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의 역설 - 비난의 순기능에 관한 대담한 통찰
스티븐 파인먼 지음, 김승진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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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흔히 남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이렇게 자신 안에 있는 결점과 잘못을 외부로 돌리는 것은 심리적인 쓰레기 내버리기로, 이는 남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올리려는 시도다. 그러게 자신의 부담을 밖으로 쏟아버리고 나면 적어도 한동안은 좀 더 편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마녀사냥의 핵심은 희생양 만들기다. 오래전부터 희생양을 만드는 것은 사회가 위협과 걱정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수단이었다. 희생양을 만듦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져야 할 비난의 짐을 벗는다. 결백한 표적에게로 비난을 옮겨놓는 것이다. 표적은 개인일 수도 있고 집단일 수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비난과 칭찬 사이에는 막대한 비대칭이 있다. 비난이 이뤄지는 맥락이 칭찬이 이뤄지는 맥락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이다. 우리는 죄지은 사람을 비난하지만 죄짓지 않은 사람을 칭찬하지는 않는다. 험하게 차를 모는 운전자를 비난하지만 안전하게 운전하는 사람을 칭찬하지는 않는다. 또 칭찬은 종종 후면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칭찬의 사회적 효과는 덜 가시적이고, 안전, 자유, 도덕성과 같은 커다란 사안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비난과 칭찬의 분포는 그 사회가 무엇을 칭찬받을 가치가 있다고 보는지를 반영한다. 하지만 어쨌든 부정적인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사실은 실패가 성공보다 더 자주 환기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자신의 삶이 위협받을 때 사람들은 도덕적 패닉 상태에 빠진다. 불안이 증폭되어 이성적 판단에 마비가 오면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위협의 원인으로 낙인찍어 사회의 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사회의 적은 중세 마녀부터 오늘날의 난민까지 모든 세대에 제각각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

 

 

 비난 문화는 경직되고 두려워하며 희생양을 만드는 분위기를 조장한다. 구성원들은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다. 비난 문화는 개인의 주도권을 없애고 자기방어를 촉진한다. 그럼으로써 심리학 교수 제임스 리즌이 명명한 취약 시스템 증후군, 즉 조직이 실패와 기능 장애를 일으키기 더 쉬워지는 현상을 불러온다.

 

 '누구의 잘못인가?'는 조직에서 무언가가 잘못되면 으레 들리는 말이다. 잘못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를 비난하려는 것이다. 잘못이 심각한 경우에는 강등이나 해고 등 엄한 징계가 가해진다. 그렇게 처리가 끝나고 나면, 조직은 하던 대로 일을 계속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비난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요컨대 비난 문화는 개인의 주도권을 없애고 자기방어를 촉진한다. 이러한 현상이 만연하면 위기가 닥쳤을 때 재앙이 될 수 있다. 위기 때는 일상적이지 않은 대응이 절실히 필요한데, 비난 문화에서는 그런 대응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비난 문화의 반대는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새로운 제안을 할 수 있으며 다른 이들과 협력해서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는 조직 문화다. 이런 조직에서라고 비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조직은 열려 있고, 포용적이며, 공평하다. 다시 말하면 공정하다. 공정 문화는 조직 구성원이 희생양이 되거나 앙갚음을 당할까 봐 걱정하지 않고 비판, 불평, 경고, 실수 등을 할 수 있는 문화다.

 

 

 기업은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인 활동, 노동 착취, 환경 파괴, 제품 결함, 거짓 약속이나 지키지 않은 약속 등 많은 일들에 대해 비난받는다. 거대 기업과 민간 유틸리티 (수도, 전기, 가스 등) 업체가 특히 취약한데, 이들은 최악의 기업으로 꼽혀 언론에 오르기도 한다. 가장 강한 비판이 쏟아지는 곳은 아동 노동, 포르노, 동물 학대, 무기 제조, 낙태, 담배 등과 관련된 기업이다.

 

 기업은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으면 변호와 방어에 막대한 자원을 사용한다. 소송이 제기된 경우에는 막강한 법률 팀을 구성하며, 합의금을 크게 깎는 데 성공하곤 한다.

 

 우리는 기업의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인 활동, 노동 착취, 환경 파괴, 제품 결함, 거짓 약속 등에 대해 적극 비난해야 한다. 시민 활동가들은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묻는 대표적인 사람들로, 우리가 그들의 목적과 방법론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없다면 훨씬 더 빈약한 사회에 살게 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기업들은 흔히 훌륭한 대의명분을 내세운 활동에 자사 이름을 가져다 붙이거나 NGO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쌓는다. 예술, 스포츠, 대학 및 연구 기곤 자원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들은 주도면밀한 자금 분배를 통해 적대적인 대중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비판을 완화한다.

 

 

 공공기관, 공무원, 정부 인사 등은 세금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공개하고 그들의 결정과 행위가 타당함을 설명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국민은 그들을 비난하고 책임을 물을 권리와 의무가 있다. 도덕적인 정부는 국민의 손과 눈과 입으로 만들고 지켜낼 수 있다.

 

 가해자의 사과는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지만 치유와 화해 과정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뉘우침에 진정성이 있어야하며, 필요한 경우 반드시 보상이나 배상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성 없는 사과는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회복적 사법에서 용서는 필수적이다. 용서는 비난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자신을 괴롭힌 자를 사면해주는 것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가해자가 뉘우침이나 회개를 보인 이후에 피해자가 용서하면 피해자가 심리적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의 자신감, 행복, 건강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비난은 우리가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기 위해 사용하는 온건한 방법일 수도 있고, 부드러운 언쟁일 수도 있으며, 상대방에게 독이 되고 커다란 상처와 충격을 주는 일일 수도 있다. 비난은 결혼 생활을 깨뜨릴 수도 있고, 직장 동료와의 관계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 중요한 사회적 프로젝트를 무산시킬 수도 있고, 막강한 기업에 심각한 손해를 입힐 수도 있다. 정부를 뒤엎을 수도 있고,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으며, 인종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 일상에 너무나 깊숙하게 스며들어 있다 보니, 비난은 으레 있는 일로 당연하게 여겨지기 쉽다.

 

 비난은 어떤 문제를 설명해주는 듯 보이기 때문에 주목받는다. 그렇다. 비난은 무언가에 의미를 갖다 붙이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이다. 또 비난은 위협이나 상처나 슬픔을 느낄 때 곧바로 가져다 쓰기 만만한 것이기도 하다. 비난은 상대방에 대한 추궁의 언어이자 자신에 대한 보호의 언어다. 그리고 많은 경우 비난에는 감정이 실린다. 우리는 대개 화나고 분하고 치가 떨려서 비난을 하는데 이런 감정은 우리의 시야를 급격하게 좁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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