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시대 보물찾기 2 한국사탐험 만화 역사상식 4
곰돌이 co. 지음, 강경효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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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굴왕이 남긴 단서들로 그의 행선지가 일본 오사카라는 것을 알아낸 토리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오사카 공항에 도착한다. 한편 일구를 쫓던 봉자바 역시 같은 시각 오사카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의 한 유물 수집가의 집에서 마주치게 된다. 도굴왕은 무엇 때문에 일본으로 간 것일까? 이웃 나라 일본에 남겨진 백제의 흔적을 파헤치며 향로의 비밀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토리! 보물찾기 짱 토리는 백제의 향로를 무사히 되찾을 수 있을까?

 

  광대한 영토를 개척한 고구려! 삼국을 통일한 신라! 삼국시대의 두 나라에 비해 백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이미지는 백제가 사치와 향락 때문에 망한 나라라는 인상을 우리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전해지는 유물이나 사료 또한 부족하여, 백제는 오래전부터 '잃어버린 왕국' 이란 별명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백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다문화 사회였으며, 오늘날 우리 문화의 자랑인 한류 열풍은 이미 백제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는 삼국 중 일본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은 나라이다. 지리적으로 중국 문명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전파되는 길에 위치한 백제는 단순한 중개자 역할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문화를 창조하여 전파했다. 백제와 왜의 교류는 주로 백제 쪽에서 선진 문물을 전해 주면, 왜는 군사력을 제공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백제가 처음 성립된 마한 지역은 농사와 관련된 중요한 시기마다 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풍작을 빌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의 의도를 알아야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때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무당(샤먼)이 중개자 역할을 했다.

 

  백제에는 도교 역시 전래되어 유행했다. 도교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신선이 있다고 믿었으며, 평범한 삶들도 신선을 만나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이 노력하면 스스로 신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져 점을 치거나 귀신을 쫓는 행위, 약초를 이용하여 약을 만드는 의약술 등 다양한 활동으로 이어졌다.

 

  백제는 중국의 국가 체제와 지배 제도를 모방한 통치 방식을 갖추고자 했다. 때문에 한자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되었고, 그와 더불어 유교 경전과 한문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그리고 중국 진나라의 박사 제도를 받아들여, 최고의 전문 기술을 가진 장인에게는 '박사'의 칭호를 내리고 관등을 부여했다. 

 

  신분에 따른 서열을 중요시하는 유교를 통해 백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 체제를 만들어 나갔고, 백성들에게는 충과 효를 강조하며 교양 있는 삶을 살도록 하였다.

 

  백제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로 귀족, 평민, 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귀족들은 사회 지배 계층으로 고구려의 핏줄을 이은 한성 백제 시대의 귀족뿐 아니라 이후 수도가 된 웅진, 사비 지역의 토착 세력이 새롭게 귀족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또 악공, 의사, 역술가, 수공업자 등 전문 기술자들까지 귀족이나 지배층으로 삼고 우대했다는 점에서 백제 신분 제도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백제 경제의 기본은 농업이었기 때문에 평민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고, 이를 통해 내는 세금이 나라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그 밖에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평민도 있었다. 신분제의 최하위를 이루는 천민 계층에는 전쟁에서 져서 노비가 된 전쟁 노비, 죄를 짓고 형벌을 대신하는 형벌 노비, 빚을 갚지 못해 노비가 된 채무 노비 등이 있었다.

 

  백제인의 놀이 문화로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전통 오락으로 널리 사랑받는 바둑이 있다. 이 바둑은 백제의 지배층이 즐겼던 문화이다.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첩자로 들여보냈던 승려 도림이 바둑과 장기를 잘 두어 개로왕에게 접근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바둑과 장기는 백제의 보편적인 오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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