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0 : 열하일기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0
박교영 글, 박수로 그림, 손영운 기획, 박지원 원작 / 채우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실학자들은 문명적으로 월등히 앞선 청나라에 직접 가서 느낀 그 엄청난 문화적 충격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인 조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또한 서양에서 수입된 서적을 통해 새로운 학문을 접하면서 과학에도 눈을 뜨게 되었고 이것이 장차 '청나라의 앞선 문명을 배워 우리나라의 힘을 키우자'라는 뜻을 가진 북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학자들 가운데 바로 연암 박지원이 있었던 것이고 그의 친구들인 홍대용, 이덕무 등도 있었다.

 

 [허생전]과 [호질]을 쓴 연암 박지원은 일찍부터 실학에 눈을 떴다. 당시 조선의 양반들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멸시하면서 언젠가 망할 것이고 우리가 명나라를 위해 복수를 해야 한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중국의 오랜 전통과 역사, 문화를 이어나가는 훌륭한 제도를 갖추고 있었고, 동아시아의 문명국에서 이제는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수많은 기행 문학 가운데 [열하일기]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고 생산되며 우뚝 자리하고 있는 것은 연암 박지원의 타고난 글솜씨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단순히 청나라의 문물을 기록하고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심한 관찰력과 특유의 유머 감각을 통해 그것을 헤아리고 나아가 그이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당시 조선 사회의 각성과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박지원은 1737년에 서울의 명문가 집안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장가를 들었는데, 장인인 이보천에게 학문을 배워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박지원은 20세를 전후하여 과거 시험 준비를 시작했는데, 당시 영조 말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은 그에게 정치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안겨 주었다.

 

 영조가 감탄할 만큼 글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박지원이었으나 결국 그는 과거 시험에 등을 돌리고 서울의 전의감동에서 많은 사람들과 사귀며 자신의 학문을 닦았는데, 그가 교제하던 인물들은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등 실학자들이었다.

 

 한편, 1778년에 박지원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로 들어간다. 이 연암이 박지원의 호가 되었다. 박지원이 그곳에 들어간 이유는 정조 즉위 직후 홍국영이라는 인물이 세를 떨치게 되자 평소 홍국영에 대한 비판을 하던 박지원의 신변이 위태로웠으므로 그의 친구들이 그를 피신시켰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후 1970년에 홍국영이 실각한 후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연암에게 일생일대의 행운이 찾아 온다. 바로 팔촌형이자 영조의 사위인 박명원이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생신 축하 사절단의 정사로 임명된 것이다. 박지원은 이 사행단에 자제군관 자격으로 함께 하게 되었다.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 만난 중국의 풍속과 역사, 정치, 문화 등을 그의 탁월한 관찰력과 특유의 철학적 사유로 풀어놓으며 [열하일기]라는 걸작을 세상에 남겼다. 박지원은 말년에 서울의 북촌에 계산초당이라는 집을 짓고 살다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행은 조선의 사신이 중국으로 파견되는 것을 말한다. 사신 일행은 중국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일과 보고 들은 것, 새롭게 느낀 것들을 적는 일종의 기행문인 사행록을 적어서 보고했다.

 

 여행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당시의 사행은 원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비록 힘들고 먼 여정이었지만 일단 가면 얻는 것이 훨씬 많다고 생각했다. 이 사행을 따르는 무리에는 상인도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특산품인 인삼 등을 거래해 이익을 올렸고, 중국의 특산물을 가져와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사행은 크게 정기 사행과 임시 사행으로 나뉜다. 정기 사행에는 절기상 동기를 즈음해서 보내는 동지사, 신년 축하를 위한 정조사, 황제와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성절사,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천추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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