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빚을 갚을 능력이 되는지 제대로 심사하지 않고 돈을 빌려주면 '채권자의 도덕적 해이'로 간주해서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우니라는 일방적으로 빚진 사람의 책임만을 따진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빚잔치판의 민낯이다.
사람들이 대개 빚 없이 살다가 집을 사려고 할 때 어쩔 수 없이 빚을 지는 게 아니다. 어려서부터 빚에 대한 훈련을 받고 빚의 무서움을
아는 사람들은 전세를 구할 때부터 다르다. 될 수 있으면 전세대출도 많이 안 받으려고 하고 집을 살 생각은 더더욱 멀리한다. 반면 전세대출을
받든 주택담보대출을 받든, 자기 소득이나 자산에 비해 과다한 부채를 지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신용카드와 할부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빚 자체를
위험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20~30대 세대에서 이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소비심리학 측면으로 볼 때 남자들은 꽂히면 소비하는 경향이 강하다. 새 자동차와 같이 욕망이 꽂히는 게 있으면 할부와 같이 일단 지르고
나중에 갚자는 유혹에 잘 넘어간다. 반면 여자들은 싸다고 느끼면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노린 대표적인 마케팅 수법이 홈쇼핑 무이자나
청구할인, 할인쿠폰과 같은 것들이다. 어느 쪽이든 결과적으로는 무리한 소비, 불필요한 소비로 이어져서 빚지는 원인이 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다. 한때는 저축을 장려하는 문구로 많이 쓰였다. 작은
돈이라도 계속 모으고 모으면 큰돈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사실 저축은 티끌 모아 태산이 잘 안 된다. 1만 원씩 2만 원씩 틈틈이 저축한다고
해도 얼마 안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카드 값은 아주 손쉽게 티끌 모아 태산이 된다.
흔히 카드 빚에 관해서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한 방에 수십만, 수백만 원씩 지르다 보니
카드 빚이 는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티끌 모아 태산 같은 카드 값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최근 '핀테크'가 각광을 받으면서 카드조차도 꺼낼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이제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는 아주 약간의 불편함마저도 사라지고 있다. 스마트폰을 단말기에 터치하는 것만으로 결제가 이루어지거나 지문, 홍채와 같은
생체 정보로 결제를 하는 식으로 점점 더 편리한 결제 방식이 경쟁적으로 개발되고 있다. 핀테크 사회는 소비를 편리하게 하므로 더 많은 소비를
일으키는 데 효과적이다.
현금은 신용카드보다 불편하다. 소액 결제에도 자유롭게 카드를 쓸 수 있는 한국에서는 카드
대신 현금을 쓰라고 하면 정말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소비가 편리할수록 불필요한 소비가 많아지고 소비의 감이 없어진다. 소비에 대한 감이 없다면
결제하기 힘들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절제하기 쉬운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소비를 절제하려면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를, 가상보다는 실물과 가깝게 지내라. 핀테크보다는
그나마 신용카드가 낫고, 신용카드보다는 체크카드가 낫고, 체크카드보다는 현금이 훨씬 낫다. 하루 혹은 1주일 단위로 봉투에 내가 쓸 만큼의 돈만
넣어 두고 그만큼만 쓰는 소비를 하면 그다음 달 통장 잔액이 크게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돈을 쓰는 편리함과 멀어질수록 불필요한
소비, 무리한 소비와도 멀어진다.

평균수명은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지금의 50대는 90세, 더 나아가서는
100세까지 살 확률이 높다. 50세면 대략 인생의 절반에 해당한다. 이 시점을 흔히 중년의 위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우울함, 후회, 걱정이
늘고 심리적 불안 속에서 라이프 스타일이 급격하게 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내 삶을 찾자면서 취미 생활을 찾는 비중도 늘어난다.
특히 혼자 사는 40~50대는 더더욱 자신을 위한 소비가 많다. 자녀가 있는 중년은 대개
양육과 교육으로 많은 지출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중년들은 자기를 위해 많은 지출을 한다. 이런 중년층은 인생에서 대체로 수입이 가장 많을
때이기 때문에 소비에 따른 불안감도 적다.
문제는 수입의 정점이 오래가지 않고, 그다음에 수입 절벽이 올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대부분
직장은 은퇴하기 직전의 연봉이 가장 높지만, 정점이 지나면 노년과 은퇴가 찾아오고 수입이 빠르게 줄어들지만 이미 높아져 버린 소비지출을 쉽게
끊지 못한다. 또한 자신의 수입이 줄었다고 해서 그에 맞게 삶을 바꾸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빚을 지게 되는 사람들 중에 '앞으로 이만큼 빚을 져야지' 생각하고 빚을 지게 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자신도 모르게, 가랑비에 옷 젖듯 어느 날 빚이라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전세살이가 서러워 집 하나 마련하려고 한
것뿐인데, 더 잘 살아보려고 한 것뿐인데, 조금만 더 수익을 보려고 한 것뿐인데...이유는 너무나 많지만 결과적으로는 똑같이 빚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경제체제, 소비자를 기만하는 금융회사, 카드회사의 마케팅과 정부 정책 등이 한순간에
사람들을 빚의 터널로 밀어 넣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인생의 여러 재무적 이벤트를 해결하기 위해서 빚을 질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이다. 결혼을 하면서, 전셋집을 구하면서, 전세금을 올리면서, 또 집을 사면서, 아이를 출산하면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빚의 굴레에서 점점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