 집행될 예정이었다.

 

 1944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독일군은 유럽 전역에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동부 전선의 러시아 군대와 서부 전선의 영국-프랑스-미국 연합군은 히틀러의 제3제국을 궁지에 몰아넣기 시작했다.

 

 그해 8월, 연합군은 파리를 해방했다. 1945년 3월, 러시아 군대는 엘베강에서 미국 군대와 공동 작전을 펼쳤다. 히틀러는 폭격으로 초토화된 베를린의 지하 벙커로 후퇴했다. 4월 30일, 그가 자살한 데 이어 5월 7일 독일이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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