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 -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최진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중국에서는 1860년에 베이징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굴욕을 당한 이후에 바로 1861년부터 고학기술 문명, 그리고 계속해서 제도, 철학으로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이어간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사실상 철학적 시선의 필요성을 알게 된 것은 1917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이 철학이라는 용어는 중국이 아닌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고, 동아시아에는 그때까지 철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학문 자체가 없었다. 1874년에 일본에서 니시 아마네가 [백인신론]이라는 책을 쓰면서 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우리는 서양을 배워나가는 중국인들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그들은 1861년에 양무운동, 1898년에 변법자강운동, 1917년에 신문화운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철학이라는 것, 사상이라는 것, 문화라는 것이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한다.

 

 

 보통 어느 하나의 철학적 내용에 몰두해서 그것이 철학이냐 철학이 아니냐 하는 논쟁에 빠지기 쉬운데, 우리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철학적 차원의 시선이다. 그리고 철학적 차원의 시선에서 철학적으로 자각해서 자신의 운명을 끌고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이자 철학적 삶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미국이란 나라는 철학적인 차원에서, 다른 말로 하면 전략적인 차원에서 상당히 잘 형성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미국의 강대한 국력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이 강대함이 영원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높이에서 국가의 진로가 결정되어야만 진정으로 독립적인 삶이 보장된다. 그 독립적 결정에서라야 지속적인 풍요와 번영이 보장된다. 독립적이지 못한 곳에서 형성된 종속적 풍요와 번영은 항상 흔들리기 마련이다. 주도권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앞선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 즉 사유의 결과들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숙지한 내용들을 계속 퍼뜨리고, 또 그들이 남긴 철학적인 내용 그대로 따라 살아보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사용했던 시선의 높이에 동참하는 능력을 배양해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이란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삶의 격을 철학적인 시선의 높이에서 결정하고 행위하는 것, 그 실천적 영역을 의미한다.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들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철학적인 시선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도전이다. 철학적인 삶은 분명 또 하나의 세계를 생성하는 삶이다. 판 자체를 보기 때문에 새판을 짤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삶은 변화의 맥락에 주도적으로 동참하는 능력이 떨어져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스스로 생산해내기가 쉽지 않다. 판 자체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새판 짜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존의 판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삶 자체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이미 정해진 삶의 방식을 답습하며 살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남들이 먼저 생산해놓은 것을 따라하거나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지식의 축적 여부를 떠나 지성적인 높이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가 그 삶의 격을 결정한다는 말로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다. 그 지성의 극처 가운데 한곳에 철학이 있다는 말이다.

 

 사유가 철학적인 높이에서 전개되고, 또 그런 높이에서 하는 활동이 국가 발전에도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의력이나 상상력이 발휘되어 주도권을 가진 나라라야 비로소 선진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 발휘되는 높이가 바로 인문적인 혹은 철학적인 높이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선진국은 전략적인 국가이다.

 

 철학을 수입한다는 마은 곧 생각을 수입한다는 뜻이다. 생각을 수입한다는 말은 우리가 수입하는 그 생각의 노선을 따라서 산다는 뜻이다. 생각의 종속은 가치관뿐 아니라 산업까지도 포함해 삶 전체의 종속을 의미한다. 생각을 수입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수출하는 사람들이 생각해낸 결과들을 수용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오히려 어려워져버리는 지경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낸 결과들은 잘 숙지하면서, 스스로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어버리기도 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결국 가장 높은 차원의 생각 혹은 사유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철학 생산국이 아니라 철학 수입국이다. 철학을 수입한다는 것은 생각을 수입한다는 것으로 결국 종속성을 드러낸다. 즉 독립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구조가 산업에까지 그대로 연결되어 종속적인 산업 구조를 갖게 한다.

 

 결국 사유의 종속성으로 창의적이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창의적 결과들을 따라하기만 하는 것, 이것이 철학 수입국인 한 벗어나기 힘든 치명적인 문제다.

 

 그런데 철학 생산국들은 좀 다르다. 밖에 있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것을 우리는 독립적인 사유라고 한다. 이 독립적인 사유의 터전은 외부에 이미 있는 사유의 내용일 수가 없다. 대신 바로 자기가 처한 당장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유는 그들이 처한 구체적인 현실 속, 역사적인 세계 자체에서 비롯된다. 사유의 뿌리를 그들이 처한 세계 그 자체에 두는 것이다. 철학 생산국들은 그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을 구성한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우선 자신을 지성적으로 튼튼하게 하는 일이다. 모든 철학적 자산은 독립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철학을 통해 자신이 튼튼해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은 높은 시선이다. 높은 차원의 활동성이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튼튼해진 그 사람은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고 새로운 빛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에 진실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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