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셜 - 전쟁 영웅들의 멘토, 천재 전략가 KODEF 안보총서 42
H. 폴 제퍼스.앨런 액설로드 지음, 박희성.박동휘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조지 캐틀렛 마셜 주니어는 1880년 12월 31일 펜실베니아 유니온타운에서 아버지 조지 마셜과 어머니 에밀리 브래드포드의 삼남매 중 막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지 마셜 주니어는 자신이 언제부터 군에 입대하고 싶어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군인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엿들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군인이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1899년 유니온타운에서 필리핀 파병 후 성공적으로 복귀하는 제 10 펜실베니아 보병연대 C중대를 위한 복귀행사가 열렸을때 마을 사람들이 필리핀에서 돌아온 유니온타운의 젊은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들의 업적에 모두가 열광했다. 작은 마을에서 열린 화려한 퍼레이드와 축하연에 마셜은 큰 감동을 받았다. 이후로 마셜은 군인의 길을 가게 된다.

  마셜은 나이 스물두 살에 오로지 버지니아 군사학교 수업과 교재만을 안내자로 삼아 민간인에서 곧장 민도로 섬 남쪽 끝에 주둔한 군의 지휘자가 된다.

  1916년 8월 14일 마셜은 대위 계급장을 달게 된다. 또한 비야 추격 임무에 참여하지 못해 전장에서 군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캘리포니아 몬테레이에 새로 창설된 장교 예비단의 30일 단기 훈련소에서 훌륭한 기획능력을 발휘하며 단기간 내에 유명해졌다. 이때 얻은 별명이 '다이너마이트' 였다.

  마셜은 여느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전투부대가 직면한 문제에 익숙했고, 장군들보다도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참호 전투에서 대부분의 병사들이 어리석게 행동해 병력이 낭비되는 것을 보았다. 비행기의 군사적 가치를 지켜보았으며, 기병대를 구시대 유물로 전락시킨 전차의 등장에 주목했다. 그는 과거에 집착하는 상급 지휘관과 그와 미래에 시선을 돌리는 젊은 지휘관들을 목격했다. 마셜은 작전참모로서 미군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전투부대의 이동을 지휘했다.

  마셜은 유럽과 아시아 두 지역의 전쟁 준비와 관련된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직책을 맡지 못했지만, 마셜 자신의 궁극적 목표였던 진급을 예상하고 이미 국제적인 전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셜은 훌륭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 우선 되는것은 스스로 자신을 리드할 줄 아는 참된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마셜은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는 말일 것이다. 누구나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 것이다.

  마셜은 주변에서 지지해 주지 않는 일이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 국가에 거대한 영향과 성공을 낙관하고 확신하면서 전략을 기획하고 추진해 나가는 힘이 있었다. 또한 마셜은 결과에 중점을 둔 전문가로 작전에서 성과가 있다면 계속 기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해임 한다.

  이만큼 마셜에게 천재 전략가라는 말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 말인지 알 것이다. 비록 전쟁터보다 교육과 참모 생활을 더 많이 했지만, 마셜에게 교육을 받은 군인들은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 큰 활약들을 하게 되고, 많은 수의 장군을 배출한 것만으로도 정말 천재 전략가라 칭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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