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로 남은 영웅 롬멜 - 그의 드라마틱한 삶과 카리스마 넘치는 창조적 리더십 KODEF 안보총서 37
찰스 메신저 지음, 한상석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 독일 장군들 중에서도 유명한 롬멜 장군의 일대기를 살펴보는데 더 없이 좋은 책 같다.

  외국 장군 중에서 에르빈 롬멜 원수만큼 전 세계인들에게 열정과 호기심, 그리고 존경심을 불러일으킨 장군은 없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중 롬멜이 이룬 업적들은 진지한 연구 주제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의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그가 발휘한 리더십은 거의 전설이 되었으며, 히틀러 암살 음모가 실패한 뒤 연루설에 휘말려 청산가리 정제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의 죽음은 인간 비극의 정수로 간주되고 있다.

  1891년 독일 남부 지역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롬멜은 일찍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으며 야외활동에 관심이 많았으며, 중년이 된 롬멜이 대대장으로서 전역했다면, 우리는 그가 남긴 소중한 교훈들에 결코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역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술과 인격, 자기홍보를 통해 독일의 새로운 지도자 히틀러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또한 프로이센 귀족 출신도 아니고 참모본부의 일원도 아니었으나, 자신의 능력과 개인적 인맥을 통해 승진하여 더 큰 책임을 맡은 지휘자가 되었다.


  롬멜은 "조용하고 인품이 뛰어나며 임기응변에 능하고" "대단한 군사적 재능" 을 지녔으며 특히 지형을 읽는 안목이 뛰어났다. 1929년 9월 롬멜은 드레스덴에 있는 보병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그의 주된 임무는 장교 후보생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는 곧 그들의 영웅이 되었고, 1932년 소령으로 진급한 롬멜은 다음 해 대대의 지휘를 맡음으로써 그동안 기울인 노력에 대한 받았다.

  롬멜은 고슬라르에서 히틀러를 처음 만났다. 1934년 9월 히틀러가 그 도시를 방문했을 때, 롬멜은 대대가 그를 1시간 동안 경호했던 것이다.

  롬멜은 나치당원은 아니었으나 사상 교육 과정에 참여했으며, 나치당의 많은 목표들을 지지했다. 애국자인 그는 특히 1914년 이전의 국경을 회복하여 독일을 다시 위대한 국가로 만들려는 히틀러의 목표에 전적으로 찬성했다. 또한 완전고용을 회복하기 위한 사회개혁조치들도 찬성했다.

  에르빈 롬멜 독일 육군 원수는 2차 세계대전 때 활동한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장성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전략가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장교들이 동맹군 연합작전에서 종종 경험하는 것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전략적 목표가 확실하지 않으면 연합합동작전의 어열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롬멜은 신화를 창조하려는 나치 정권에게 이용당했다. 그는 나치당원은 아니었으나,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것을 환영했으며 히틀러의 전쟁에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히틀러에게 저항한 독일 지하저항조직의 일원도 아니었다.

  롬멜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그가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모든 생각에 분명히 반대했고, 서구 열강들과의 평화협상에 찬성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평화협상을 주장했던 것이 그를 자살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 나치 정권은 전쟁 영웅 롬멜이 독일이 전쟁에서 패했다고 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의 성격은 세월이 흐르면서 크게 달라졌다. 현대의 군사작전은 일반적으로 전면전은 아니다. 오늘날의 분쟁은 당사국들의 존립을 좌우하지 않는다. 이 점이 바로 일부 정치가들이 군사작전의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하는 통탄할 만한 경향이 나타나고 교전규칙이 엄격해지는 주된 요인일 것이다.

  전술적인 차원에서 볼 때 오늘날의 작전 현실에서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 롬멜의 자질은 그의 용맹성과 기꺼이 앞장서서 지휘하는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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